느낀 점
2018년 고려대 베스타스 포럼의 메인 강사가 오스 기니스였다. 친구랑 오스 기니스 강의를 들으러 준비했는데 왠걸 교수님이 갑자기 사람들 체크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가던 길을 돌려서 학교로 갔다. 그런데 나는 첫째날보다 둘째날 서울대 우종학 교수와 서강대 명예교수이며 칼빈세미나리에 강영안 교수님, 두 사람의 대담이 더 기다려졌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시간을 째고 고려대로 향했다. 처음 가보는 고려대였는데 완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등학교때 대학교를 탐방하는가 싶었다.
여튼, 오스 기니스는 <소명>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난 <소명>을 읽기 전에 이 책을 먼저 읽고 오스 기니스 대표작을 읽으려고 했는데 이 책에서 그만 멈춰 버렸다. 앞으로 오스 기니스 책을 읽을 날이 또 언제 있을까 싶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책은 너무 많으니.
이 책은 어떻게 보면 후카이 토모아키의 <신학을 다시 묻다>와 약간 결이 같다. 후카이 토모아키의 책에선 동양인들이 왜 신학을 공부하는지에 대해서 탐구했다면 이 책은 현대사회에서 소멸해가고 있는 기독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비추는 책이다.
남반구 교회
얼마 전 도올의 강의를 들었다. 마가복음 강의였다. 일전에 글을 쓰기도 했다. 유튜브에 몇 만명이 그의 강의를 들었다. 그런데 그는 강의 도중에 기독교는 우리 나라에서만 흥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기독교 인구는 남반구 기독교인구가 제일 많아졌다. 도울 선생님은 공부를 안 하시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모르는 분야는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데 나는 이런 부분을 리트머스 삼는다. 그가 사쿠라인지 진짜인지. 진보 진영의 스피커들이 자꾸 도올을 불러서 기독교를 강연시키는데... 글쎄...? 그 바닥에 아직 사람이 그렇게 없는가? 아니면 진보 스피커들의 사고력이 부족한가? 아쉬운 대목이다.
오스 기니스는 남반구 교회들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해주었다.
남반구 교회는 다분히 모더니즘 이전의 상태인 반면, 서구 교회가 초라해진 것은 다분히 모더니즘의 왜곡의 위력에 굴복한 결과다. 다시 말해 남반구 교회의 본격적 도전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반드시 올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그 도전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47)
우리 나라는 남반구는 아니다. 하지만 신생하는 교회이기에 남반구와 같은 맥락이 있다. 오스 기니스의 말처럼 우리 나라는 아직 전 근대인가? 그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요즘도 기독교 세계관 이야기만 나오면 회자되는 포스트 모던사회인가? 그런 모습이 없지 않아 보인다. 물론, 우리는 세계화된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포스트 모더니즘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전에 우리는 근대를 어떻게 보냈는지 진지하게 물어봐야 한다. 우리 나라는 근대를 겪었는가? 근대를 소화했는가? 서구의 근대 이후를 우리는 그대로 습득하는 것이 맞는가? 글쎄. 내가 보기엔 전근대, 근대, 근대이후(포스트모던)의 모습이 고루고루 보인다.
성소수자의 모임을 생각해보자. 나는 5년전인가, 4년전인가 대구 시내에서 퀴어축제의 한 복판에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전근대와 근대이후가 충돌하는 모습이 아닌가 싶었다. 전근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 근대이후를 살아가는 성소수자들. 그렇지만 나는 근대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본 경우는 참 드물었다. 아니, 우리 사회는 근대라는 작업을 거쳤는가 싶다. 김덕영의 말처럼 그냥 근대가 경제성장으로 환원된 것인가? 차라리 그 말이 설득력 있었다. 나는 이런 작업을 하는 사회학자들의 글들을 읽고 싶다. 어떤 이론이라도 좋으니 우리 나라 사회의 근대를 분석해주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여튼 오스 기니스는 서구에서 일어난 역사들을 통해서 남반구 교회들이 배웠으면 한다. 아직 기독교 역사가 100여년 좀 넘은 대한민국도 여기에 선두주자이겠지만 해당하지 싶다. 오스 기니스가 이런 신생교회들을 준비시키는 이유가 서구가 잘못한 길을 똑같이 걷게하고 싶지 않아서다.
우리가 다른 지역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해야 할 말은 사실상 이것이다. "당신들은 우리가 범한 과오를 범하지 말라. 이 부분에서 우리는 처참히 실패하여 주님을 배반했다." (49)
나가면서
확실히 저자가 옥스포드에서 사회학을 공부해서인지 문화와 문명을 잘 말해주는 것 같다. 이제 기독교 문명과 문화가 어떤 방식을 취해야 할지 그 전망을 보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책도 그렇게 두껍지 않다.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책 맛보기
G. K. 체스터턴은 "기독교 신앙이 모든 면에서 변질된 적이 최소한 다섯 번인데, 그때마다 죽은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변질된 사람들이다"라고 썼다. (17)
본질상 문화란 단순히 "공동의 생활방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 문화, 헝가리 문화, 중국 문화란 각각 프랑스와 헝가리와 중국의 생활방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거기에는 프랑스인이 포도주와 치즈를 좋아하고, 헝가리인이 민속음악을 즐기고, 중국인이 가정과 조상과 전통을 중시하는 것도 포함된다. (78)
문화란 본질상 종교나 세계관의 구현이다. 신앙 없이는 문화도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T. S. 엘리엇은 "종교와 동반하지 않고 출현하거나 발전한 문화는 없다"고 믿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더 간단히 말해서 공동의 생활방식은 문화를 만들어 낸다. (79)
다시 말해 예수를 따르는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대로 세상에서 복음대로 살아가면, 우리는 복음의 화신이 되어 그 진리의 특성과 형체를 표출하게 된다. 그렇게 진리 가운데 살아갈 때 거기서 문화적 능력이 발휘된다. (100-101)
하나님의 도성이 인간의 도성과 서로 만나면, 문화를 형성하는 교회의 능력이 그 비결을 발휘한다. 그러려면 교회가 충실하고 시대를 분별해야 한다. 지적·사회적 긴장을 유지하여 세상 "안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 비판적 거리를 둔 참여가 가능해진다. 바로 이것이 문화를 형성하는 교회의 능력의 원천이다. (114)
중요한 것은 인간의 도성의 지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결코 최종 권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최종 권위는 늘 하나님의 도성의 지혜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도성의 방식과 인간의 도성의 방식의 차이뿐 아니라, 인간의 도성에서 오는 상이한 두 종류의 교훈도 더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 우선 사상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에 대한 기술(카리안 주 -대상이나 과정의 내용과 특징을 있는 그대로 열거하거나 기록하여 서술함 또는 그런 기록)이 있다. 기것은 어느 정도 정확하다. 다음은 그 기술에 기초하여 사상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고 변화시켜야 하는가를 말하는 처방이 있다. (131)
개혁은 천사와 씨름한 야곱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분과 씨름할 때 찾아온다. 우리는 하나님, 우리의 양심, 시대, 현 상태의 교회와 씨름해야 한다. 그러면 결국 그 치열한 씨름 중에 하나님을 결정적으로 강렬하게 체험하게 되고, 거기서 비롯한 결과가 훗날 또 하나의 개혁으로 불릴지도 모른다. (198)
걸핏하면 우리는 예수의 복음을 외치면서 사실은 성경의 진리를 치유 기법으로, 예배를 오락으로, 제자도를 인간의 잠재력 개발로, 교회 성장을 기업식 확장으로, 교회와 지역교회에 대한 애정을 교회 없는 무기력한 영성의 신앙 표현으로, 진정한 필요를 채워 주는 일을 주관적 필요에 대한 영압으로, 선교 원리를 마케팅 수법으로 대체했다.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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