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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신앙서적

[책리뷰] 미로슬라브 볼프 - 베풂과 용서(사순절 추천 도서)

by 카리안zz 2020.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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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사순절 기간 많이들 추천하는 책이다. 이 책을 사둔건 2012년즈음이다. 학기가 끝나갈 때쯤 서점에서는 안 팔린 책들을 반이상 할인해서 팔았는데 그 중에 이 책이 있는거 아닌가. 볼프 책이 이렇게 인기 없다니. 물론 볼프의 책이 본격적으로 번역되기 전이라서 더 그랬겠다. 

 사순절 묵상으로 읽은 건데 읽다보니 다른 쪽으로 생각이 미쳤다. 당시 때마침 MB 검찰조사가 시작되었기에 '용서'라는 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말하는지 세삼 느끼게 해줬다. 볼프는 성경 특히, 바울과 루터를 읽어나가며 자신의 논지를 설득력있게 전하려고 했다. 볼프를 통해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걸 다시금 느낀다. 물론 이건 물타기로 흐르는 그런 맥락은 아니다. 

 설교 하나를 머리속에서 구상하던게 있었는데 주제가 바로 용서였다. 제목은 <아버지를 이해하기까지> 본문은 요나서를 하려고 했다. 때마침 볼프를 통해서 더 분명히 할 수 있겠다 싶다. 여러모로 유익했던 책이다. 그의 명저 <배제와 포용>을 읽기 전에 이 책을 읽으라던 이유를 알겠다. <기억의 종말>도 아마 이런 맥락 위에 있지 않나 싶다. 조만간 도전해 봐야 겠다. 

 

간주곡_다니엘 형의 죽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간주곡 챕터였다. 볼프의 형이 죽었다. 그것은 사고였다. 부식 운반용 마차를 타고 가다가 출입문을 통과하려고 할 때 볼프의 형인 다니엘은 상체를 비스듬히 뒤로 젖히다가 그만 문기둥에 부딪히고 말았다. 형은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볼프의 부모님들은 누구를 탓하고 싶었을 것이다. 잘 돌보지 못한 보모라던가 사고 당시 다니엘 형과 같이 있던 군인들이던가. 하지만 볼프의 부모님은 보모에게 책임이 있다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볼프의 어머니는 다니엘 형이 죽기 전날 밤을 잊지 못한다. 그날은 다니엘 형이 어머니에게 침대에서 함께 자겠다고 졸라대었다. 다니엘 형은 잠버릇이 고약했고 어머니는 공장일로 지쳐서 깊이 잠들어야 했다. 그렇게 형을 못재웠는데 그 날이 다니엘 형을 본 마지막이 될 줄이야. 불프의 부모님들은 가장 책임이 있는 두 사람을 이렇게 대했다. 

그토록 끔찍한 상실의 고통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지만, 책임져야 할 사람들에 대한 비난과 분노는 사라지고 없었다. 어머니는 죽임당한 예수님을 응시하고,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곰곰이 묵상하는 가운데 십자가 밑에서 치료를 받으신 것이다. 밀리카 아주머니도 용서를 받았고, 아무도 그녀의 죄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보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라고 하더구나. 그래서 우리도 용서하기로 결심했단다." 그 군인은 얼마나 두려움을 느꼈던지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결코 완치되지 않을 마음의 상처를 입으셨음에도 그 군인을 찾아가서, 부주의 때문에 자신에게 엄청난 슬픔을 안겨 준 그 군인을 위로하고, 그를 용서하겠다고 말씀했다. (191)

 볼프의 부모님이 그 군인을 용서한 이유는 간단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셨으니, 부모님들도 그 군인을 용서하신 것이다. 하지만 용서 자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볼프의 어머니에게는 대단히 고통스러운 것이었다(192). 

 

용서란 무엇인가

 이 책의 백미 4, 5, 6장이 아닐까 싶다. 신정론에 대한 문제일 수도 있는데 거기에 대한 응답을 볼프가 한다. 볼프는 일단 용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첫째, 용서는 잘못된 행위를 명명하고 나무라는 것이다... 잘못된 행위를 나무라는 것이야말로 용서의 한 요소, 용서의 불가피한 부정적 전제조건이다. 하지만 파코의 아버지가 파코를 나무라지 않았다면, 파코는 피고의 상태로 머무르기만 할 뿐 용서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용서애는 두 번째 요소, 곧 긍정적인 내용이 들어 있다. 용서는 가해자들에게 일종의 선물을 베푸는 것이다... 실제적인 부채를 너그럽게 탕감해 주는 것이야말로 용서의 핵심이다. (205-206)

 하나님과 용서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볼프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과 용서의 관계는 하나님과 일반적인 베풂의 관계와 유사하다. 요컨대,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용서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용서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용서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용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용서의 메아리다. 우리가 하는 용서를 이해하려면, 하나님이 하시는 용서에서 시작해야 한다. (207)

 메아리란 표현이 참 좋다. 우리가 하는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의 메이리다!

 이후 볼프는 루터와 바울을 인용하며 용서에 대해서 풍부하게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세부적으로 언급하며 더욱더 논지를 강화시켜 나간다. 

 

용서 대 정의

 가장 곤란한 지점이 아닐까 싶다. 용서를 한다면 그가 저지를 모든 것을 그냥 덮고 없는 것처럼 해야 될까? 적폐청산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가? 물론, 정부 관계자들이 할 고민이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해 볼 수 있다. 

 볼프는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보복에 기초한 정의가 아니라 용서여야 한다고 말한다. 정의를 지속적으로 행사하다 보면, 범죄로 얼룩진 세상이 엉망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정의는 세상으로부터 악을 제거할 수도 있지만 자칫 세상을 파괴할 수도 있다(255). 보복에 기초한 정의는 최선의 방법도 아니고 기독교적인 방법도 아니라고(257) 볼프는 말한다.

 우리가 원수 갚기나 보복에 기초한 정의에 몰두하지 않고 용서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이기시고,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우리와의 사귐을 회복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해야 한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당한 것만큼 "갚아 주기"보다는 우리에게 상처를 안겨 준 사람들을 죄로부터 돌려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원수들을 응징하기보다는 그들을 원수에게 친구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258)

 이렇게 본다면 용서는 정의를 짓밟는 행위인 것처럼 보인다. 범죄사건이 일어났는데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책임을 물리지 않고, 가해자도 처벌을 받지 않고 죄에서 놓여나간다면 어떤가? 정의는 뭐가 되나? 용서의 결과만 보면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용서의 과정을 본다면 상황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264).

 하나님의 죄를 좌시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때문에 진노하신다. 하나님의 진노는 감정의 상태이면서 동시에 죄에 대한 격렬한 책망이기도 하다. 죄인들에게 이렇게 직접 대놓고 말씀하신다. "너는 끔찍한 잘못을 저질렀어." 하나님은 가해행위를 가리키며 행위자를 책망하신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진노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일단 용서하시면 더 이상 책망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분노를 피하신다는 말은 그 점을 두고 하는 말이다(265).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그 자체가 사실은 책망이기도 하다(266).  

 

용서는 모르는 체하는 것이 아니다

 니체는 우리가 상처를 받아들이고, 우리 자신의 악행까지 편안하게 받아들이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행동하면 그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용서가 아니다. 거기에는 행위에 대한 책망과 행위자에 대한 비난이 빠졌기 때문이다. 그가 상처 무시하기, 상처 모른 체 하기, 상처 잊기를 선호하고 용서를 버린 것은, 정의의 정당한 요구 같은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267).

 사람들은 종종 양다리를 걸친다. 한편으로 행위를 나무라고 보복에 기초한 정의를 추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침해 받아서 위축된 감정, 노여움, 괴로운, 분노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들은 두 번째 것을 가리켜 용서라고 부른다. 그들에게 용서는 그들 스스로에게 은혜를 베풀고, 자신들이 침해를 당해 빠지게 된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268). 

 베풂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것처럼 용서를 통해서도 이익을 얻으려고 한다. 베풂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여야 한다. 용서 역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용서할 때 감정 치유는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주된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용서는 우리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라, 우리에게 해를 끼친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다. 우리가 감정적으로 치유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용서는 우리가 가해자에게 주는 선물이다. 그리고 책망의 아픔 없이 용서를 베풀 수 있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용서하는 것은 책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의의 정당한 요구를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268-269).

 

나가면서

 과연 용서에 대한 볼프의 논의를 다 소화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으면 그가 낸 <기억의 종말>이 대충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감을 잡게 해준다(276-280쪽을 참고하라). 크게 본다면 일본이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을 듯하다. 과연 우리는 일본이 우리에게 가한 일에 대해서 잊을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들은 말이다? 국가 단위니깐 조금 다를까나? 

 또, 영화 <밀양>에서의 대목도 생각난다. 과거 사역했던 교회의 담임 목사님께서 <밀양>에 나오는 가해자의 용서가 기독교의 복음이라고 말했다. 과연, 그 용서는 기독교의 용서일까? 볼프는 그 용서에 동의할까? 나는 그 용서를 기독교의 용서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가해자는 스스로 용서받았다고 그리 당당할 수 없다. 죄인은 고개를 들지 못한다. 죄를 자복하며 죄의 고통을 토로해야 한다. 눈물이든 가슴 아픔으로든. 특히나, 피해자에게는 더더욱. 그 모습 없이 그냥 자신은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전도연 역의 신애도 자신이 용서를 결심하는 것이 성서의 말씀을 통해 한 것이었나? 어떠한 통로를 통해 그녀는 용서를 결심했을까? 그저 용서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라는 판단에서? 그렇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용서와는 거리가 멀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그러셨으니 우리의 삶을 비춰봐야 한다. 물론, 신애에게 누구도 용서를 강요할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과 성서말고는. 

 볼프의 이 책에서 얻은 점은 용서가 내 편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는 거다. 내 마음 편하자고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의 '용서는 모르는 체 하는 것이 아니다'를 보길 바란다. 

 

사순절 도서로 추천한다. 베풂과 용서라는 주제를 통해 그리스도를 묵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의 길을 가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신앙 생활은 장난이 아니다.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것이 바로 신앙 생활이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인 것이다. 

 


메모

 

하나님의 용서는 선물이 아니라 보상이 되고 말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용서가 선물이라면, 그것은 하나님만이 베푸실 수 있는 선물이 되고 말 것이다. (245)

- 보상 X, 선물 X

 

 

 

그러면 이제 불가능한 것을 상상해 보자. 카타리나 여제의 연인인 한 장군이 술에 취해 그녀를 심하게 구타했다. 그랬을 경우, 그는 그녀의 사적인 규정을 어긴 것은 아니지만, 남의 신체와 영혼에 위해를 가하지 말라는 보편적인 도덕법을 어긴 것이다. ... 그녀가 그를 계속 사랑했다면, 그녀는 그의 민사상의 책임을 면제시켜 주었을 것이다. 그녀는 절대 군주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죄책을 면제시켜 줄 권한까지 그녀에게 있었을까? (313)

- 죄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책 맛보기

 

어쨌든 믿음과 감사는 한 동전의 앞뒷면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과 감사는 맞물려 있다.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감사는 하나님의 선물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69)


우리가 베푸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감사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이 수여자이시기 때문이다. 믿음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인정하는 행위이고, 감사는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잊지 않는 행위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에게 믿음과 감사 그 이상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선물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시는 목적과 관계가 있다. 실로 하나님은 우리의 생존과 번성을 위해 베푸시지만, 꼭 그것을 위해서만 베푸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생존과 번성에도 도움이 되도록 베푸신다.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를 그저 행복한 수취인으로 머물게 하지 않고, 관대한 수여자가 되게 한다. (71)


하나님과 달리, 우리는 늘 우리의 의지를 길들인다. 우리의 의지는 수많은 요소, 곧 언어, 부모의 양육, 문화, 대중매체, 광고, 동료 집단의 사회적 압력에 길들여진다. (102-103)


우리는 상처 입은 몸의 모든 원자가 정의를 부르짖거나 복수를 부르짖는데, 어째서 용서를 베풀어야 하는가? 용서를 베풀고, 지혜롭게 용서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용서하기를 거부하지 않을 만큼 충분한 힘을 기르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197)


밤중이나 한낮의 고요한 시간에, 그 장면을 거듭거듭 연출하면서, 이미 벌어진 비극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려 애쓰고, 그 비극을 일어나지 않은 것이 되게 하려고 애써 보지만, 한번 실행에 옮겨진 행위는 영원히 되돌릴 수 없다. 우리의 인생이 영화라면, 편집자처럼 좋지 않은 장면은 되감아 잘라 내고, 마음에 들 때까지 더 나은 장면을 이어 붙여 그것을 비평가에게 보여줄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인생은 영화가 아니다. (203)


용서는 누군가의 위반, 비행, 위법행위, 범칙행위, 부채로 피해를 입었을 때 하는 것이다. 용서가 베풂보다 어려운 것은 그 때문이다. (206)


자기가 저지른 잘못의 덫에 걸려, 가해자는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피해자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피해자는 용서를 통하여 신성한 원수 사랑을 실행에 옮기고, 선으로 악을 이기도록 도울 수 있다. 양측 모두 용서를 완성하는 과정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294) 


그녀가 아무리 절대 군주라고 해도,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아무리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해도, 그녀에게 도덕법 위에 군림하면서 도덕법의 효력을 중지시킬 권한이 없다. 
죄책을 없애 줄 권한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해결의 열쇠는 하나님의 용서다. 하나님만이 용서할 능력을 가지고 계시듯이, 하나님만이 용서할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의 죄를 합법적으로 용서해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용서할 권한이 있다. 그 권한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갖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용서를 우리의 것으로 삼을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미 용서하신 것을 우리 쪽에서 용서하시는 것이다.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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