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들은 누구인가?
예언자들은 일단 한자로 풀이하면 ‘미리 말하는 자’로 볼 수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미래에 일을 미리 알고 말하는 자란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은 한자로 풀이하기보다는 히브리어로 써져 있기에 히브리어로 말해야 더 정확합니다. 히브리어로는 ‘나비’라고 하는데 히브리어 포함 같은 계통의 언어들을 살펴보면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대략 그 뜻은 ‘부르짖다’, ‘알리다’, 혹은 ‘부름을 받다’와 관련이 있습니다. 히브리어 계통의 언어로 보자면 ‘부름 받은 자’로 볼 수 있습니다. 이 히브리어 ‘나비’가 헬라어로는 ‘프로페테스’로 번역됩니다. 헬라어 프로페테스의 뜻은 ‘신의 이름으로 신의 뜻과 권고를 말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언자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뜻이나 미래의 일을 부르짖어 알리는 자’입니다.
특징 1 - 하나님의 영으로
하늘의 뜻을 받아서 땅의 세계에 알리는 역할입니다. 어떻게 보면 하늘의 세계와 땅의 세계를 연결시키는 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 하나가 떠오릅니다. 예언자의 역할은 무당과 비슷한가요? 무속인들 역시도 그런 비슷한 일들을 하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열왕기상 22장에 보면 왕들이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예언자들에게 하늘의 뜻을 물어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무속인들과 유사해 보입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에게만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누구의 영으로’으로 말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에스겔도 사무엘도 ‘여호와의 영이 임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예언자와 무속인과의 차이점은 누구의 영으로 말하느냐의 차이입니다.
특징 2 - 행동파
또, 다른 특징으로는 예언자들이 행동파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사회 정치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사회에 불의가 가득하고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때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저항했던 게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사사로운 개인의 일부터 사회의 문제점들까지 짚어 소리치던 사회운동가적인 성격이 있었습니다.
근대 이후에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기에 이런 예언자적 활동은 어떻게 봐야 하는지 고민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과연 예배의 설교 중에 이런 정치적인 비판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지점입니다. 어떻게 보면 각 사람들의 정치관이 작동되기 때문에 대단히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수업에 한 코스로 목회자 인터뷰를 간 적이 있습니다. 팀을 짜서 인터뷰를 하는 건데 정갑신 목사님이라는 분에게 갔습니다. 팀 켈러 초청에 앞장서고 미션얼 처치 운동에 관심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교회에 가서 인터뷰를 하는데 교회에 행사가 있더라구요. 공적신앙에 대한 강의였는데 합동측 교회들은 이런데 별로 관심이 없을 뿐더러 강사가 한완상 부총리와 박총 선생이었습니다.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환영하지 않는 분들이신데 이런 분들로 강사진을 짯다는거에 좀 놀랐습니다. 그래서 제가 인터뷰 중에 질문하나를 했는데 ‘설교에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것에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정확히는 아니지만 대충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은 사회와 정치가 불의할 때는 설교 중에 발언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때가 2017년 쯤이여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였기에 더욱 그렇게 말씀하셨던 거 같습니다. 안 그래도 정치적인 설교를 했었는데 몇 가정이 떠나셨다고 하더라구요. 그래도 교회는 할 말을 해야 한다고 소신을 밝혔습니다.
다른 분 중에 책에서 읽은 분인데 김영봉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설교자의 일주일>이란 책을 쓰셨는데 그분도 책에 예언자적 발언을 해야 한다! 사회와 정치가 정의롭지 않을 때 예언자적 설교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관해 설교를 한 번 했는데 역시 교인들 중에 불편한 몇몇 분들은 떠났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이 예언자적 설교는 마찬가지로 계속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플란팅가 주니어라는 분이 쓴 <설교자의 서재>라는 책에서는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다양하기 때문에 배려해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그러니깐 자신의 청중들 중에 공화당을 지지하는 사람도,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기에 정치적인 발언들은 자제해라는 것입니다.
또, 예전에 인상 깊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어령 선생님이 강의를 하시고 이제 질문을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한창 이어령 선생님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책을 출판하셨을 땝니다. 거기에 대한 강의를 한창하시다가 질문을 받았는데 그때가 2011년 쯤이었습니다. 한 질문자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안철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제 안철수 씨가 한창 서울시장 나온다 안 나온다 할 때였습니다. 그랬던지 이어령 교수님이 “한창 빵만으론 살 수 없다고 말했는데 또 빵 얘기를 해야겠냐...”고 답하셨습니다.
물론 교회가 대권후보니 청문회니 이런 것에 일일이 답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예전에는 당연히 플란팅가 주니어처럼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기에 배려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세월호와 국정농단 사태를 겪으면서 생각이 조금 복잡해 졌습니다. 과연 오늘 교회가 보일 예언자적 모습은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하는가? 아직도 고민하고 있지만 아마 예언서를 공부하면서 이런 고민의 응답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언자들의 역할
예언자들의 행동파적인 면을 살펴보다가 너무 긴 시간을 할애했는데 이제 예언자들의 역할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언자들은 어떤 역할을 맡은 사람들일까요? 예언자들은 마치 대변인과 같습니다. 출애굽기 7장 1절을 한 번 읽어보시겠습니까?
출애굽기 7장 1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여기에서 대언자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원어로 바로 ‘나비’입니다. 아까 예언자를 히브리어 원어로 ‘나비’라고 했습니다. 같은 단어로 쓰였습니다. 그렇기에 이 대변인은 절대로 자기 생각을 말하면 안 됩니다. 만약에 청와대 대변인이 대통령의 뜻을 전하지 않고 자기 생각으로 말한다면 정말 큰 문제가 됩니다. 대통령의 뜻이 아니라 다른 외부인의 뜻대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대단히 심각하고 위험한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났죠. 어떻게 보면 교회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의 가치와 생각을 전한다면 하나님을 농단하는 것입니다.
이런 대변인들은 독특한 말투가 있습니다. 주로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이건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사신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문을 콱 열고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명이오!”입니다. 다들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어명이오!”가 아니라 “내말이오!”라고 말하면 사약 주러 갔다가 되려 사약 먹을 수 있습니다. “어명이오!”라는 그 말에 대단한 권위가 있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예언자들도 대언자여서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라는 말을 했던 겁니다.
예언은 왜 하는가?
이제 예언의 의미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예언의 독특함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조명한다는 겁니다. 예언자들은 단지 미래의 일을 점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을 밝히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에서는 모세를 예언자로 보았습니다. 호세아서 12장 13절을 보겠습니다. 호세아서 12장 13절을 보겠습니다.
호세아 12:13 “여호와께서는 한 선지자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고 이스라엘이 한 선지자로 보호 받았거늘”
여기서 호세아는 모세를 선지자라고 봅니다. 선지자나 예언자나 다 같은 말입니다. 모세가 왜 예언자로 불렸을까요? 바로 모세는 율법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직접 율법을 전수받은 사람이지요. 예언자들은 율법을 조명했습니다.
유대인들과 기독교의 구약성경 구분이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모세오경,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로 구분을 하지만 유대인들은 세 구분을 합니다. 모세오경-성문서-예언서입니다. 예수님도 누가복음 24:44에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우리가 보는 역사서를 예언서로 분류했습니다. 단순히 기록된 역사책이 아니라 우리에게 율법의 의미를 조명하고 가르쳐주는 예언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율법은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치기 위한 내용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예언자들은 왜 우리가 망할 수밖에 없었는지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근거들을 말하며 신랄히 비판한 겁니다. 이 예언을 들은 백성들은 자신의 삶과 생활을 반성하게 됩니다.
그럼 이제 12예언서에 대해서 간략하게 보도록 하겠습니다.
12예언서는 본래 한권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주전 2세기 경에 쓰여졌던 집회서에서 그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대체로 열두 예언서는 시간적 흐름에 따라 배열되었다고 봅니다. 저도 대략적인 시간 배열에 따라 순서 되어 있는 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아모스가 더 먼저인거 같은데 호세아가 먼저인가 되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연대끼리 뭉쳐둔 것이라 보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갑니다.
또 어떤 분들은 12예언서를 상호교차구조로 봅니다. 그런데 이건 조금 끼워맞춘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또 다른 분들은 신학적인 구성 때문에 이렇게 배열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소예언서들을 보면 “심판과 구원”이라는 구조가 잘 나타나기에 그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시간적인 순서로 배열되었다는게 제일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일단 소예언서 전체 이름은 한 번 알고 가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저는 다 외웠는데 이 팁으로 다외웠습니다.
(여보)세욜? (누구?) 아, 오빠다. (이 귀)요미(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하스 개스말(나훔, 하박국, 스바냐 - 학개, 스가랴, 말라기)
바울서신과 일반서신도 이렇게 말들어 논게 있는데 나중에 시간된다면 공개하겠습니다...ㅋㅋ
자, 그렇다면 맨 먼저인 호세아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호세아 1장 1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호세아 1장 1절: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엘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여기에서 보면 시대적 정황을 알 수 있습니다.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의 시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여기에서 특이한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여로보암 2세는 기원전 786~746년까지 다스렸습니다.
반면 위에 기록된 유다의 왕들의 연수는 이렇습니다.
웃시야(792~742)
요담(742~735)
아하스(735~715)
히스기야(715~687)
히스기야까지 치면 거의 북이스라엘 망한 때까지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북이스라엘은 722년에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 2세가 다스렸던 당시만 본다면 요담 왕까지 이름이 적혀 있어야 하는데 히스기야까지 적혀져 있는 걸 보면 여로보암 2세에서부터 북이스라엘 마지막 왕인 호세아까지로 볼 수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나머지 북이스라엘 왕들이 생략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 호세아)
오늘 호세아 시대는 열왕기하 14-17장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여로보암 2세 때 북이스라엘은 나라가 흥했습니다. 이유는 당시 중동의 최강자인 앗수르가 내분으로 시끄러웠기 때문입니다. 반란과 기근으로 자신 외의 다른 나라에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이때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번성을 한 것이지요. 영토도 다메섹까지 확장을 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역시 크게 번영했습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이 죽자 북이스라엘은 대단히 흔들립니다. 반란과 반란에 거듭 일어나는데 불과 30년 동안 6명의 왕이 교체되었고 이 중에 3명은 2년 이하 통치를 했습니다. 또, 4명은 살해되었으며 1명은 유배갔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앗수르는 내분을 해결하고 힘을 키워 갑니다. 디글랏 빌레셀 3세때입니다. 성경에는 불왕이라고 되어있는데 이 왕이 이제 서쪽으로 정복전쟁을 시작합니다. 므나헴때 였는데 므나헴은 부자들에게까지 강탈해서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칩니다. 아마 이때 므나헴이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칠 여력이 있었던 건 여로보암 2세 때 돈을 많이 벌어놨기 때문일겁니다. 그만큼 여로보암 때는 경제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앗수르의 침공으로 상황이 어렵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반란이 일어납니다. 장관이었던 베가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이유는 므나헴의 친앗수르 정책 때문입니다. 베가가 왕위에 오르자 이제 반 앗수르 진영과 세력을 같이 합니다. 오랫동안 앗수르와 싸워오던 세력은 아람왕 르신이었는데 함께 손을 잡습니다. 그리고 남유다를 쳐서 왕을 바꾸려고 합니다. 당시 유다왕 아하스는 반 앗수르 동맹에 가입을 거절했기에 왕을 바꾸려고 전쟁을 벌렸습니다. 수리아-에브라임 전쟁입니다.
그런데 이때 아하스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앗수르의 왕 불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안 그래도 저 나라들을 다 먹어버리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는데 앗수르 입장에서 절호의 찬스였습니다. 앗수르가 참전하면서 이제 상황은 180도 역전됩니다. 앗수르가 북이스라엘 땅을 마구 점령하고 있는 터에 희소식이 들립니다! 앗수르의 불왕이 죽었단는 소식입니다. 이틈을 놓치지 않고 북이스라엘은 중동의 영원한 강자인 이집트에게 구조요청을 합니다. 하지만 앗수르의 새로운 왕은 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왕 살만에셀 5세가 북이스라엘로 진격하여 3년 동안 포위해 버립니다. 결국, 사마리아 성이 함락되고 그 백성은 포로로 끌려갔고 북왕국은 멸망합니다.
이 내용이 바로 호세아 사역 전반에 걸쳐서 일어난 일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종교적 상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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