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흔적/공부흔적

[강의] 소예언서 - (2) 호세아 1장 2-11절(호 1:2-11, 호 1:2~11)

by 카리안zz 2020. 3. 23.
반응형

 지난 시간에 호세아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당시 앗시리아가 반란과 기근 때문에 외부로 진출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이스라엘은 부국강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 시기가 여로보암 2세의 시기였습니다. 영토도 경제적 성장도 함께 이룩하였습니다.

 

해석의 문제

 지난 번에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 봤다면 오늘은 종교적 배경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그 전에 한 가지 이야기해 둘게 있습니다. 오늘 본문 호세아서 12-11절을 읽고는 조금 불편하게 여겨질 점이 있습니다. 여성에 대한 관점이 새롭게 대두되는 요즘에 특히나 오늘 본문에서 표현들이 대단히 마음에 안 들 수 있습니다. 마치 여성을 꼭 이렇게 음란한 여자니 나쁜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에 현대 여성주의 관점에서는 대단히 문제될 법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현대적인 생각을 하고 읽으면 덜컥 걸리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과학 곧 진화론에 대해서 인식하고 있는 현대인들이 창세기를 읽으면 대단히 고민되는 지점이들이 생깁니다. 이런 고민들이 잘 되어 좋은 연구들도 나오지만 문제는 현대의 관점을 너무 신봉할 때 생깁니다.

 뭐 현대의 여성주의 관점에서 볼 때 성경은 여성차별의 대표적인 서적이기에 불온서적이다라고 말하던가 성경에 진화론이 없기에 한낱 신화일 뿐이다라 거나 반면에 성경은 모든 것의 정답이기에 과학적인 답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바로 현대적인 관점을 신봉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유치부 사역을 할 때였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아브라함이 집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는데 몇 달을 걸려 걸어서 갔다고 막 설명을 했습니다. 그러자 한 아이가 질문을 하더라구요. 아브라함은 왜 자동차를 타고 가나안 땅으로 가지 않았냐고요. 질문의 답은 쉬웠습니다. 당시에는 자동차가 없었다! 기술같은 부분은 쉽게 당시에 없었다고 설명할 수 있지만 개념은 대단히 복잡합니다. 쉽게 설명될 수 있는 부분들이 아니지요.

 그래서 그때 없었던 개념을 가지고 성경을 난도질한다면 마치 자동차가 그때 왜 안 만들어졌냐고 우기는 것과 같은 걸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예외적인 부분들도 있긴 합니다.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 읽기나 삼위일체에 대한 부분은 후대의 관점에서 앞을 해석하는 것이죠. 이러한 예외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성경을 읽을 때 당시의 문화적 기준과 사고 방식의 기준으로 성경을 써졌다는 것을 꼭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당시의 문화적 수준에 맞춰서 오늘 호세아서 역시도 써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1:2)

 오늘 본문 2절에서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이해되지 않는 말씀을 하십니다. 저기에 음란한 여자가 있는데 그 여자랑 결혼을 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음란한 아이들까지 낳아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은 예언자들에게 독특한 행동을 하라고 시켰습니다. 이사야는 3년 동안 벗은 몸과 발로 다녔습니다. 에스겔은 390일 동안 왼쪽으로 누워서 잤습니다. 그런데 이중에서도 가장 제일은 호세아가 들은 명령입니다. 이사야처럼 미친척하고 3년 정도는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 에스겔이 왼쪽편으로 누워서 390일간 자는건 평소에도 그렇게 자니깐 별 문제될 건 없습니다. 근데 하나님 잘 믿고 예배 잘 드리는 여자도 아니고 음란한 여자와 결혼을 하라고 하니 너무너무 괴로운 결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평생 같이 살아야 하는 인간이 나와 가장 중요한 부분의 신뢰관계가 깨어지는 사람과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태 예언자들의 행동에는 상징과 비유가 있었습니다. 이사야가 벗었던 이유는 이집트와 에디오피아의 패망을 상징하는 행위였습니다. 에스겔의 행동도 오랜 기간 포로생활을 할 것이란 상징이였습니다. 호세아가 음란한 여자와 결혼한 그 모습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호세아의 결혼도, 그의 자녀들도 모두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자 뜻이었습니다.

 호세아가 결혼해야 하는 여자는 고멜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멜을 특징하는 말은 음란한 여자였습니다. 구약성경 음란이라는 명사가 12번 쓰였는데 호세아서에서만 6번이 나옵니다. 또 그 어근이 되는 동사 음행하다는 호세아서에서 14번이나 쓰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성적인 문란함을 강조하는 건 아닙니다. 호세아서에서 나오는 음행음란의 핵심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향해 몸과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다같이 호세아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2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로 줄기차게 이방신에게 미혹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바알이라는 신에게 몸과 마음이 빼앗겨 버렸습니다. 바알이라는 신이 도대체 어떤 신이기에 그렇게 매력이 있었을까요?

 

바알종교

 바알종교를 파악하려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조금 살펴봐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다시피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까지 광야에서 방랑 생활하던 유목민들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가나안 종교와 이스라엘의 종교성향이 많이 달랐습니다. 아무래도 가나안 땅은 한 지역에 오래 머물러 있었기에 지역 신들을 섬겼습니다. 자연히 농사의 다산을 기원하는 번성과 관련된 신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모습은 한 일족을 지켜주는 가문의 신이며 번성을 시켜주는 그런 분이라기보다는 우리는 지켜주는 신의 모습을 여태 보여주셨습니다. 가문의 신이며 전쟁의 신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가서 정착을 해야 했습니다. 직접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큰 고대 사회에서 농경이라는 새로운 환경은 대단히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이 농사를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가나안 땅 사람들에게 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농사도 잘 짓고 그 잘 짓는 이유가 보니깐 바알이라는 신을 섬겨서 농사를 잘 짓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바알은 비를 내리는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에야 물을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있지만 그래도 몇 주간 비가 안 내려와 버리면 지금도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고대세계에서는 오죽했겠습니까? 비가 내리지 않으면 집단 아사를 합니다. 자연스레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존의 문제 앞에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농사를 잘 지으려면 가나안 사람들이 바알에게 절하라고 하던데... 여호와에게 절한다고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을까?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여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전쟁만 하시던 모습이었는데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이런 고민들을 하고 있던 찰나에 바알에게 절을 딱 했는데 다음날 비가 온다면 어땠을까요? 그간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송두리째 무너졌을 겁니다. 왜 바알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유혹을 받았냐면 그것은 생존의 문제를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 신앙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는게 쉽지 않습니다. 그때 당시는 오죽했겠습니까?

 두 번째 유혹은 매우 달콤한 것이었습니다. 바알을 섬기면 비가 올 뿐만 아니라 성적인 쾌락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가나안의 종교적 제사에는 성적인 행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위 성전 안에는 성전 매춘부들이 있습니다. 아마 고멜이 이 성전의 창녀일 가능성이 좀 있ㅅ브니다. 여튼, 자손 번성이 곧 부의 상징이였던 고대세계에서 성행위는 다산을 의미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자신들의 예배순서 속에서 성행위를 넣은 것은 다산을 비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남자들이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바알 신을 섬기면 생존도 쾌락도 동시에 가져갈 수 있었으니까요.

 이처럼 음란은 하나님을 배신한 행위이기도 했고 실제이기도 했습니다.

 

호세아의 아들들(1:4-9)

 이런 음란함을 고발하는 호세아가 이제 아들을 낳았습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이스르엘입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이 뿌리시리라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뿌리신 것 같은 비옥한 지역이 이스르엘 골짜기 였습니다. 위치가 갈릴리 남쪽에 위치합니다. 저도 자료를 봤는데 우리나라 고속도로 타고 가다보면 푸른 밭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딱 거기서 푸른 풀밭이 쫘~악 깔려있었습니다.

 근데 이 이스르엘 지역은 사건 사고가 많았던 지역입니다. 이 지역에서 바알을 섬기며 하나님을 거역했던 오므리 왕가가 끝장났던 지역이 바로 이스르엘 지역이었습니다. 오므리 왕가를 마무리 지었던 사람이 바로 예후였죠. 오므리 왕가가 이스르엘 농부였던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심판의 도구였던 예후 왕가의 후손들이 도리어 이제 심판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었습니다. 15절에 무기인 활을 꺽겠다는 표현으로 봐서 이스라엘의 전투력을 꺽겠다는 걸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전투력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둘째는 딸이었는데 이름이 로루하마였습니다. 긍휼이 없다는 뜻인데 히브리어의 긍휼이라는 단어는 어머니의 태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긍휼이 없다는 말은 그 태에서 난 자녀들을 향한 어머니의 긍휼이 없을 것임을 말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한 진노와 심판을 돌이키지 않으신다는 걸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반면, 남왕국 유다는 긍휼이 여김을 받고 구원을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물론 그 방법은 활과 칼과 말, 마병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여호와로 인한 것으로 구원해주십니다.

 

 셋째는 아들인데 로암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 관계를 가리키는 핵심이 바로 너희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특히 출애굽하실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같이 출애굽기 6:6-7말씀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6:6-7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선언한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존재가 완전히 깨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호세아의 세 자녀들의 이름에서 북왕국 이스라엘에 임할 재앙은 단순하고 일시적인 재앙이 아니라 근본적인 재앙이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산산조각 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호세아는 삶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회복(1:10-11)

 그런데 호세아 1장은 심판으로 끝이 나는게 아니었습니다. 심판받았던 이스라엘이 회복된다는 겁니다. 그곳도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한 그 장소에서 회복이 일어날 것임을 말해줍니다. 11절의 이스르엘의 날이 크다는 것은 회복과 귀환의 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큰 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심판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는 목적은 이스라엘을 온전하고 완전하게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 회복은 북이스라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유다까지 포함하는 회복이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을 기대하고 선포하는 것으로 호세아 1장은 마무리 됩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