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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공부흔적

[강의] 《신앙을 읽다》세 번째 시간: 칼뱅[칼빈](생애, 목회자 칼뱅[칼빈], 세르베투스 논쟁)

by 카리안zz 2020.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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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을 읽다

 

 

이번 시간은 칼뱅에 대해서 배우겠습니다. 본래 칼빈이라는 이름을 교과서에도 쓰고 있어 훨씬 익숙하겠지만 칼뱅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겠습니다. 칼빈은 영어식 이름이라면 칼뱅은 불어식 이름입니다. 그렇기에 프랑스 사람인 칼뱅을 영어식 이름보단 불어식으로 쓰는게 맞다고 봅니다.

주 참고 자료는 브루스 고든의 칼뱅을 하려 했으나 저의 부족으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마이클 리브스의 꺼지지 않는 불길의 칼뱅 편을 주 참조하였습니다.

 

칼뱅. 장로교에서 태어났고 기독교 대학을 나왔기에 저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이름입니다. 칼뱅주의자, 개혁주의자. 고신 교단에서 신앙생활을 해왔기에 개혁주의라는 단어가 익숙했습니다. 왜냐하면 고신측에서 중고등부학생을 S·F·C라고 불리는데 학령을 꼭 제창했습니다. 그때 꼭 들어가는 단어가 개혁주의 신앙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단어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자칭 칼뱅주의자’, ‘개혁주의자를 외치는 진영에게 질려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자신만 맞고 다른 신앙은 다 틀렸다는 태도가 정말 별로였습니다. 저는 그 모습에 정이 떨어졌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려 칼뱅주의의 문제이지 칼뱅자체에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개인적으로 저는 개혁주의라는 말보다 개혁파라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개혁을 주의-ism으로 표현하기에 적합한가 의문이기 때문입니다). ‘칼뱅주의(개혁주의)’에 대해서 특히나 칼뱅에 대해서 아는게 하나도 없다 싶었을 때 특히 그랬습니다. 개혁주의를 가르치는 대학에서 4, 신대원에서 3년 도합 7년을 공부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잘 모르니 말입니다. 칼뱅은 진정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한 번 간단하게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칼뱅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얼핏 세계사 교과서에서 예정론을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인문학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막스 베버가 떠오르실 수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프로테스탄트는 칼뱅주의를 말합니다. 칼뱅의 정신을 따르는 후예들이 자본주의를 발흥시켰다고 베버는 보았던 것이지요. 이 칼뱅의 후예들은 학교, 은행 등 많은 곳에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베버는 그 원인을 그들의 소명론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여튼, 이 정도로 칼뱅은 인류사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물론, 종교개혁 자체가 근대의 형성에 큰 도움을 준 것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있지요. 국가의 종교가 개인의 종교가 될 때, 영토를 다스리는 제후의 종교가 자신의 종교가 될 때 개인에게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달라는게 바로 종교개혁 때 발생했습니다. 특히나 영국 성공회의 박해로 미국으로 갔던 청교도들은 어땠겠습니까. 그들이 미국의 건립 정신에 종교의 자유를 넣었던 것이 바로 그 박해를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때까지만 해도 종교는 구교와 신교뿐이었기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정서는 다르긴 합니다.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불교, 이슬람교 등 완전히 다른 종교가 우리들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칼뱅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는 자신을 샌님 학자라고 불렀습니다. 칼뱅은 루터 집안 식구들처럼 밥상머리에서 왁자지껄 떠들어대며 밥을 먹는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빼빼 말랐던 칼뱅은 굶기를 밥 먹듯 한다 하여 위대한 금식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고작 하루에 한 끼를 먹었으며 그것도 조금만 먹었습니다.

칼뱅과 루터가 자리를 함께했다면, 루터가 큰 소리로 웃고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킬 때 칼뱅은 조용히 앉아 자기 책이나 들여다보고 있었을 겁니다. 루터가 건방지고 촌티가 풀풀 나는 사람이라면, 칼뱅은 냉철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화가 나면 두렵게 할 기질이 있지만, 루터가 뜨거운 기질을 가졌다면 칼뱅은 차가운 기질이었습니다. 책 역시도 많은 분량을 써냈지만 루터는 한 번에 주욱 쓰는 스타일이었다면 칼뱅은 주요 작품을 여러번 개정하였습니다. 1세대 대표 종교개혁가 루터와 2세대 대표 종교개혁가 칼뱅은 이렇게 달랐습니다. 아마 두 사람이 다른 시대에 활동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을까요. 두 사람이 같은 시대에 활동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칼뱅은 1509년 프랑스 누아용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늘 프랑스를 자신의 모국으로 여겼고, 누아용을 자기 고향으로 여겼습니다. 원래 이름은 코뱅이었는데 후에 칼뱅으로 바꾸었습니다. 학자들은 키케로를 존경했기에 그 이름을 비틀어 칼뱅으로 한 것은 아닌가 추정합니다. 칼뱅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그를 사제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후일 교회와 사이가 틀어진 이후 법률가의 길을 걸으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고향을 떠나 오를레앙이라는 도시에 공부하러 갑니다. 그는 그곳에서 고전을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특히나 그곳은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성행하던 곳이었기에 칼뱅의 평생 형성될 공부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칼뱅은 학문적 그릇만 키웠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영향 역시 받았습니다. 먼저 그의 사촌인 피에르 로베르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올리베탕(밤에도 결코 꺼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올리브유 램프를 켜놓고 연구한다는 의미)이라는 별명을 가졌습니다. 그는 쉴세 없이 일을 하여 성경 번역을 하였고 29살에 나이로 완역을 냈습니다. 그 성경책을 보고 칼뱅은 종교개혁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영향을 끼쳤던 사람은 멜히오르 볼마르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어를 가르쳤습니다. 그리스어를 가르쳤다는 것은성경의 원어에 접근해서 가톨릭의 비틀어진 의미가 아니라 본래의 의미를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루터의 저작을 소개해 준 사람이 바로 볼마르입니다. 아마 이러한 영향으로 그는 종교개혁 노선으로 갈아탄 것이 아니었나 추정을 합니다.

 

이제 슬슬 프랑스를 떠날 때가 다가옵니다. 프랑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는 젊은 왕이었습니다. 그는 가톨릭과 종교개혁 두 노선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중도를 갔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가 종교개혁가들을 핍박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상황은 이랬습니다. 한 사람이 어떤 유명한 동정녀 마리아 상에 칼을 대어 성모와 아기의 머리를 잘랐고, 머리를 내동댕이친 뒤 마리아 덮개를 짓밟는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루터가 비텐베르크에서 했던 정죄행위가 바로 이런 행동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프랑수아 1세는 루터파들을 처벌하기 시작합니다. 교황에게 이 왕국을 병들게 하는 루터파 이단과 다른 종파들을 뿌리 뽑아 달라고 요청까지 합니다.

그러던 차에 칼뱅에게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사건이 펼쳐집니다. 어수선한 시국에 파리 대학교 새 총장이 된 니콜라스 콥이 선출됩니다. 그는 철저한 루터파였습니다. 그는 한 연설에서 가톨릭을 비판하고 루터의 입장을 강변했습니다. 결국 체포 직접까지 갔지만 콥은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 바젤로 피신했습니다. 여기에 관여된 사람들이 블랙리스트로 올랐는데 칼뱅도 올랐습니다. 왜냐하면 칼뱅이 그 연설문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관원들이 칼뱅을 잡으려던 찰날 겨우 방을 빠져나온 칼뱅은 도망을 치게 되었습니다.

이런 판국에 더욱더 분위기가 심각해진 사건이 발생합니다. 1534(칼뱅 25)에 미사를 공격하는 벽보가 프랑스 전역에 나돌았습니다. 심지어 왕의 침실 문에도 벽보를 못 박아 놓았습니다. 이 벽보의 수위는 미사를 장난질이요 우상숭배라며 비판을 했던 것입니다. 이제 왕은 자신의 생각을 더 굳혀지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위험한 난동을 피우는 집단이라고 말입니다. 그는 모독당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린다고 제물을 드립니다. 바로, 화형용 장작더미를 쌓고 벽보 사건에 관여했다고 추정되는 36명을 불태워 죽입니다.

이제 칼뱅은 프랑스를 떠나지 않으면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프랑스가 이집트같은 나라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예배를 온전히 드리려면 이 땅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제 난민 신세가 되고 맙니다. 이때부터가 망명자로서 칼뱅이 시작됩니다. 아마 자신을 주류라고 생각하는 신학노선들이 이런 비주류 노선이었던 칼뱅의 정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드는 대목입니다.

 

 

칼뱅은 종교개혁을 따르는 도시인 바젤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콥과 올리베탕 같은 사람들과 합류했습니다. 나이 26살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칼뱅은 자신이 평생을 바쳐 쓸 기독교 강요초판을 쓰게 됩니다. 그는 이 책을 프랑스아 1세에게 헌정했습니다. 한 때 종교개혁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가졌던 왕이기에 또, 프랑스에서 핍박받는 자신들의 동료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신앙 입문에 도움을 주기 위해 책을 쓴 것입니다. 칼뱅은 이런 식으로 프랑스에 종교개혁을 전파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칼뱅은 제네바로 가게 됩니다. 이곳은 매력적인 도시였습니다. 프랑스 및 신성로마제국과 모두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지리상으로는 완전히 독립을 누릴 여지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무렵 제네바는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도시로 발돋움했습니다. 제네바 시민들은 마지막 주교를 몰아냈고, 미사를 없앴고, 사제들에게 회심을 하든지 이 도시를 떠나든지 하라고 통보까지 했습니다. 제네바는 이제 공식적으로 종교개혁의 도시였습니다.

칼뱅이 이 도시로 도착했을 때는 상당히 어지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어지러운 상황에 누군가가 도움을 준다면 훨씬 안정적이게 종교개혁의 도시로 발돋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칼뱅은 그런 도움을 주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기욤 파렐이란 종교개혁자가 칼뱅의 뜻을 돌이킵니다. 파렐은 기독교 강요의 저자가 제네바로 왔다는 말에 당장 저자인 칼뱅을 만나러 갑니다. 자신보다 20살이나 많은 파렐을 보자 놀랐습니다. 이 도시를 도와달라는 파렐의 말에 칼뱅은 조심스럽게 자신은 공부를 계속하러 스트라스부르로 간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파렐은 이렇게 답합니다. “꽁무니를 빼면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리실 것이라고요. 결국 칼뱅은 여행을 단념하고 제네바에 머물게 됩니다. 1536년 여름(칼뱅 나이 27)입니다.

이 도시는 이제 새로운 신앙고백의 기초로 세워집니다. 개혁을 박차던 도시에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성찬입니다. 칼뱅은 악명 높은 범죄자는 성찬에 참여하지 못 하길 원했습니다. 제네바 같은 공동체에서 성찬 참여를 거부당한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 꼴입니다. 더구나 프랑스로 건너온 이민자의 손에 망신을 당한 것이기에 꼴은 더 우스워집니다. 시의회는 이것을 참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성찬 참여를 거부당할 수 없다는 조례를 공포합니다. 제네바 시가 종교개혁을 원하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원하진 않았습니다. 점점 더 파렐과 칼뱅과의 갈등이 깊어집니다. 결국 그 갈등 끝에 파렐과 칼뱅은 설교를 금지 당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매우 강한 캐릭터인 파렐과 칼뱅이 그만 두지 않습니다. 설교 금지령을 어긴 것입니다. 결국, 시의회는 이것을 빌미로 파렐과 칼뱅을 내쫓습니다. 1538(칼뱅 29), 온지 칼뱅은 다시 유랑길에 오릅니다.

 

칼뱅은 두 가지 마음을 들었습니다. 한편으로 제네바가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가면 어쩌나 했고, 한편으로 은근히 기뻐했습니다. 이제 자신의 원래 뜻대로 스트라스부르에서 실컷 공부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파렐은 다른 곳에 담임 목사 자리가 나서 그곳으로 가고 칼뱅은 이제 스트라스부르의 수장 마르틴 부처와 깊은 인연을 맺습니다. 부처는 칼뱅에게 그저 공부만 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난민 교회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했던 것이지요. 처음에는 부담스러워 했지만 후에 돌이켜 보면서 칼뱅의 인생에 이 시기가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고백합니다. 칼뱅은 그와 같은 도망자인 동포들에게 따뜻한 환대를 받았고 행복한 사귐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그의 마음을 잘 알아주었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칼뱅은 그곳에서 종교개혁 교회의 모습을 배웠던 것입니다.

칼뱅은 이 시기에 결혼에 대한 압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한번 그의 글을 보겠습니다.

 

“(마르틴) 부처가 선택한 여성이 칼뱅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 프랑스인은 겁에 질렸다. 부처가 실패하고 파렐이 과제를 이어받았는데, 5월이 되어 다른 여성이 후보로 물망에 올랐다. 칼뱅은 결혼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점점 짜증이 난다고 밝혔다. ‘나는 외모가 훌륭한 사람을 보고 첫눈에 반해서 그 사람의 단점까지도 사랑하는 얼빠진 사람이 아닙니다. 내 마음을 끄는 여인은 정숙하고 너무 까다롭지 않으며 온화하고 검소하고 인내하며 내 건강에 신경을 써 줄 것이라 기대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그런 여자는 없었다.”

 

그러나 얼마 후 칼뱅은 한 여인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됩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이들레트 드 뷔르였습니다. 과부였고 두 딸의 어머니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습니다. 1540, 그의 나이 31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혼 생활이 해피엔딩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병들었고 부부가 낳았던 아이 역시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1549, 결혼 후 9년 뒤 아내는 사망했습니다. 차가운 천재로 불렸지만 그는 아내에게 만큼은 따뜻했습니다. 칼뱅은 나는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내 슬픔을 이겨 내려고 애쓴다네. 나는 내 인생의 가장 좋은 벗을 잃어버렸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가 스트라스부르에서 행복한 난민 목회를 하는 동안 제네바는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에서 벽보를 썼던 목사가 왔으나 교리의 혼란만 생겼고 정치적 폭력이 난무했습니다. 결국 제네바 상황은 칼뱅이 돌아오기 원할 만큼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제네바 사람들은 칼뱅을 차갑게 내치고 3년이 흐른 뒤 그에게 다시 돌아오라는 초청장을 보냅니다. 칼뱅은 제네바로 가는 것이 끔찍했을 것입니다. 지금 있는 이곳에는 자신과 마음 맞는 사람들이 있었고 제네바에는 자신을 끔찍이 공격했던 사람들이 즐비해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십자가를 지느니 백 번 죽는 게낫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파렐과 부처의 간곡한 설득으로 칼뱅은 다시 제네바로 가게 됩니다.

1541(칼뱅 32) 칼뱅은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제네바로 갔습니다. 제네바 시에서는 칼뱅에게 괜찮은 집을 하나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칼뱅은 제네바 사람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짐을 푼 뒤에도 다시 추방당할 각오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칼뱅이 설교를 합니다. 사람들은 긴장합니다. 한번 쫓아냈던 사람이 설교를 하는데 어떤 독설을 내뱉을까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칼뱅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3년 전에 하려던 본문을 설교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사사로운 앙심을 품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칼뱅은 이제 제네바의 문제의 핵심과 맞서야 했습니다. 바로 시의회였습니다. 그들은 교황과 같은 권위를 가진 집단이었습니다. 모든 분야를 사사건건 간섭하며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일까지 통제하였습니다. 칼뱅은 자신이 아직 환영받을 때 손을 써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칼뱅은 개혁안을 제안하였습니다. 마침 시의회는 대부분 받아드렸습니다. 이 제안들은 단순히 로마와 단절하는 데 그친게 아니었습니다. 전심전력을 다해 말씀으로 끊임없이 개혁해 가는 일이었습니다. 개혁된 교회도 늘 개혁해 가야 한다. 종교개혁의 가치 중 하나이지요. 칼뱅은 다른 무엇보다도 모든 집이 해마다 목회자의 심방을 받아야 하고, 모든 이가 개신교 신앙을 설명한 요리문답을 배워야 하며, 이런 일들을 행한 사람만이 성찬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칼뱅의 개혁에는 지나친 제한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시민들이 선술집을 제집 드나들 듯 못하게 막는 대신, 이 시민들을 감시하고 프랑스어 성경을 읽게 할 수도원을 제공하려 했습니다. 그러니깐 술 말고 성경읽기를 시행하려 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이름까지 목록을 만들어 공표했습니다. 제네바 사람들은 십중팔구 징징대며 불평했습니다.

이런 일들 때문에 칼뱅은 보수 꼴통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라는 평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제네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너무했습니다. 그는 샌님 학자였고, 독재 권력을 휘두를 욕심이 없었습니다. 그런 권력을 가질 기회도 없었습니다. 프랑스 사람이기에 제네바 투표권이 없었고 공직에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시의회는 언제라도 칼뱅을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칼뱅이 이민자라는 사실이 반감을 더 부추겼습니다. 칼뱅이 돌아온 1941년의 인구가 만 명이었지만 근 20년 뒤에는 이만 명이 되었습니다. 새로 이주한 사람은 거의 다 칼뱅과 같은 프랑스 난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제네바에 큰 영향을 주고 있었습니다. 시계 제조 산업도 이들이 들여왔습니다. 심지어 거리에서 사람들이 주로 쓰는 언어조차도 프랑스어로 바꿨습니다. 이러니 이주민들은 행복했을지 몰라도 기존에 있던 사람들은 외국인 혐오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상황이 심각해 졌습니다. 한 무리 여자들이 춤을 추다 붙잡혔는데, 이 일 때문에 칼뱅은 맹렬한 반감을 사게 됩니다. 입에 올리지 못할 욕설을 칼뱅에게 퍼부은 포스터가 붙여졌고, 심지어 칼뱅의 설교단에도 붙여졌습니다. 심지어 1550(칼뱅 41)대 초에는 폭동이 일어나고 긴장이 높아졌습니다. 그 주동자들은 바로 파티를 끔찍이 좋아하고 칼뱅은 미워했던 무리들이였습니다. 얼마나 싫었던지 칼뱅이 설교를 할 때 기침을 해대거나 앉은 의자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무례함을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모든 상황을 볼 때 칼뱅이 제네바에서 살아남기란 불가능 같았습니다. 1553(칼뱅 44) 칼뱅은 법이 자신에게 부여한 권한에 따라 반 칼뱅을 내세운 이 무리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에게 성찬금지를 내립니다. 그 선고 이후 다음 주 설교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칼뱅은 목이 매여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칼뱅은 추방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모릅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제네바에서 그는 바람 앞에 등불과 같았습니다.

1555(칼뱅 46),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칼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시의회 의원 선거에서 이긴 것입니다. 이 결과에 반대했던 무리들이 폭동을 일으킵니다. 칼을 뽑았고 오랜 반칼뱅파 두목이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구데타였습니다. 여태 스위스 도시들 중에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결국 사태가 진압되고 주동자들은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대다수 가담자들은 피신합니다. 이 일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반칼뱅파가 완전히 뿌리 뽑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칼뱅은 전에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칼뱅은 어떤 일들을 계획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모국 프랑스를 개신교 국가로 만들려는 시도입니다. 그는 이미 프랑스 개신교 지도자였습니다. 프랑스의 많은 지하 교회들과 꾸준히 접촉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1555(칼뱅 46) 이후 훨씬 더 수위를 높여 나갔습니다. 비밀 연락망을 세웠고, 안전가옥과 피신처를 마련했습니다. 그 결과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몰래 들어가 새로운 지하 교회들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파리와 리옹에 세운 비밀 인쇄소들이 이 교회들을 지원하면서 큰 효과를 냈습니다.

프랑스 전체 인구 중 10퍼센트가 넘는 사람들이 개혁파 신자가 되었고 약 2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렇게 세워진 수백 개 교회들에 모여들었습니다. 칼뱅주의는 특히 귀족층이 애호였는데 그들 가운데 대략 3분의 1이 칼뱅주의로 돌아섰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덕분에 개혁파 신앙은 실제 교세에 어울리지 않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칼뱅이 오랫동안 꿈꿔 왔던 개신교 국가 프랑스가 현실로 이루어질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칼뱅은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프랑스 개신교회들을 도왔습니다. 프랑스 개신교회가 성장했지만 격려가 필요했습니다. 아직까지 박해가 여전했기 때문입니다. 체포당하고 화형을 당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칼뱅은 그들을 아랫사람 대하듯 말하지 않고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격려를 했습니다.

칼뱅은 또한 제네바를 국제 중심지로 바꿨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이탈리아까지 개신교를 따르는 통치자들에게 조언자가 되었습니다. 난민들을 훈련했으며 여러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칼뱅은 또한 1559(칼뱅 50)에 대학과 아카데미를 시작합니다. 칼뱅은 이곳에서 일반교양 교육에서 신학과 성경 각 권을 자세히 연구하는 쪽으로 목사님들을 길러냈습니다. 이렇게 훈련받은 목사님들은 유럽 각지로 파송을 했습니다.

 

1555(칼뱅 46)에 칼뱅은 열심히 일했던 시기였지만 건강 역시 다시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하강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일을 많이 했던 터라 안 그래도 좋지 않은 몸이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10년 동안 그의 병은 이어졌고 1564(칼뱅 55), 그는 인생의 막을 내렸습니다. 그는 침상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제자인 테오도르 드 베즈는 그 순간을 해가 짐과 동시에 이 찬란한 빛이 우리에게서 사라졌다고 썼습니다. 칼뱅은 자신의 유골이 성물이 되거나 자신이 우상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평범한 묘지에 묻고 무덤에는 아무런 표시도 남기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 무덤에는 신비한 매력도, 비석도 없었습니다. 칼뱅다운 무덤이었습니다.

 

-칼뱅과 세르베투스! 과연 칼뱅은 잔인한 학살자였는가?

(양신혜 교수님의 칼럼을 추천한다)

https://news.joins.com/article/18925037

 

[비평의 플랫폼]칼빈은 불관용자의 대표자인가?

[머니투데이 양신혜 대신대학교 조교수] [편집자주] ‘비평의 플랫폼’은 공연, 전시, 출판, 미디어에 대한 리뷰와 더불어 우리 사회의 이슈를 문화비평의 시각으로 의미를 분석하고 실천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코너입니다. 각 분야 비평가들의 깊이 있는 시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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