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을 읽다』
이번 시간은 어거스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라틴어 이름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이고, 영어식으로는 어거스틴입니다. 많은 분들에게 익숙한 이름은 어거스틴이기에 어거스틴이라고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강의는 피터 브라운의 『아우구스티누스』를 주로 참조했습니다. 그 외에는 후스토 L. 곤잘레스의 『초대교회사』(은성),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신학이란 무엇인가』(복있는사람), 로저 E. 올슨의 『신학논쟁』(새물결플러스)를 참조했습니다.
1. 회심의 여정
어거스틴은 354년에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아프리카의 타가스테란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아프리카라고 하면 뜨거운 햇볕과 사막이 생각나지만 어거스틴이 태어난 곳은 이런 전형적인 아프리카의 이미지와는 다른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아프리카의 최고로 북쪽에 있었기에 거대한 소나무 숲과 곡물과 올리브들이 있었고 심지어 높은 계곡도 있었습니다. 해발 2000피트(600m) 넘는 지역이었습니다. 또, 이곳은 카르타고(로마에 속한 대도시)와같이 상업이 발전한 나라가 아니라 농부들의 도시였습니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파트리키우스입니다. 그는 하찮은 시민이라고 불리는, 즉 재산이 많지 않은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뜩이나 경쟁이 심한 이곳인데 하층민인 어거스틴이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고전 교육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부유층들은 고전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잘 대접했습니다.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가기도 했었죠. 하지만 어거스틴은 이 고전교육을 받지 못할 뻔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옷을 입지 못했을 정도로 생활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 당시 아프리카도 혈연이 상당히 중요했나 봅니다. 파트리키우스에게 지역의 유지인 로마니아누스가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아버지는 그에게 후원을 요청합니다. 그는 어느 정도 유력자였냐면 황제가 주는 칭호나 행정직도 받을 수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친적이었는데 왜 가난한 걸 구제해주지 않았는지는 의문입니다만 결국 후에 어거스틴이 성공하게 되는데 큰 힘이 됩니다.
어거스틴의 부모님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어거스틴 못지 않게 유명한 모니카입니다. 어거스틴이 회심한 그 중심에는 분명 그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절제력이 있으며, 위엄이 있었고, 소문에 흔들리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의 확고한 중재자였고, 아들처럼 효율적으로 풍자를 구사할 줄 알았습니다. 그녀는 기독교 가문에서 엄격하게 자랐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그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어거스틴은 잘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는 어거스틴이 18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어거스틴을 카르타고로 보내기에 충분한 돈을 겨우 마련한 직후에 돌아가셨습니다. 친구의 죽음에는 엄청 슬퍼했던 어거스틴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는 단지 지나는 길에 거론할 뿐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이 부모님에 대해 가장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둘 사이에 잠재된 긴장이 있었다는 겁니다. 모니카는 파트리키우스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자기들은 결국 남편들의 ‘노예-소녀’이고, “주인이자 지배자인 남편들에게 반항할 수 없다”고 냉소적으로 말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파트리키우스는 다른 남편들처럼 결코 모니카를 때리지 않았습니다. 모니카가 남편을 자극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고 난 뒤에 말하곤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둘 사이의 긴장은 파트리키우스가 이교도였기에 더 심했습니다. 그는 모니카에게 충실하지 않았고, 모니카 역시 그가 기독교 신자가 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이런 갈등이 어린시절 어거스틴에겐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의 공통점도 있었습니다. 바로 단호함입니다. 파트리키우스는 자식을 교육시키는데 ‘비뚤어져 보일’정도로 열심을 내었습니다. 모니카 역시 9년 동안이나 아들을 위해 그렇게 울었는데 잃을리 없다는 강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런 강력한 단호한 성품이 어거스틴에겐 후에 큰 자산이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중반부터 논쟁자로서 이교도와 이단들과 맞섰는데 이때 교회의 적들에겐 단호함이 필요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4세기 아프리카 주교에게 그 둘은 가장 적절한 부모가 아니었나 말하기도 합니다.
어거스틴은 어렸을 때부터 교사를 꿈꾸었습니다. 이 당시 어거스틴이 살았던 아프리카 동네는 교육을 숭배했습니다. 어느 기록에는 ‘로마 문학 교수가 되었다’는 것을 자랑했다는 것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로마식 교육은 신분의 척도였습니다. 이런 세상에 살고 있던 그는 예민한 소년으로 성장을 합니다. 인정받는 것, 경쟁에서 이기는 것, 창피를 당하지 않는 것을 열렬히 원했고 학교에서 매를 맞아 수치를 당하는 것을 무서워했습니다. 이런 어린 시절에 학자로서 나름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그가 그리스어 학습에 실패했다는 겁니다. 그리스어를 배우는게 대단히 따분했던게 그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후기 고대 라틴 철학자들 가운데 사실상 유일하게 그리스어를 몰랐던 학자였습니다. 그러나 혹독한 체벌(채찍질)을 당하는데 부모님의 열성적인 독려와 함께 재능을 발하는 소년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교육을 통해 비상한 기억력, 집요한 집중력, 사람의 마음을 여는 기술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17세가 되었고 아프리카의 가장 큰 도시인 카르타고로 가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카르타고에서 그는 그만 사고를 치고 맙니다. 물론, 당시의 기준에서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보면 그렇게 큰 사고는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거라고 추정하는 그 시기(18세)에 동거녀를 얻습니다. 그 동거녀와는 15년을 함께 살았지만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19세에는 아이까지 낳게 됩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아데오다투스입니다.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는 것을 흔히 이류의(second class) 결혼이라고 합니다. 나중에 출세하기 위해선 이러한 방법을 써야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결혼은 부유한 가문의 자식과 결혼하며 지금 있는 동거녀는 쉽게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이까지 낳은 그의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종교를 만납니다.
그 종교의 이름은 마니교입니다. 어거스틴은 9년동안 마니교의 청문자(우리로 치면 교리문답을 하는 예비신자)였습니다. 마니교는 어거스틴에게 사물의 이치에 관한 지식을 확실하게 보였습니다. 마니교는 짧게 말하면 모든 사람은 자기 안에 그리고 자기를 둘러싼 세계 안에 선과 악이 긴밀히 섞여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악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을 거라는 생각은 종교적인 사람에게는 대단히 혐오스러운 것이고, 합리적인 사상가에게는 불합리합니다. 하나님은 선하고 완전하시죠. 하나님은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악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추호라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이 ‘신적인 존재에 대한 극단적인 경건’이 마니교도들의 종교 제도에 격렬한 성격을 낳았습니다. 그들은 이원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악이 선한 하나님에게 유래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확신했기에 힘에 있어서 동등하고, 영원하고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는 악의 적대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즉, ‘어둠의 왕국’이 선을, 곧, ‘빛의 왕국’을 침입해 악이 유래했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마니교도가 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는 전통적인 종교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는 이 시기부터 철학적 능력을 향상시키기를 열망하는 교사를 꿈꿨으며 지혜에 대한 엄격한 추종자였습니다. 후에 어거스틴은 이때의 자신을 돌아보며 가장 큰 특징을 죄의식을 애써 회피했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죄와 같은 어둠은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어둠의 나라의 공격 때문이니까요. 죄책감이 무뎌지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강렬한 야망, 불안한 동거, 부모님과의 갈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런 마니교에서도 그는 대답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가 마니교의 미몽에서 깨어난 것은 마니교 내에서 근본주의 집단을 만나면서입니다. 그들은 이성적인 대화보다는 마니의 책의 내용을 그대로 지지했고 조그마한 왜곡도 거부했습니다. 끊임없이 지혜를 찾아나선 어거스틴에게 마니교는 답이 될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마니교 최고의 교사라는 파우스투스를 만났지만 그는 그닥 실력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실 당시 종교적 혼란을 틈타서 갑자기 등장했던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니 준비된 실력자가 아니었죠.
이런 고민스러운 삶 가운데에서도 어거스틴은 성공을 꿈꿨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당시 수사학 교사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우소니우스라는 사람이 보수주의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새로운 황제의 스승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자식들이 군인의 무력보다는 휼륭한 교육을 받길 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의 우두머리 아우소니우스의 아들과 사위가 어거스틴이 일하고 있는 도시 카르타고에 총독으로 왔습니다. 수사학 교사로 일하고 있는 어거스틴에겐 이러한 흐름이 출세하기에 좋은 징조였습니다. 더군다나 ‘인류의 엘리트’로 생각하는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은 지혜에 열중하는 자를 친구로 삼으려고 열심이었습니다. 이들은 어거스틴같은 사람을 후원하고 종국에 협력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던 사람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출세의 길을 통해 그들과 같이 되는 것이 그의 꿈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뛰어난 외부인들과 접촉에 성공합니다. 시 분야에서 상을 받았고 그에게 월계관을 씌워주었던 빈디키아누스 총독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둘 다 고전을 매우 사랑했기 때문에 시인과 총독은 동등자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카르타고를 떠날 때쯤은 그가 마니교의 미몽에서도 벗어날 때였습니다. 382년, 그의 나이 28살입니다. 그는 이제 로마로 갑니다. 먼저 정착했던 친구들이 ‘좀 더 좋은 수입’과 ‘높은 명예’를 약속합니다. 어거스틴은 떠나지 말라는 어머니 모니카를 뒤로하고 늦은 밤 몰래 도시를 떠나 로마로 갑니다. 하지만 로마에서의 1년은 최악이었습니다. 학생들이 돈을 낼 때쯤 잠적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는 너무나 힘든 1년의 시간이 어머니 말을 안 들어서 이렇게 된 건가 싶었습니다.
하지만 불운도 얼마가지 않습니다. 황제가 도시의 시장 심마쿠스에게 밀라노시 수사학 교수를 뽑으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황제의 궁정이 밀라노에 있었기 때문에 이 직책은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수사학 교수는 황제와 그해의 콘술(집정관, 로마 시대의 최고의 관직)들을 위해 공식적인 송덕시를 짓곤 했습니다. 여러면에서 ‘공보 담당 장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심마쿠스가 바로 이 자리에 어거스틴을 앉혔던 것입니다. 그는 어거스틴의 연설에 감동을 받았던 기억에 이런 행보를 보였습니다. 이제 고향 타가스테 - 카르타고 - 로마 - 밀라노로 갑니다. 밀라노. 당시 그 도시의 주교는 암브로시우스였습니다. 이 역사적인 만남이 드디어 이뤄지기 직전입니다.
어거스틴은 이제 밀라노에서 생활을 합니다. 여기서 생활하면서 그는 마니교의 잘못된 견해들을 조심스럽게 반박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니교도들은 어거스틴에게 ‘미리 만들어진’ 지혜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성찰하는 훈련이 몸에 베인 어거스틴이 이것에 결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 스스로 사고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반박의 시간을 보낸 것이지요. 그러나 어거스틴은 탐구의 길이 막혀버립니다. 어떤 수단으로 진리를 탐구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밀라노 주교 암브로시우스를 만납니다. 그는 어거스틴보다 14살이 많고, 주교로는 11년 봉직했습니다. 암브로시우스. 그는 상류계층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참 유별난 사람이었습니다. 무자비한 로마 사회에서 태성적으로 귀족이 된 것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으로 상류층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한 사령관의 아들이었고 리구리아 지방의 총독까지 역임하다 갑자기 주교를 맡게 되었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설교로 어거스틴을 놀라움과 근심에 빠트렸습니다.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는 탁월했습니다. 로마에서 상층 교육의 모든 이점들을 누렸던 사람이기에 지방적인 특징이 전혀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어를 잘 모르는 어거스틴과는 달리 암브로시우스는 그리스도어도 잘 했습니다. 또, 가장 학식 있고 최신 설교를 제공하기 위해서 그리스권 기독교의 전통적인 학문의 성과 전부와 뛰어난 새로운 세대 주교들의 작품들을 철저하게 연구했습니다. 더 나아가 이교도들로부터 차용해오는 것을 전혀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잘 사용할 때면 그는 설교단에서 마치 획득한 전리품을 과시하는 듯 했으며 기뻐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이런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통해 어거스틴은 구약에 대한 잘못된 선입관 바로 잡습니다. 마니교에서 구약에서의 잔인한 모습의 하나님을 용납하지 않았기에 어거스틴도 그렇게 생각을 했지만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통해 생각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 철학에 조예가 깊었던 암브로시우스였기에 그의 설교는 저 세상을 지향했습니다. 또, 사람의 영혼을 강조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영혼의 수동적인 뿐이며, 구약의 불투명하고 호감이 가지 않는 ‘문자’ 이면에는 숨겨진 의미인 이 심령이 일어나서 다른 세계로 날아가라고 우리의 심령을 부른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암브로시우스의 저 세상 지향성이 어거스틴에겐 얼마나 충격적으로 다가올지 상상이 잘 안 됩니다. 왜냐하면 당시 플라톤주의자들을 제외한다면 고대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물질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신적인 것은 비록 무한히 더 ‘좋고’, ‘고귀하고’, ‘변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럼에도 하나의 ‘기본 물질’이었습니다. 결국, 마니교 역시도 ‘빛의 왕국’이란 개념을 실제로 물질로 생각했는데 이 물질주의가 훨씬 발전된 종교라는 것을 이제 완전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어거스틴에게 완전히 새로운 사상을 소개했습니다. ‘비물절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러니 물질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해온 어거스틴은 근심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암브로시우스를 만나고 싶어하던 어거스틴은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는 중요한 사람들과 만나기에 바빴기 때문입니다. 그를 보러 페르시아 귀족이 먼 이탈리아로까지 온 적이 있었으니 말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은 어거스틴을 암브로시우스는 크게 도와줄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어거스틴은 신플라톤주의와 만나게 됩니다. 플라톤의 가르침을 플로티노스라는 사람이 가장 잘 닦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를 통해 이제 신플라톤주의가 생겨나게 됩니다. 어거스틴은 이 플로티노스를 “플라톤의 숨겨진 의미를 끄집어내는” 위대하고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마음을 가진 자로 보았습니다.
암브로시우스의 설교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당시 신플라톤주의를 기독교의 논의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을 많이 보였습니다. 암브로시우스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심플리키아누스가 대표적으로 플라톤주의와 기독교를 결합시키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또, 당시 열풍으로 신플라톤주의 저작들이 라틴어로 번역되었기에 그리스어를 모르는 어거스틴에게 축복과도 같았습니다. 어거스틴은 누구보다도 매우 철저하게 플로티노스의 사상을 읽었습니다. 그랬기에 흡수와 소화를 통해 변형까지 시킬 수 있었습니다.
플라티노스를 사로잡고 있던 것은 가변적인 것과 불변하는 것의 대조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이 세상의 ‘이곳’에서 저 세상의 ‘저곳’이 갖고 있는 시간을 초월한 성질을 끊임없이 생각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선함과 아름다움 같은 성질들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저곳’의 변하지 않은 성질을 변함없는 확실함으로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왜 신플라톤주의라는지 어느 정도 윤곽이 보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계속해서 명백한 세계에 매여 있는 보통 사람들은 희미한 빛 속에서 움직이고 그가 갖고자 하는 지식은 쇠퇴하는 단계에 있는 의식이 피할 수 없이 이르게 되는 최후의 희미한 상태에 불과하다는 통절한 인식이 우주에 대한 플로티노스 견해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 쇠퇴하는 단계들은 서로 긴밀히 연계되어 있습니다. 각 단계는 ‘상위’ 단계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 상위 단계가 지각의 원천으로서 각 단계에 필수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위’ 단계는 그 앞 단계와 다릅니다. 문자에 사로잡힌 마음을 가진 사람이 직관적인 사람의 사고를 따라잡을 수 없듯이 하위 단계는 상위 단계를 결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각 단계는 비록 성질이 다르지만 서로 연계되어 있는 자기 지각의 원천, 즉 ‘상위’ 단계와 접촉함으로써 자기를 완성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일자(The One)의 외부로의 확산은 모든 부분이 지각의 원천으로 ‘돌아가고자’하는 지속적인 긴장과 동시에 일어나게 됩니다. 완성을 향한 이런 긴장은 ‘일자’와 ‘그 일자’의 강렬한 발출 각각을 직접 연계시킵니다. 이것이 간략하게 설명한 외부로의 ‘발출’과 그 결과인 내부로의 ‘회귀’에 대한 신플라톤주의의 학설입니다.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논설 중의 하나는 영적인 세계가 시간과 공간의 세계와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 근본적이라는 것을 집중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어거스틴에게 중요한 것은 마니교의 수동적인 선과는 다르게 선의 힘이 항상 주도권을 유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자는 흘러나오면서 그 자체로는 훼손되거나 감소되지 않으며, 모든 것과 접촉하고 수동적인 물체에 형태와 의미를 준다고 보았습니다. 아마 이러한 사상에서 악의 선의 부재라는 그의 유명한 명제가 등장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 그는 출세의 길이 아닌 영적인 의미를 탐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초월적이신 분이시며 자신의 분리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잇고 별개의 존재라는 것을 받아드려야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선과 동일시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자신의 이상들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을 악의 절대적이고 공격적인 힘이라고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제 초연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악이 훨씬 크고 훨씬 더 분화된 우주의 오직 작은 한 부분일 뿐이고, 마니가 생각했던 것보다 우주의 목적은 훨씬 더 신비스러우며, 우주의 하나님은 훨씬 더 회복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신플라톤주의에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제 육체적 정욕과 야망뿐 아니라 수사학 교수도 버려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가 그의 전부였다면 그는 기독교 역사에서 이름을 남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회심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바울입니다. 어거스틴은 사도 바울의 편지들을 다 읽습니다.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바울을 이제는 전체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결코 제 2의 플로티노스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울의 가르침에 매우 개인적인 방식으로 강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모니카의 굳건한 기독교 신앙심과 동일한 마음을 가져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을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고백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나는 무화과나무 밑에 넘어졌고 눈에서 냇물처럼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것이 당신께 드리는 나의 제사였다... 나는 내가 여전히 죄의 포로이고 비참한 가운데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계속 울었다... 왜 지금이 아닌가? 왜 바로 이 순간에 나의 추한 죄를 끝내지 못하는가?
마음이 격심하게 비통해 줄곧 울면서 이 문제를 스스로 자문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근처 집에서 한 아이가 부르는 노래 소리가 들렸다... 그 노래 소리는 거듭 거듭 ‘그것을 잡아서 읽으라, 그것을 잡아서 읽으라’라는 후렴구를 반복했다... 이런 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전혀 없엇다. 나는 홍수처럼 흐르는 눈물을 멈추고 이는 성경책을 펴서 눈이 처음으로 마주치는 구절을 읽으라는 신성한 명령임에 틀림없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일어섰다. 안토니우스가 복음이 낭독되고 있는 교회에 우연히 갔을 때 ‘집에 가서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라는 소리를 듣고, 그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권고로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를 기억했기 때문이다.
...첫 구절을 읽었다. ‘흥청거림, 술 취함, 탐욕, 방종함, 싸움과 경쟝에 머물지 말라. 오히려 너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무장하고 더 이상 본성과 본성의 욕구를 생각지도 말아라.’ 나는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내가 문장의 마지막을 읽고 있는 순간에 확신의 빛이 내 마음 속으로 몰려들어왓고 모든 의심의 어두움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희망과 꿈을 넘어서 당신의 목적을 달성하시기에 능력이 충만하신, 필요한 것보다 훨씬 충만하신’ ‘당신’에게 영광을 돌렸다. … 당신께서 저를 당신에게로 개종시켰기 때문에 저는 더 이상 아내를 원하지 않고, 이 세상에 어떤 희망도 두지 않으며, 오로지 믿음의 가르침에 의지합니다. 여러 해 전에 당신께서 꿈속에서 저의 어머니에게 저를 보여주셨던 그 믿음의 가르침에 의지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슬픔을 환희로, 가장 소중히 바랐던 것보다 더 큰 기쁨으로, 그녀가 저와 형제들을 낳은 이후로 아이들에게 바랐던 어떤 것보다 더 달콤하고 고상한 기쁨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이제 출세의 길을 포기한 어거스틴은 수도원에서의 삶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려고 했던 찰나 시대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로 돌아온 어거스틴은 주변에 떠밀리면서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가 그저 사제만으로 머물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아프리카의 기독교 상황은 소수파에 속했습니다. 도나투스파(배교자들에게 다시 세례를 줘야한다는 주장)와 이교도들이 우세한 상황이었습니다. 도나투스파는 지역 지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지역 관리들에게 암묵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기존의 기독교 주교는 감각적인 말들은 잘 했지만 논리적인 언술에는 대단히 약했습니다. 그 약함은 아프리카의 특징이기도 했습니다다. 그런데 평생을 철학함을 지냈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어거스틴입니다. 사람들은 어거스틴을 찾았습니다. 결국 그는 히포의 주교가 되었습니다.
2. 주교로서의 어거스틴
주교가 된 어거스틴은 이제 논쟁자로서의 삶을 살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두나투스 논쟁, 펠라기우스 논쟁, 삼위일체 논쟁이 있지만 시간상 앞의 두 논쟁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1. 도나투스 논쟁
로마의 박해가 심했을 때 배교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서적을 불태웠고 교회까지 파괴하였습니다. 그런 사람 중 한 명을 이제 박해가 끝나고 기독교가 공인이 될 시점에서 카르타고의 주교로 임명했습니다. 사람들은 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주교가 배교의 죄롤 지었고 교회의 울타리 밖으로 나갔기에 더 이상 성례전을 거행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토나투스파의 가르침보다 훨씬 더 확고하게 신약성경에 근거하여 교회론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특히 기독교의 죄성을 강조하였습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공동체인 ‘순수한 몸’이 아니라 성도와 죄인들이 ‘섞인 몸’이라고 보았습니다(물고기 잡는 그물의 비유, 곡식과 가라지 비유, 씨뿌리는 농부 비유). 그렇기에 이 둘을 사람이 나눌 없었습니다. 그걸 나누는 일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역사의 마지막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렇게 가르거나 심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어떤 의미에서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거스틴이 볼 때 그 거룩함이란 교회 구성원들의 거룩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거룩함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거룩함을 신학적으로 분석하면서 그에 덧붙여 도나투스파들은 자기들이 내세우는 고결한 도덕 기준에 맞추어 살지 못한다고 비꼬았습니다. 그렇기에 성례전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나투스파가 볼 때, 세례와 성만찬 같은 성례전은 도덕과 교리에서 완벽하게 순수한 사람이 거행할 때에만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누가 순수한지 불순한지, 또 누가 덕망이 있고 덕망이 없는지를 타락한 인간이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성례전의 효과는 그것을 거행하는 개인의 공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그것을 제정한 분, 곧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달린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성례전의 타당성은 그것을 거행하는 사람의 공로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이러한 논의는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일례로 작년 신대원에서의 일입니다. 돈 선거를 했던 정황이 명확했던 총신신대원 총장이 성례를 담당했습니다. 두 학생이 예배 중에 총장에게 크게 잘못되었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일이 문제가 되어 징계위원회가 열렸고 그 두 학생은 처벌을 받을 위기까지 처했습니다. 저는 보직교수들이 과도한 반응을 보인 것은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큰 소리로 말했던 두 학생이 그렇게 옳은 행동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어거스틴이라면 그 두 학생에게 동의를 하지 않았겠습니다.
2.2. 펠라기우스 논쟁
펠라기우스는 영국 출신이었습니다. 5세기 초반 로마에 도착했을 때 그는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이 부도덕한 삶을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영국에서 지켰던 기독교는 도덕적으로 매우 엄격했기에 그의 충격은 더 심했을 것입니다. 그는 죄와 구원에 관해 반대되는 메시지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모든 인간이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며 다락 이전의 아담과 같은 상태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수 없게 만드는 타락이라는 선천적인 조건을 부인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아담과 하와가 직면했던 같은 유혹, 즉 하나님께 순종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직면합니다. 그는 사람들이 불순종을 반복하는 이유를 주변에 있는 나쁜 영향으로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원죄는 단순히 사회 안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불순종의 습관입니다. 원죄는 부모, 친구, 이웃에게서 옮은 사회적 병이라고 보았습니다. 죄 짓는 것을 선택한 사람은 자신 주변에 있는 죄인들을 모방하는 일을 선택한 것뿐이기에 그런 행동에는 책임이 따르며 유죄라고 본 것입니다. 펠라기우스에 따르면 우리는 달리 행할 수 있습니다.
위의 펠라기우스의 주장으로 인해 여태까지 하나님의 본성에 관해 논쟁해 오다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문제로 넘어 오게 됩니다. 기독교 신학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이죠. 펠라기우스 논쟁은 세 가지 논쟁점이 있습니다. ① 자유의지 ② 죄 ③ 은혜와 구원이었습니다.
2.2.1. 자유의지
자유의지는 성경이 아닌 스토아 철학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터툴리안이 서방교회에 소개한 것이지요. 어거스틴은 이 단어를 받아드리지만 이 용어를 바울이 말했던 바로 되돌리고자 힘썼습니다. 어거스틴의 기본 개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인간의 타고난 자유를 긍정합니다. 인간은 어떤 일을 할 때 불가피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합니다. 둘째,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로 말미암아 손상되고 무능력해졌습니다(그러나 완전히 파괴되거나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자유의지를 치유하고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합니다. 자유의지는 진짜 존재합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왜곡되고 약해지고 손상되었습니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어거스틴은 접시저울을 비유로 사용합니다. 접시 위에 아무 것도 없으면 공정하게 저울을 젤 수 있지만 이 접시 위에 물건이 실려 있다면 문제가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물론, 여전히 저울은 작동할 것이지만 이미 그것은 악한 결정을 내리는 쪽으로 기울어진 것이 아니냐 주장합니다.
2.2.2. 죄(현대에서 원죄는 가장 환영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을 위해서 『산둥수용소』를 추천합니다.)
어거스틴은 타락의 결과로 모든 인간이 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간의 정신은 죄 때문에 어두워지고 약해졌습니다. 인간의 의지 역시 마찬가지이죠. 죄인들은 심각한 질병에 걸린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자신의 병을 고치기는커녕 올바로 진단조차 못하는 처지라고 보았습니다. 인간의 질병을 진단(죄)하고 적절한 치료법(은혜)을 제시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에게 자기의 죄를 다스릴 능력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죄는 태어날 때부터 삶을 오염시키고 그 후 평생 동안 삶을 지배합니다. 죄란 인간의 힘으로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선천적으로 죄의 성향을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즉 본래부터 죄짓는 행동 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죄가 여러 가지 죄들을 낳는다고 봅니다. 죄성이라는 근본적 상태가 구체적인 죄의 행동을 일으킵니다.
2.2.3. 은혜와 구원
어거스틴은 인간이 은혜의 작용을 의롭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의 착한 행위조차도 하나님께서 타락한 본성 안에서 일하신 결과입니다. 구원으로 이끄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해서, 공로를 묻지 않고 값없이 주시는 은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인간이 받을 자격이 없는 것(구원)을 주시고 또 받아 마땅한 것(유죄 선고)은 거두어 가십니다.
포도원 일꾼들의 비유(마 20:1-16)에 대한 어거스틴의 주해는 이 점과 관련해서 아주 중요합니다. 펠라기우스는 하나님께서 엄정하게 공로를 헤아려 각 사람에게 상을 주신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어거스틴에 의하면 각 사람에게 돌아가는 보상은 그들과 맺은 약속을 근거로 정해진다는 것이 이 비유의 의미입니다. 어거스틴은 일꾼들이 포도원에서 똑같은 시간을 일하지 않았지만 주인은 각 사람에게 동일한 품삯(한 데나리온)을 주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각 사람에게 고용된 때부터 해질 때까지 일하면-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일하고 다른 사람은 겨우 한 시간 일하게 되겠지만-한 데나리온씩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거스틴은 죄인의 칭의의 근거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이라는 중요한 결론을 끌어냅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셔서 죄인들을 의롭다 인정하십니다. 포도원에서 그날 늦게 일을 시작한 일꾼들은 하루치 품삯을 요구할 권리가 없고 단지 주인의 관대한 약속만 의지하는 것처럼, 죄인들도 칭의와 영원한 생명을 요구할 수 없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에 의해 믿음으로 그것을 받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펠라기우스의 논리에 따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이유는 없어지게 됩니다. 이것이야 말로 그가 의도한건 아니지만 복음의 큰 훼손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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