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을 읽다』
이번 시간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삶을 살펴 볼 예정입니다. 참고할 서적으로는 사회학자인 로드니 스타크의 『기독교의 발흥』과 신약학자인 래리 허타도의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렸던 사람들』를 주로 참고하였습니다. 간혹 최종원 교수의 『초대 교회사 다시 읽기』(4장 대안적 세계관과 가치관의 승리)와 김덕수 교수의 『로마와 그리스도교』(7장 팍스 로마나 시대와 그리스도교 박해)를 참조하였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 그러니깐 “초대 교회 사람들의 삶” 하면 어떠한 장면이 떠오릅니까? 저는 가장 먼저 박해받는 모습들이 떠오릅니다. 로마에 박해를 받아 카타콤에 숨거나 원형경기장에서 검투사의 희생양이 되는 장면들입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기독교는 박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박해는 사도행전에서부터 그 조짐이 보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보았을 때 기독교는 자신들에게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과 같은 경전을 사용하고 구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믿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예배했습니다. 유일신 사상을 가진 그들로서는 사람이었던 예수를 하나님과 같은 급으로 예배하였기에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더더구나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이 많이 일어나자 거세게 박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스데반의 순교를 기억합니다. 이후에도 번번이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이때까지 로마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선민사상으로 자신들의 민족들만 종교를 가졌던 이들과는 달리 온 민족, 온 인종 가리지 않고 기독교가 전파되니 로마 세계에서 드디어 문제가 생겼습니다.
로마의 관점에서 유대교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합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국에게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제국의 일체성을 훼손하는 집단으로 간주되어 공개적으로 탄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 박해는 공개적으로 인정되기 전까지 두 세기 이상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전체가 무지막지했던 것은 아닙니다. 박해는 꾸준히 있었지만 대체적인 주기가 있었습니다. 박해기가 지나면 평화가 오고, 일정 기간 관용의 시기도 있었습니다. 이 박해는 대체로 황제의 개인적인 성향이나 로마가 처한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그러면 대표적으로 기독교를 박해했던 황제들을 살펴보겠습니다. ➀ 네로의 박해. 64년 로마의 대화재 사건이 기독인의 박해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네로는 64년 화재가 일어났을 때 로마 남쪽 56킬로미터 지점의 안티움에 있었는데 화재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와 화재를 진압했습니다. 그런데 재난 현장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네로가 로마 시를 재건하기 위해 불을 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네로는 이 소문을 무마히기 위해 ‘희생양’을 만들었는데 바로 사람들이 증오하던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등 평소에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역사가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은 모진 고난과 고통을 당하고 잔인하게 처형(화형)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➁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도미티아누스는 로마의 다신교적 전통이나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자를 박해했습니다. 자신을 ‘주와 하나님’으로 부르게 했고 거부하는 자를 반역자로 탄압했습니다. 또, 유대인들에게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으니 헌금을 황제에게 바치도록 강요했습니다. 이 황제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구별하지 못했기에 두 세력 다 박해를 했습니다. 이 시기 유대인의 몰락은 기독교인들에게서는 로마에게 눈에 띄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때까지만 해도 기독교를 가장 억눌렀던 세력이 유대교인데 그들이 몰락했으니 자연스레 기독교가 확장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세계에서 이제 기독교가 눈에 확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➂ 트라야누스 치세(재위기간 98년 ~ 117년) 소아시아에서 기독교인 박해. 소아시아의 총독이었던 플리니우스가 황제에게 보낸 편지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 편지에는 기독교인 처리 방안에 대한 내용도 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소아시아에 가장 많이 있었기에 편지의 기록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는 진실을 더 많이 알아내기 위해 여사제라 부르는 두 여자 노예를 고문했습니다. 그러나 좋지 못한 지독한 미신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또,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인해라”는 질문을 세 번 정도 물어서 계속 부인하지 않으면 처벌하고 부인하면 살려 주라는 내용도 쓰여 있었습니다.
➃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박해(재위기간 161년~ 180년). 그는 스토아 철학자이면서 로마 전통 종교를 신봉한 황제였습니다. 기독교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한 그는 기독교에 굉장히 비판적이었습니다. 그의 통치 시기는 안팎으로 재난이 많이 일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전염병도 돌고, 홍수도 나고, 특히 동쪽의 파르티아 국경과 북쪽의 라인강-도나우강 국경 지대를 압박하는 게르만족 때문에 아우렐리우스는 많은 시간을 전선에 나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일들이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를 소홀히 해서 발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로마에 들어와서 전통 신들을 안 섬기니 그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신들의 분노’가 발생했다고 여긴 것입니다. 야만족이 침범해 오고 전염병과 홍수가 발생한 것들이 모두 신들의 분노 때문이라고 여겨 기독교인들을 탄압했습니다.
이런 시기들에 순교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대표적으로 이그나티우스(35?-109?)와 폴리갑(80-165)이 있습니다. 이그나티우스는 사도 요한의 제자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이들은 각각 트라야누스 황제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 순교하였습니다.
왜 이런 박해가 일어났을까요? 로마는 관용적인 나라였습니다. 유대교도 용납을 했었습니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결코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이 유대교를 용납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앞전에도 언급했지만 자신들의 체제에 전혀 침범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달랐습니다. 유일신 사상을 가진 기독교는 민족과 신분을 넘어 세계 보편 종교를 지향하므로 로마제국이 숭배하는 다신교적 전통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전통적인 가족, 도시, 지방의 종교를 미신이자 우상 숭배라며 경멸하고 배척했습니다. 유대교처럼 자기들끼리 믿으면 되는데 다른 종교나 신들은 다 거짓이고 자신들의 종교만 진리라고 주장하니 로마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박해에도 기독교는 날로 성장을 했을까요? 아래는 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가 추정한 기독교 인구 성장 추정표입니다.
연도 |
기독교인 수 |
인구 가운데 비율(퍼센트) |
40 |
1,000 |
0.0017 |
50 |
1,400 |
0.0023 |
100 |
7,530 |
0.0126 |
150 |
40,496 |
0.07 |
200 |
217,795 |
0.36 |
250 |
1,171,356 |
1.9 |
300 |
6,299,832 |
10.5 |
350 |
33,882,008 |
56.5 |
·전체 인구 추정치 6천만 명을 기준으로 함
10년 기간으로 40%로씩 성장하였습니다. 로드니 스타크는 사회학자이기에 이 현상을 그의 전공답게 풀어냈습니다. 그는 현대의 신흥종교의 성장을 연구했던 사람입니다. 그 연구에서 몰몬교의 한 세기의 성장이 꼭 43%로 성장했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이 가능함을 현대의 신흥종교에서 발견하고 초기 기독교로 대입을 계속합니다.
그는 개종을 했던 이유도 신흥종교에서 찾아 초기 기독교에 대입을 합니다. 그는 개종이 본질이 교리의 매력, 이데올로기의 추구나 포용에서 찾지 않습니다. 그는 한 사람의 종교적 행동을 친구나 가족 구성원의 종교적 행동과 일치하도록 조정하려는 것에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이 연구를 통일교의 초기 전파를 보면서 확신을 합니다. 그 연구에서 ‘일탈적인 신흥종교 집단으로의 개종은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사람이 비구성원보다는 해당 집단의 구성원과 더 강한 애착관계를 형성했을 때 일어난다’고 봅니다. 즉, 새로운 신앙의 성공적인 창시자들은 전형적으로 그들과 이미 강력한 애착관계가 형성된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갔다는 것입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 일탈(배교)하더라도 다른 사람보다 잃을 게 훨씬 적을 때 일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애착관계가 강하게 형성된 집단에서 잃을게 더 많다고 생각하기에 종교에 머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의 이러한 분석이 얼마나 맞을까 의구심을 갖습니다. 나중에 래리 허타도의 이야기에서 나올 수 있지만 오히려 이 전제(일탈하더라도 다른 사람보다 잃을 게 훨씬 적을 때 일탈)는 로마 종교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로마 종교에 속한 이방인들이 자신의 종교집단을 벗어나 신흥종교인 기독교로 갈 때 잃을 것은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로 개종을 하는 것은 참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서서히 사라지는 게 맞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현대 신흥종교로 대비하는 것은 그다지 과학적이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신흥종교가 2000년 뒤에 살아남을지, 또 초기 기독교처럼 박해를 받지 않았기에 두 집단을 동일선상에서 대조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물론, 현실에서 가장 비교 가능한 방법이라고 말한다면 이해가 되긴 하지만 무리한 작업이란 생각은 떨쳐지지 않습니다.
초기 기독교와 역병(전염병)
물론, 그의 방법론에는 회의하지만 그의 결론에는 솔직히 혹합니다. 친밀한 관계형성이 그의 주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초기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로마의 이교도들과 친밀함을 형성할 수 있었을까요?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앞전에 가장 극심한 박해의 기간 중 하나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통치기를 떠올려 봅시다. 그 당시 어떤 일들이 일어났다고 했나요. 바로, 대표적으로 역병이 있었습니다. 165년 가공할 역병이이 로마 제국 전역을 강타했습니다. 역병이 돌던 15년 동안 제국의 인구가 1/4, 1/3이 역병으로 사망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도 180년 역병으로 사망했습니다. 그 후 251년에 동일한 파괴력을 지는 역병이 다시금 제국을 휩쓸었고 농촌도 도시만큼이나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요즘도 홍역이 유행하는데 그때 당시도 홍역으로 추정됩니다. 이 역병은 한창 심했을 때(두 번째 역병)는 로마시 한 곳에서만 하루에 5천 명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나갈 때 절망과 무기력에 빠집니다. 당시 그들의 사상의 대표하던 소피스트들은 이 판국에 ‘세계가 늙어가며 미덕은 메말라간다’는 애매한 소리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달랐습니다. 이 당시 키프리안과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판국에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충격에 휩싸인 생존자들에게 죽은 이들을 위한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당시 역병, 질병, 폭력적 죽음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이러한 소식은 정말로 복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말뿐인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이 점은 생존률에서 극명하게 이교도들과 대조됩니다. 기독교는 역병에 걸린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이교도와는 참으로 달랐습니다. 오죽하면 율리아누스 황제가 사제에게 쓴 편지에 “불경한 갈릴리인들은 그들의 가난한 자만 돕는 게 아니라 우리의 가난한 자까지 돕는다. 누가 봐도 우리 사람들이 우리로부터 받는 도움이 부족한 것을 알 수 있다”라고 쓰기까지 했습니다. 이교도의 눈에 비친 이 모습이야 말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전하셨던 주님의 가르침의 실현입니다. 역병이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사랑한 것이지요. 또. 자신의 목숨을 버리며 우리를 사랑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구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와 반대로 이교도들의 대책은 이랬습니다. 역병 시대 갈렌이란 의사는 쨉싸게 로마에서 빠져나와 위험이 잦아들 때까지 소아시아의 시골집에 은신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갈렌은 후대에까지 존경 받던 당대 최고의 의사였습니다. 그 당대의 갈렌같은 행보가 사실 그렇게 크게 지탄받을 일이 아니었습니다. 능력과 신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일이지요. 하지만 기독교인은 달랐습니다. 터툴리안은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약자를 돌보고 사랑과 친절을 베푸는 우리의 모습은 많은 우리 반대자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브랜드다. ‘한 번만 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지 보라!”
이 차이가 생존률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그리스-로마 최고의 의사는 발병자와 일체의 접촉을 피하라고 권했습니다. 기독교는 병든 자를 간호하라는 지침을 따랐습니다. 그렇기에 이교도인와 이교도인 사이의 생존률은 25%라면 기독교인와 기독교인 사이의 생존률은 81%였습니다. 기독교인이 자신들만 간호했던 것이 아니라 이교도들도 간호했기에 치료받은 그들은 생존률도 제법 높았습니다.
크나큰 역사의 순간 사상과 행동 면에서 기독교가 그들을 구했던 것입니다. 로드니 스타크는 단순히 사회학적 분석으로 이를 차갑고 건조하게 서술했지만 저는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선배들의 행동에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과연 저러면 목숨을 걸고 사랑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말입니다.
자, 로드니 스타크의 의견은 기독교의 성장과 여성의 역할 부분만 보고 래리 허타도의 시선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흔히 기독교를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그걸 지지한다는 성경구절들도 맥락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저희의 탐구와는 조금 거리가 있어 나중에 기회가 되면 살펴보도록 합시다. 요즘 남녀평등의 이야기가 자주 들리는데 과연, 초기 기독교인들의 여성의 지위는 어땠을까요?
기독교 문화 안에서의 여성의 지위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보다 월등히 높았습니다. 아마 이 때문에 여성 신규 개종자가 훨씬 많이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알 수 있을까요. 그건 바로 영아유기에서 입니다.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는 원치 않는 여아와 기형 남아를 유기하는 것이 합법적이었고 도덕적으로 용인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는 아동기부터 이미 여성의 수가 남성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또, 여성이 남성보다 인구가 훨씬 적었던 이유는 낙태도 한 원인합니다. 당시 의료가 발달되지 않았기에 낙태를 했던 여성이 죽는 일은 빈번했습니다.
여기에서도 역시 기독교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기독교인 성비 분포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여러 경우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기독교의 박해가 심했던 303년 경 북아프리카의 시르타라는 마을에 있는 기독교인 가정 교회에서 나온 물품 목록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불우이웃 돕기를 위해 기독교인이 모은 옷 중에서 16벌의 남성 망토와 82벌의 여성 망토, 47켤레의 여성 슬리퍼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을 추정해 봐도 남성이 훨씬 많았던 그리스-로마 사회인데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여성이 훨씬 많았던 점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성비에서 차이가 벌어질까요? 첫째, 기독교인들은 모든 형태의 영아 살해와 낙태를 금지함으로써 이교도 가운데 존재했던 성비 불균형의 주 원인을 제거했습니다. 둘째, 여성이 남성보다 기독교인이 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여성 사망률 감소가 결합되면 기독교 내에서 여성이 많아지는 현상이 발생했을 겁니다.
자, 계속해서 그리스-로마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살펴봅시다. 아테네법에 따르면 여성은 나이와 무관하게 아동으로 분류되었으며 그러므로 생애의 모든 단계에서 남성의 법적 소유물로 간주되었습니다. 남성은 여성에게 그저 집에서 나가라고 명령하는 것으로 이혼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여성이 재산 소유권이 허락되었지만 그 재산의 통제는 항상 그녀가 속한 남성에게 귀속되었습니다.
스파르타인들도 영아 살해를 했지만 성별에서 편향성은 없었습니다. 그들 사회에선 건강하고 외모가 준수한 아기들만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스파르타 여성은 고전 사회에서 전례가 없는 지위와 권력을 향유했습니다. 스파르타에서는 전체 토지와 재산의 최소 40% 이상이 여성의 단독 소유권 아래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이혼에 관한 법은 남성이나 여성이나 동일했습니다. 스파르타의 여성은 남성과 동일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아마,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기독교 여성의 지위는 아테네보다는 스파르타 여성의 지위에 근접했을 겁니다. 기독교인들은 여아 살해를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이혼, 근친상간, 외도, 일부다처제를 죄악시하기도 합니다. 남성에게 지나친 성적 방종을 허용했던 이교도의 이중 잣대를 기독교는 거부했습니다. 기독교는 남성에게 결혼 때까지 순결을 지킬 것을 말했으며 혼외 성관계는 간음으로 단죄했습니다.
기독교 여성은 과부가 될 경우에도 상당히 큰 혜택을 누렸습니다. 이교도 과부는 재혼하라는 큰 사회적 압박을 받았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2년 안에 재혼하지 않는 과부는 벌금을 부과하도록 했습니다. 물론, 이교도 과부는 재혼과 동시에 상속받은 모든 재산을 상실했습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기독교인 사이에서는 과부로 남기로 선택한 사람을 상당히 우러러 보며 재혼은 다소 만류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므로 부유한 기독교인 과부는 남편의 재산을 계속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호는 과부가 가난할 경우 생계를 지원했고, 과부가 재혼을 할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또 하나 여성이 누렸던 혜택은 기독교인 여성은 비교적 상당히 늦은 나이에 초혼을 했으며 배우자 선택권도 훨씬 넓었다는 점입니다. 이교도 여성은 종종 사춘기 이전에 혼인과 동시에 성관계를 강요당했는데 이는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로마법은 만 12세를 소녀가 결혼할 수 있는 최저 연령으로 규정했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만 12세 이전에 이루어진 결혼에 대한 어떤 조롱이나 비난도 없었고 (조혼을 막는) 법은 구속력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로마 여성의 종교와 혼인 연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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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도 |
기독교도 |
13세 미만 |
20% |
7% |
13-14세 |
24% |
13% |
15-17세 |
19% |
32% |
18세 이상 |
37% |
48% |
출산율에서도 이교도와 기독교는 차이가 난다. 이교도 사회는 저출산이었는데 원인은 결혼을 낮게 평가하는 남성 문화에 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당시 결혼 장려 법안을 냈지만 남성들의 반응은 싸했습니다. 그 사회에서는 남성들이 여성과 관계 맺는 것을 힘겨워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라틴어 문학의 화두가 아내가 힘겨운 존재이기에 남자는 결혼을 내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을 안 해도 되었습니다. 당시는 신부에게는 처녀성이, 아내에게는 정절이 요구되었지만 남성들은 매우 문란했습니다. 그리스-로마 도시는 거리에서 일하는 값싼 창녀부터 몸값도 비싸고 집안도 좋은 고급 정부까지, 매춘 여성으로 넘쳐났습니다. 또한 양성애와 동성애가 흔하여 상당수의 남창이 존재했습니다.
또 하나의 원인으로는 낙태가 있습니다. 그 당시 낙태는 흔했습니다. 낙태는 허다한 출생을 막았을 뿐 아니라 많은 여성들이 출산력에 기여하기도 전에 그들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설령 낙태에서 살아남더라도 불임이 될 확률이 아주 높았습니다. 당시 낙태 방법은 치사량을 살짝 밑도는 독약을 복용하여 유산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모와 태아 둘 다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태아를 죽이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독극물을 자궁 내로 주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또한 산모와 태아가 동반 사망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왜 이렇게 낙태가 횡행했을까요. 그것은 불륜에 의한 성행위 은폐가 가장 두드러집니다. 가난한 여성은 키울 여력이 안 되는 자식을 가지지 않기 위해 낙태를 원했고, 부유층 여성은 많은 상속인에게 가족의 재산이 분산되는 걸 막고자 낙태를 찾았습니다. 이런 낙태 결정은 대다수 남성이 결정했습니다. 그리스 철학은 이를 전폭 지지했는데 플라톤은 인구 제한을 근거로 40세 이후에 임신한 모든 여성의 낙태를 의무화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후손 생산에 제한을 찬성하며 낙태를 허용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출산은 고출산율이었습니다. 그 원인은 결혼이라는 구속을 신성시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여성뿐 아니라 남성의 음란도 정죄하며 남편에 대한 아내의 의무뿐 아니라 아내에 대한 남편의 의무도 강조했습니다(고전 7:2-7). 그렇기에 매우 가족 지향적이며 출산장려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신 여성과 영아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기독교인과 이교도는 극명하게 차별화 된 걸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로드니 스타크는 ‘역병’에 이어 ‘여성에 대한 태도’로 인해 로마를 기독교화 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제 래리 허타도의 시선으로 옮겨가겠습니다. 래리 허타도도 역시 이교도 사회에서 기독교의 가치를 역설합니다. 사회적으로 받는 괴로움과 장차 받을 박해에도 불구하고 예수 추종자가 되고 싶을 만큼 초기 기독교가 제공하는 가치를 말하고자 합니다. 사회과학자가 아닌 신약학자의 초기 기독교의 발흥은 어떤 점인지 한 번 봅시다.
그렇다면 당시 초기 기독교가 등장했던 정황을 살펴봐야 합니다. 초기 로마 제국의 종교적 특징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당시 사람들이 엄청난 수의 신적 존재들을 갖가지 방식으로 숭배했다는 사실이 먼저 눈에 뜁니다. 그야말로 ‘신들이 가득한 세계’였습니다. 가장 유명한 신들은 대체로 그들이 상징하는 민족, 지역, 삶의 순간, 자연의 힘, 도시 등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로마 제국의 많은 사람은 각자 자신들의 전통적인 신을 동시에 여럿 섬겼으며, 당시에는 그 신들을 모두 인정하고 맞이하는 추세였습니다.
또, 당시 사람들은 언제 어느 곳에서나 신들을 숭배했습니다. 정치나 사회생활처럼 종교를 또 하나의 영역으로 구분은 현대의 개념입니다. 그들의 전 영역이 과히 종교적이었습니다. 출산, 식사, 여행과 같은 일상적인 활동을 비롯해 길드나 사교 단체 모임이라든가 시의회 공식 회의에서도 관련된 신들에게 적절한 예를 표했습니다. 물론, 동시에 여러 신들을 섬긴다고 해서 다른 신이 역정을 낼 것이라고 염려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러 신들에게 예배하기를 대놓고 거절하는 행위는 비정상적이고 반사회적으로 보였고, 심할 경우 불경스럽고 반종교적인 짓으로 여겨졌습니다.
로마 시대의 종교적 신앙과 초기 기독교의 입장이 특히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이 바로 ‘우상’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신들을 모신 장소가 곳곳에 있었고, 일상에서 신을 숭배하는 의례가 넘쳐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기독교인들이 들키지 않고 그 모든 의례를 ‘기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여러 신을 숭배하는 자리에 함께하자는 사람들의 권유를 자주 ‘거부’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 그만큼 사람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가까운 지인들과 관계일수록 조심스러웠을 것입니다. 로마인들의 신을 경배하는 경건이 기독교인들에게는 우상을 숭배하는 심각한 불경죄였기에 거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서 유대인들은 그래도 이교도들에게 그리 큰 핍박을 받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유대인들은 자기들 안에서 머물기에 로마는 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이교도였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문제는 유대 기독교인보다는 이방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들은 한 때 다신교도였습니다. 이들은 로마의 신들을 숭배하지 않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것이 자기 민족의 전통적 특성이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로 회심하기 전 이들은 다른 이교도들처럼 가족이나 친구, 혹은 여러 지인들과 더불어 전통적인 신들을 숭배하는 제의에 기꺼이 참여했던 자들입니다. 어쩌면 불과 한 달 전이나 한 주 전에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여러 신에게 올리는 제사에 참여했을 이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의 신자로서 세례를 받고 나서는 이방 신을 숭배하는 행위를 중단해야 했습니다. 그것도 철저히 말입니다.
기독교로 개종한 자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교리를 받아들인 신도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집안의 수호신이나 거주하는 도시와 제국에서 섬기는 신들에게 동물 제사를 바치던 행위를 그만둬야 했습니다. 교회의 일원이면 그래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교도인 동족이 보기에 갓 개종한 이방인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태도는 몹시 갑작스럽고, 제멋대로이며, 유별나고, 이치에 맞지 않는 변덕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당시 대중에게 다른 신들을 이처럼 철저히 배척하는 태도는 전례가 없는 일이어서 이를 납득하지 못했을 테고 깊이 우려하는 이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이교도들이 보기에 유대 민족이 아니라면 로마의 신들을 거부할 정당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런 배타적인 태도를 보인 기독교 개종자들은 특히 그들의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들로부터 거센 반대에 부딪히고 괴롭힘도 당했을 것입니다. 일반 대중에게는 그런 행동이 종교적 변절이나 사회적 변절이자 반사회적 행위로 비쳤을 것입니다. 잘못하면 당국에 끌려갈 수 있는 사안이기도 했습니다.
즉, 과거 자신들이 섬겼던 신들에 대한 예배를 거부하는 이교도 출신의 기독교인들은 민족신을 제외한 다른 어떤 신도 숭배하지 않는 유대인들보다 훨씬 더 큰 반감을 샀습니다. 유대인들의 경우는 민족 고유의 특성으로 이해한다고 쳐도, 유대인도 아닌 자들이 조상 대대로 섬겨온 그 자신의 신들을 거부하고 의무를 팽개칠 아무런 이유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로 귀화한다면 그나마 나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무신론자로 불렸습니다. 왜냐하면 신의 형상을 새긴 신상도 없고, 제단이나 제사도 없고, 제사장, 신전, 사당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종교의 영역이었던 사회에서 극심한 박해는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장 가까운 사회에서, 마을에서, 가정에서 외면 받았을 터인데 왜 그런 선택을 하였을까요?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엄청난 따돌림을 받을게 분명한대도 왜 그런 선택을 하였을까요?
로드니 스타크는 이 점을 사회과학으로 풀려고 하지만 래리 허타도는 이 점을 신앙이라고 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당시 신들과는 다르게 형상이 없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초월적 존재인 하나님을 어떠한 형상으로도 적절히 나타낼 수 없다고 성경(딤 6:15-16; 출 33:12-23; 신 4:15-20)을 말합니다. 이 점이 이교도의 신과는 전적으로 달랐는데 그런 절대자와 사람들이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얼마나 기이한 주장일까요.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이야말로 마땅하고 합당한 유일한 예배라고까지 합니다. 그런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고 놀랍게도 적극적으로 각 개인의 구원과 화해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점은 그 이유가 하나님이 세상과 인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바로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내어줌으로써 각별한 사랑을 드러내셨던 겁니다(롬 5:1-11; 8:31-39).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 개념이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는 얼마나 기이하고 우스꽝스럽게 받아들여졌을까요.
고대 이교도 사상가들은 신의 사랑을 말할 때 자주 썼던 단어가 에로스와 필리아였습니다. ‘에로스’는 에로틱한 사랑이 아니라 신성한 존재에게 긴밀한 유대를 느끼려는 욕망입니다. ‘필리아’는 호의를 받은 신들이 베푸는 친절과 축복을 말합니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고, 하나님과 이웃뿐만 아니라 원수들에게 보여야 하는 사랑을 언급하기 위해 선호했던 단어는 ‘아가페’였습니다. 이교도 문헌에는 이 단어가 드물게 등장하지만 기독교 문헌에서는 자주 등장합니다. 아마 이교도들이 말하는 신에 대한 사랑과 구별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렇듯 초기 기독교는 로마의 여느 전통적인 신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고, 인간의 머리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인 절대자인 유일신을 상정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위대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 유일신이 모든 신들보다 뛰어나며 홀로 만물을 지은 창조주일 뿐 아니라 대속적인 사랑을 통해 세상과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세웠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가장 미천한 인간이라도 이 유일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으며 마치 아버지와 아들처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주장은 이교도들에게는 가소로운 소리였습니다. 이교도 비평가들의 눈에는 이러한 신념체계가 터무니없어 보일지라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습니다. 바로 이 점을 신약학자 허타도는 기독교가 발흥하는데 가장 큰 부분이라고 합니다.
이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는 1-3세기 동안 지속적인 박해를 받아왔습니다. 물론, 매번 심한 박해는 아니었지만 래리 허타도가 말한 대로 사회적으로 갈등을 매번 유발했음은 분명합니다. 그것이 당시 이교도 사회에서는 부정적 시선으로 보였음을 틀림없었습니다. 로드니 스타크의 방법론에는 크게 동의되지 않지만 그가 주장한 바는 대단히 매력적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사상과 행동이 기독교의 발흥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입니다. 대표적으로 우리는 역병과 여성의 신장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발흥은 역시 래리 허타도가 주장한 바대로 신앙이 아니었을까요? 하나님과 나 사이의 그 신앙이 결국은 이교도 사회의 여러 곳에서 구현되어졌고 결국 로마라는 힘의 제국이 넘어졌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삶을 살펴보고 저는 저의 삶을 살펴봅니다. 과연 나는 그렇게 살 고 있을까요? 과연 모든 사회로부터 버림받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을까요. 너무나 평화로운 시대입니다. 물론, 이 시대 가운데에서도 보이지 않는 실랑이가 있습니다. 저는 사역자로서 오히려 일반 직장을 가진 분들과는 이점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역자는 사역자 나름대로 내면적 싸움이, 다른 분들은 외부적 싸움이 클 것으로 보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의 현장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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