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낀 점
로완 윌리엄스는 학자 출신이다. 그의 이력은 화려하다. 캠브리지와 옥스퍼드에서 교수를 했다. 또, 그 두 학교에서 명예박사를 받았다. C. S. 루이스 평전에서 맥그라스(옥스포드 교수)가 말했지만 라이벌 의식이 강해서 보통 옥스포드에서 교수를 하면 캠브리지에 교수를 못하고 캠브리지에서 교수를 하면 옥스포드에서 교수를 못한다. 근데 윌리엄스는 그 두 학교에서 교수를 했을 뿐 아니라 명예박사를 받기까지 했다. 그의 학술서는 우리나라에서 번역할 실력이 있는 사람이 없어서 못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로완 윌리엄스는 캔터베리 대주교이기도 했는데 그래서 스펙이 너무 높다라는 말까지.
요즘 그의 대중서들이 많이 출간된다. 청어람에서는 아에 윌리엄스를 대상으로 북토크 주제를 잡았는데 위의 정보들은 거기서 알게된 내용이다.
삶을 선택하라는 그가 켄터베리 대주교로 있을 때 설교했던 내용이다. 영국의 주교급이면 하원의원이었나 상원의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실 톰 라이트가 더럼의 주교였는데 국회의원급이다;; 그런 주교들의 대장이 아니 전 세계 성공회의 수장이 켄터베리 대주교인데 그의 설교는 단순히 대형교회에서 한 설교 수준이 아닌 것이다. 부활절과 성탄절 설교는 BBC에서 생방송된다. 우리로 비교하자면 그나마 국가조찬기도회랄까?
공적영역에서 로완 윌리엄스의 설교
그래서 그의 설교는 공적영역이 많이 드러난다. 전쟁이나 테러, 가난같은 주제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는 세상 속에서 기독교는 무엇인가 설교를 한다. 가령 (영국사회에서 전문식에 종사하는 이가 공공장소에서 십자가 목걸이를 착용할 권리를 두고 법정 다툼을 벌이는 사건을 두고)
십자가에서 우리가 본 분이 하느님이며 그 하느님은 끔찍하게 버림받고 죽음에 이르셨음에도 이를 넘어서 여전히 자비와 삶의 변혁, 생명을 약속하시는 분이라면 이러한 분을 공적 영역에서 여러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사회에서 언급하는 것, 그분을 향한 신뢰를 드러내는 것이 그토록 위협적인 일인가요?
그리스도교에서 십자가를 가리는 것은 인류의 궁극적인 비극과 패배하지 않는 사랑을 모두 가리는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그러니 옹졸하기 그지없는 관료주의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신앙,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넉넉히 떠맏으실 수 있는 하느님입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인간의 비극적인 현실을 감당치 못하는 사회를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도전을 받으면 안전지대에서 자신을 방어하는 사회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229)
이 세상에서 주어진 그리스도교의 기쁨, 곧 부활의 기쁨은 긴장과 고통, 혹은 낙심에서 벗어난 영구히 행복한 사회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기쁨은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든 간에 이 현실에서 더 깊은 차원이 있음을 확증합니다. 이 차원은 세계 안에 있는 또 다른 세계이며 사랑과 화해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세계입니다. 이 세계와 연결됨으로써 우리는 정직하고 용기 있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도전들에 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241)
종교의 사회적 가치가 다시금 인정받는다 해도 우리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해야 할 것이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임을, 예수를 살리신 하느님, 성 바울로가 되풀이해 말했듯 그분과 함께 우리도 일으키실 하느님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모든 비평가가 교회에 대해 찬사를 보낸다 할지라도(그렇게 되면 숨죽인 채 있지 않아도 되겠지만 말이지요) 우리가 해야 할 말이 있다는 것은 변치 않습니다. (253)
나가면서
이러한 내용들이 BBC를 타며 영국 모든 곳에 방송된다. 최근 조찬기도회가 끝나고 이런 말들이 나돌았다. '대통령이 설교하고 목사가 정치를 하네' 나 역시도 다 들었지만 그 설교자가 필요 이상으로 욕을 먹는 느낌이었다. 단지 그의 평소 이미지가 욕을 먹게 한 원인인거 같다. 못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메시지에서 차이가 났다. 그때 목사가 차라리 누구누구 였더라면, 누구누구 였더라면 우리 개신교의 수준이 그렇게 낮지 않다는 걸 보여줄 수 있었을텐데. 더 나아가 이게 복음이구나! 하는 걸로까지 나아갈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쉼움을 토로했다. 로완 윌리엄스였다면 오히려 대통령이 은혜 받았을텐데! 아쉽다. 대통령이 은혜 끼치는(?) 모양새가 만들어져서.
여튼, 번역가의 말로는 더 정확한 제목은 생명을 선택하라였다고 하는데 그는 그의 사회에서 생명이 무엇인지 설교했다. 아멘이었다.
책 맛보기
자신이 몸담고 있는 종교에 헌신하면, 그 행동은 우리를 둘러싼 이 세상의 전제와 관습에 일정한 균열을 냅니다. (26)
먼저 우리는 진실로 인류의 편에 서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인내심을 가지고 헌신해야 합니다. 정의를 이루기 위해 용기를 내고 희생해야 합니다. 폭력의 위협 앞에서,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화해를 이루려 몸부림쳐야 합니다. (34)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기념하는 예배에 담긴 신비를 불현듯 깨닫게 될 때, 복음을 통해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나눌 때,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총에 은총을 더하여" 받습니다. (37)
구약성서의 널리 알려진 구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그들을 선택한 이유는 그들이 가장 연약하고, 가장 무력한 공동체이며, 노예이자 추방된 이들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64)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사랑은 사랑을 받을 만한 대상에게 해야 한다고, 도움은 이익과 성취를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빠집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 그분은 모든 것을 주시며 우리를 자라게 하시고 우리를 보내셔서 그분의 이름으로 모든 이에게 그분이 하셨던 것과 같은 약속을 하게 하십니다. 어떠한 갈등이 있는 곳이든, 어떠한 죄를 지은 사람이든 말입니다. 모든 이에게 그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그의 온전함으로 우리는 모두 은총을 받습니다. (70-71)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께서 이끄시는 곳을 향해, 우리가 사는 세계의 역사 안에서 생명으로 이끄시는 하느님과 함께 궁극적으로 안식을 누릴 본향으로 향해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135)
성찬례는 첫 번째 부활절 예수의 제자들이 그랬듯 살아있는 예수를 만나도록 초대받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성서는 사제나 설교가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바람이나 이념을 드러내기 위해 활용하는 책이 아닙니다. 한 사회에서 그 궈위를 인정받는 법전이나 규정집도 아닙니다. 성서는 오늘날 인류와도 독특하고도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는 말의 모음입니다. 성서는 오늘날 인류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마주하게 해줍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서를 이루는 말 뒤에는 신성한 힘이 흐르고 있습니다. (178-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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