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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인문

[책리뷰] 서동욱 - 철학 연습[키르케고르(키에르케고르), 레비나스에 대해 간략 요약함]

by 카리안zz 2020.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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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철학자 서동욱 교수는 서강대에서 가르치고 있다. 프로필을 보니 루뱅대학에서 석사와 박사를 했다. 서강대 명예교수이신 강영안 교수님도 루뱅에서 석사를 하고 암스테르담자유대학교에서 철학 박사를 받으셨다. 처음에는 강 교수님께서 여기 석사출신이여서 루뱅 출신들이 많은가 싶었지만 보니 루뱅이 가톨릭 대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깐 서강대 입장에서는 루뱅이랑 가톨릭이라는 면에서 연관이 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루뱅대학교 철학과가 명성이 높던가. 여튼 서동욱 교수도 루뱅대학교 출신이여서 그런 생각이 들었고 반가웠다. 

 

 이 책은 현대 철학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하는 책이다. 그가 소개하는 철학자는 (스피노자, 키르케고르, 니체, 프로이트/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레비스트로스, 라캉, 푸코, 들뢰즈, 데리다)가 있다. 철학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씩 들어봤을 인물이다. 이 중에 레비나스랑 레비스트로스가 그나마 잘 이해가 됐다. 1부는 이렇게 철학자를 소개하고, 2부는 철학자의 시선으로 본 에세이랄까? 들뢰즈 전공자라서 그런지 들뢰즈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 사유가 어떤 건 재미있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하다. 어느 분께서 목회자는 철학자의 작품을 각개로 읽어나가기 보단 개론서 책들을 많이 읽는게 낫다고 했는데 나도 동의한다. 이 책 역시도 그렇게 참고해서 볼 만한 좋은 책이다.

 

 몇 명의 철학자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쇠얀 키르케고르(1813. 5. 5~1855. 11. 11) - 불안, 그리고 실존적 인간의 3단계(돈 후안, 소크라테스, 아브라함), 죽음에 이르는 병

 쇠얀 키르케고르의 중요한 개념 중에 ' 3단계설'이 참 유명하다. 먼저 키르케고르는 실존적 선택을 해야 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기분을 '불안'이라고 보았다(44).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불안이란 "불안은 자유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이다."라고 했다. 아담을 예로 들는데 아담은 선악과를 먹으면 선악을 분별하게 되고 죽게 된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께서 금지하셨고(법), 경고까지 하셨다. 그런데 이 금지에서 아담은 자유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비롯 법을 어기면 죽게 되지만 어길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게 '나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라는 불안한 가능성이다(44).

  이런 실존적 인간이 선택을 통해 자신을 실현해 나갈 수 있는 길을 그린 것이 바로 '3단계설'이다. 첫 번째 단계감성적 단계이다. 이 단계는 반성없는 즉각적인 삶이며, 어떤 선택도 없다. 선택은 없고 감각적인 것들의 지배가 있다. 선택이 없으니 선택이 불러올 삶의 질적 도약도 없다. 이 단계를 상징하는 인물이 감각적 충동의 화신인 '돈 후안'이다(45).

 두 번째 단계윤리적 단계이다. '보편적 이성의 법칙'을 따르며 도덕적 의무 등을 받아드리는 삶이다. 이성에 입각한 보편적 법에 따라 사는 것으로 이 단계는 요약할 수 있다. 그러니 이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했던 '소크라테스'가 상징 인물이다(45).

 세 번째 단계가 바로 '신앙의 기사'라 표현되기도 하는 신앙적 삶이다. 신과 관계한다는 것이 과연 이성의 보편적 법칙에 따르는 두 번째 단계와 어떻게 다를까?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듣는다. 이 때 두 번째 단계 차원에서 생각해보자. 보편적 법칙과 이성으로 이는 올바르지 않다(서동욱의 설명에서 합리적인 법의 차원에서도 올바르지 않다고 했지만 당시 고대 근동에서 인신제물을 합법이었다. 당시의 입장에선 합리적인 법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성적인 차원에서는 아니더라도. 그래서 나는 보편과 이성으로 말하겠다.) 이삭을 바치려고 했던 아브라함은 분명 윤리적 지탄의 대상이다. 키르케고르는 "윤리는 최고의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신과 단독으로 대면하는 절대적 관계에 비하면 말이다. '신과 마주하는 단독자'가 이 세 번째 단계의 삶이다. 상징 인물로는 아브라함이다(45-46). (예전에 이어령 선생님의 강의가 생각나서 덧붙인다. 이어령 선생님은 키르케고르를 언급하며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꺼내었다. 이때 비이성으로의 도약이라고 말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결국 키르케고르의 이 설명은 현대철학으로 하여금 법을 초월한 상위의 절대적 영역, 이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비밀'의 영역을 탐구하도록 이끌었다(48). 윤리 위의 것이 올바른 표현일까 아니면 윤리 넘어의 것이 올바른 표현일까? 어쨋든 이성의 한계를 말해주니 신앙인인 나로서는 뭔가 속이 조금 후련해 진다. 

 이렇게 철학자들의 중요 개념들을 설명하고 마무리 정리로 철학자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그중에 쇠얀 키르케고르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 부분을 옮겨 보겠다. 

keyword(실존, 불안, 반복, 신앙과 기사, 신과 마주하는 단독자)

...
<죽음에 이르는 병>(1849)에서는 실존적 인간을 바로 서지 못하게 하는 절망이라는 병을 다룬다. 절망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이나 타자와 잘못 관계하는 상황을 표현한다. 이 책은 절망을 극복하고 인간이 올바른 관계 속에서 자기 실존을 수립하는 길을 모색한다. 그것은 신 앞에 단독자로 서는 순간 가능해진다. (51-52)

 

에마뉘엘 레비나스(1906. 1. 12~1995. 12. 25) - 형이상학, 타자, 욕구, 욕망, (초월로서의) 출산, 무한, 타자의 현현, 얼굴의 저항

 레비나스는 형이상학이 생겨난 이유를 진정한 삶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진정한 삶이 세계 안에 없으니 우리는 마치 목마른 자처럼 세계 저 너머를, 이 세계와는 다른 곳을 바라본다고 했다. 레비나스는 이렇게 말했다. "형이상학은 '다른 곳'을, 그리고 '다르게', 또 '타자'를 향하고 있다."고 말이다. 형이상학(Meta-physics)은 문자 그대로 본다면 가시적이며 손에 쥘 수 있는 사물들의 세계, 즉 물리(physics)의 배후(meta)를 넘겨다보는 학문이다(121). 그래서 레비나스는 타자를 그토록 강조하는 것 같다. 

 형상학의 계보에서 보면 후설과 사르트르는 '의식', 하이데거가 '존재'에 몰두하며 현상학을 발전시켰다. 여기에서 레비나스는 '타자'라는 개념을 현상학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레비나스의 '타자에 대한 환대'는 데리다의 '환대의 정치학'이란 형태로 결실을 맺었다. 또, 그의 사상은 성서가 말하는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의 모습을 한, 고통받는 타자와의 마주침이란 어떤 것인가를 진지한 철학적 사유 속에서 살펴본 사상가이기도 했다(122). 

 

 세계 2차대전을 겪은 레비나스가 보기에 서양의 존재론은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하는 전체성의 철학이었다. 고유성을 무시했고, 타자를 전체성 속에서 파악하려는 것이 서양 철학을 지배하고 있는 사유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 통찰은 아우슈비츠에서 겪었던 경험에서 나온다. 레비나스가 보기에 서구 존재론은 타자를 나(동일자)로 환원하기에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나라는 동일자로 흡수되지 않는 절대적인 타자가 있음을 드러내고, 그 타자에 대해 가지는 윤리적인 책임성이 나의 나됨, 즉 나의 주체성을 구성하는 근본임을 보이는 것이 된다(124). 

 

자신에게 몰두하는 존재론. 슬픔을 달래고 죽음을 극복하기엔 충분치 않다

 진정한 삶이 부재하는 세계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저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대상을 먹거나, 우리에게 필요한 물건으로 바꾸거나, 또는 우리의 인식의 대상으로서 소유한다. 욕구하는 대상을 흡수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나에게 종속된 것으로 만든다. 한마디로 나는 미다스 왕처럼 온갖 타자를 자기 소유의 황금으로 바꾸면서 내가 주인인 세계를 구성한다. 자기보존 욕구를 타고난 존재자 일반은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게끔 되어 있다. 요컨대 존재자가 자기 자신에게 전념하는 것은 당여한 일이다. (125)

 레비나스는 자신이 세계의 주인이며 내 욕구에 따라서 세계를 즐기고 관리하는 존재 양식, 혹은 나 자신에게 몰두하여 끊임없이 나의 세계로 귀환하는 사유를 일컬어 '존재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시간은 슬픔을 달래고 죽음을 극복하기엔 충분치 않다." 세계 안에 모든 것을 자기의 소유물로 만든 자에게 찾아올 손님은 죽음밖에 없다(125).

 반면, 나의 세계로부터 떠나, 나의 바깥 혹은 나와 절대적으로 다른 자에게로 가고자 하는 사유를 일컬어 '형이상학'이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대상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욕구'와는 다른 '욕망'이 있다. 이 욕망은 플라톤이 말한 존재 너머에 있는 최고선의 이데아를 이야기했을 때의 욕망이다. 곧,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레비나스 철학은 나의 세계를 떠나 낯선 자에게로 가는 이 '초월'의 가능성, 바로 세계 저편으로 가는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숙고한다(125-126).  

 

출산의 형이상학. 아이를 통해 도래하는 무한의 시간

 형이상학과 초월은 어떻게 가능할까? 다양한 답이 있지만 그 중 하나가 '출산'이다. 나의 아이는 나이며 동시에 타인이다. '나의 자식은 나의 분신'이라는 일상어의 표현에서 잘 나타나듯 내가 죽은 후 세상을 살아갈 또 다른 나이다. 그러나, 아이는 예술품이나 책상과 같은 나의 작품이 아니며, 나의 소유물도 아니다. 그러므로 출산은 '지배'가 될 수 없다. 출산을 통해 도래하는 미래는 어떤 의미에서도 주체의 힘이 거머쥐고 지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레비나스에게 미래란 절대적으로 나의 영향권 바깥에 있는 시간이다. 왜냐하면 미래의 시간이란 나의 시간이 아니라 남의 시간이다. 즉, 출산을 통해 생겨난 내 '아이의 시간'이기 때문이다(126). 

 아이는 나이며 타인이기에, 나는 미래로 초월할 수 있는 것이며, 미래는 나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타인의 시간이면서도 여전히 나의 모험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나의 세계 저편의 낯선 곳을 건너다보는 일, 진정한 삶을 건너다 보는 일이 가능해진다(127). 

 

타자의 얼굴. 신은 고통받는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도래한다

 출산을 통해서만 나의 세계 밖으로 초월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을 통해서 가능하다. 우리는 타자를 사물로 인식하듯이 볼 수 있으며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고통받는 얼굴은 내가 어떤 식으로도 소유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나와 다른 자다. 그 얼굴은 나의 모든 능력에 반대하여 나에게 '저항'한다. 얼굴의 저항이란, 대상 세계를 소유하고 지배하려고 하는 나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나의 윤리적 행동을 촉구하는 '윤리적 저항'이다.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은, 가령 '살인하지 말라'고 나에게 명령한다. 타자는 나보다 높은 곳에 있는 나의 주인처럼 내가 윤리적으로 행동하기를 명령하고 나는 그 명령을 회피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식으로도 나에게 규정되지 않고, 오히려 나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나에게 명령하는 타자의 얼굴이란, 형이상학의 대상, 규정 불능의 무한자, 곧 신의 흔적과도 같다. 신은 바로 타자의 얼굴을 통해서 내게 말을 건넨다(128). 

 신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라는 맥락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고 레비나스는 봤다. 그러니 신이 도래하는 곳은 교회가 아니라 먼저 고통받는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신은 도래한다고 말할 수 있다. 레비나스의 초월 또는 형이상학이란 바로, 타자의 얼굴을 자신의 흔적 삼아 나타나는 무한자와 관계함을 말한다. 이 관계란, 내가 나에게 전념하는 세계를 떠나, 나와 전혀 다른 자에게로 가서 그를 위해 나를 종처럼 건네주는 일이다. 이렇게 레비나스는 형이상학, 초월, 무한자 등의 고전적인 개념의 의미를 윤리학적 맥락 안에서 새롭게 이해한다(129). 

 

나가면서

 이렇게 쇠얀 키르케고르, 에마뉘엘 레비나스에 대해서 살짝 맛보았다. 이 책을 정리하면서 레비나스에 대해 다시금 살펴보았다. 어찌보면 타자의 얼굴이라는 명칭이 멋져보여서 매료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윤리적 부분을 읽으며 지금의 내 생각과는 달라졌음을 확인한다. 레비나스가 생각하는 신의 존재를 아래로부터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가 주장했던 "반대로 인간적 상황이 신의 관념을 명백하게 해준다"에서 그렇게 유추할 수 있는 근거를 본다. 그는 "위대하고 전능한 존재의 현존"에서 신을 정의를 유추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래서 성서를 강조하고 싶다. 성서에서 전달되어진 하나님의 말씀, 행동, 그분이 개입한 인간의 상황들 속에서 레비나스가 말한 '신의 관념'이라는 것을 명백히 해준다고 믿는다. 나 역시 하나님의 속성을 단순히 열거하는 것에 그리 만족하지 못한다. 물론, 조직신학이라는 학문으로서의 이야기는 조금 달라지겠지만. 하여튼, 인간의 상황에 아무리 몰두하여도 나는 신의 관념을 명백하게 알 수 없다고 본다. 그 그림자라면 모를까. 오직 그분이 드러내 보여주셔야(계시) 우리는 그분을 알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다. 나는 확실히 전통적이 장로교 목회자이긴 하나 보다. 

 원래는 레비스트로스까지 소개하고 마무리하려고 했지만 역량이 되질 않는다. 우치다 타츠루가 쓴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깡 쉽게 읽기>에서 제목에 나오는 인물들을 구조주의 4인방으로 소개했다. 하지만 저자인 서동욱은 위의 네 사람을 구조주의자라고 한 번에 묶는다면 구조주의라는 개념이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고 말한다(140). 그 이유는 한 번 책을 살펴보길 바란다. 

이 책에선 위의 간략한 요약에서 살짝 맛볼 수 있듯이 다양한 현대철학자들을 소개했다. 목록에서 관심이 있는 철학자가 있다면 한 번 읽어보면 유익할 듯 하다. 추천한다. 

 

 


 

 


책 맛보기

 

'불안'이란 바로 이렇게 나의 자유만이 모든 가치의 근거라는 데서 생겨나는 정서이다.(요컨대 불안은 늘 "자유 앞의 불안"이다.) - 장 폴 샤르트르 편(100)


우리는 결코 아무런 내용으로도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텅 빈 의식 같은 데서 출발하지 않는다. 애초에 우리는 피할 수 없이 충만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 모리스 메를로 퐁티 편(111)


결국 차별은 자기가 가진 척도를 타인에게 강요하고, 그 척도에 맞추어 타인이 지닌 가치를 열등성의 편차에 따라 위계화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요컨대 '타자 없는 세계', 자신의 이상과 가치만이 절대화된 세계가 차별의 세계이다. 그리고 이런 차별은 역사 속의 저 식민지 시대 같은, 우리와 멀리 떨어진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에 반해 '차이'란 열등성이나 우월성의 편차에 따라 짜인 위계적 질서가 없는 '다양성'을 뜻한다. '차별'의 상태 속에선 타자를 내가 가진 척도에 따라 규정하고 판단한다. 이와 달리 '차이'란 자신이 지닌 어떤 가치도 타자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지 않고, 오로지 '너는 나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서 성립한다. 여기서 '나와 다르다'가 지니는 함의는 무엇인가? 바로 '너는 나의 것과 다른 너의 고유한 가치들을 지니고 있으며, 그 가치들을 따라 살아가는 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243)


즉 권력은 우리 삶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개입하기 위해서 바로 지식이라는 안내자의 인도를 받으며, 지식을 대리인 삼아 우리 신체를 순응적인 형태로 창조한다. 푸코는 주로 역사의 장면들 속에서, 들뢰즈는 주로 당대의 정치· 사회적 현장 속에서 어떻게 권력이 지식을 통해 신체에 접촉하는지 포착해보려는 것이다.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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