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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새벽설교

[설교문] 사도행전 16장 19-40절(행 16:19-40, 행 16:19~40)

by 카리안zz 2020.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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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도시가 나옵니다. 그 도시는 빌립보인데 이 도시에 대해서 조금 안다면 우리는 본문을 이해하는데 한결 더 쉬워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보다 조금 앞인 1612절에서는 빌립보를 마케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빌립보 사람들은 우리가 아는 식민지 사람들과는 다르게 반응합니다.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였을 때는 3.1운동을 위시해서 저항을 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사람들은 저항은커녕 되려 로마를 대단히 자랑스레 여깁니다.

어느 정도로 심했냐면 유대인들의 회당조차 없다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 유대인들의 회당은 반드시 있는데 빌립보에는 회당이 없었습니다. 왜 이렇게 로마를 자랑스럽게 여겼는지는 이 도시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꽤나 복잡한 사연이 있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그 유명한 시저와 원로들이 정치적 분쟁에서 시작을 합니다. 원로의 대표선수는 브루투스였고 시저의 대표선수는 안토니우스와 안토니아누스 두 장군이 격돌하였습니다. 결국 승리는 시저 쪽인 두 장군이 이겼는데 양두정치가 시작되었던 겁니다. 이제 전쟁에 이겼기에 승리 수당이 주어지는데 그 승리 수당이 바로 빌립보 도시였습니다. 황무지에서 로마의 군인들이 땅을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에 승리한 군인들이었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로마를 세웠다는 것에 아주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를 자신들이 세웠다고 할만큼 자부심이 있는 도시에 바울이 들어갔던 겁니다. 그들은 입만 열면 자신들의 아버지때 그 찬란했던 전쟁에서 이겼던 이야기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빌립보는 유적을 탐방해보면 도시 곳곳에 로마의 문화와 시저의 이데올로기가 건물들에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그들의 삶의 토대를 무너트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빌립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본문 20-21절 말씀인데 새번역성경으로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인데, 우리 도시를 소란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로마 시민인 우리로서는 받아드릴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는 부당한 풍속을 선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빌립보는 세계 최강의 제국이라는 로마의 행동대장격인 도시입니다. 로마를 사랑하고 흠모하다 못해 온 도시가 건물속에서도 그 흔적을 남겼던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제국 권세 속에서 살아가지지만 죽어가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 중에 한명이 바로 귀신 들린 여자입니다. 귀신들려서 삶의 모든 부분이 피폐해진 여인입니다. 이 여인을 바울이 예수의 이름으로 고쳐주었을 때 그 여인은 삶의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을 하나의 생명이 아니라 돈벌이의 수단으로 여겼고 마치 돈 버는 기계로 여겼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찬란한 로마를 추앙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죽으려고 했던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간수입니다. 결국, 그들에겐 생명이었던 돈을 빼앗은 바울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납니다. 한 밤중에 일어난 큰 지진으로 인해 간수는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간수는 깨자마자 즉각적으로 감옥을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감옥 문들은 다 열려있고, 죄수들은 당연히 기회를 틈타 도망친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로마 군인으로서 이상적인 의무와 훈련이 몸에 밴 그는 이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명예로운 방법은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자살이었습니다. 로마의 제국을 상징하는 군인은 결국 죽음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로마의 권세는 계속 이렇게 죽음을 몰고 다닙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에게 구원이 임합니다. 바울을 통해서 그는 복음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은 그가 죽으려는 찰나에 큰소리로 그대는 스스로 몸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모두 그대로 있소하고 외쳤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그는 로마의 길이 구원의 길이 아님을 깨닫고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오늘 분문 사도행전 1631절입니다. 다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1631절말씀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로마의 체제 아래에서 그는 죽어야 했지만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그는 살았습니다. 오늘 간수뿐만이 아닙니다. 앞서 나왔던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의 체제 아래에서는 물건취급과 돈 벌이의 수단일 뿐으로 죽어가고 있었지만 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의 이름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이천년이 지난 지금 로마의 권세는 사라졌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었던 것처럼 마치 자신들이 전지전능하다고 생각한 로마 역시도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이 사이의 기간 동안 무수히 많은 로마들이 있었습니다. 그 로마들의 특징은 자신들의 힘으로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다고 여긴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엄청난 문명의 발달을 겪었습니다. 얼마 전 올림픽 개회식을 보셨습니까? 특히나 오륜기를 구현할 때 정말 놀랐는데 저는 처음에 그게 컴퓨터 그래픽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어마한 수의 드론이 실제로 구현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대단한 기술 발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술발전이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해 줍니까? 과학의 발전을 통해서 우리가 영생을 얻었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는 기술발전의 첨단을 달리고 있는 나라입니다. 사회역학자인 김승섭 교수는 의료기술의 발전으로 엄청난 성과를 얻었지만 의료기술의 발전만으로는 충분한 해법이 나올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더라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은 있더랍니다. 기술이 발전했지만 결국 일찍 죽는 사람들을 보니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 소득이 없는 노인, 차별에 노출된 결혼이주여성 같은 분들이었습니다. 최근에 의사인 이국종 교수도 이 주제로 강의한 걸 들었습니다. 병원에서 빨리 죽는 사람들을 보니깐 다 빽도 줄도 없는 사람들이더랍니다.

 

결국, 인간이 다스리는 이 땅에서 완전한 나라는 없습니다. 생명을 온전히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저마다 각자 길을 제시하는 이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갈 길을 비춥니다. 예수의 이름에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에는 생명이 있고, 살아남이 있습니다. 수많은 로마의 황제들은 살아졌지만 예수의 이름은 여전히 남아 우리는 예배하며 믿고 있습니다. 오늘 마치 권세있는 것들이 예수의 이름보다 커 보일지라도 여전히 예수의 이름은 생명을 주고 영원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역시 예수 안에서 예수님의 길을 걸어가며 더욱 예수님을 닮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제국의 권세 아래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았습니다. 제국의 겉모습은 찬란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곳에서 거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지 알았습니다. 주님, 그러나 그곳에서 영혼들은 죽어갔습니다. 하지만 죽어가는 영혼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 역시도 옛 로마의 모습이 얼핏얼핏 보입니다. 불을 꺼지지 않고 찬란하며 마치 모든 것들을 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집니다. 멀리서 보면 희망차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아픈 곳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곳에서도 역시 복음이 선포되길 원합니다. 예수의 이름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옵소서. 예수의 이름에 생명이 있음을 바울을 통해 선포되었듯이 오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도 역시 선포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이 가셨을 길을 우리가 걸어가며 더욱더 예수님을 닮아가길 원합니다. 주여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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