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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새벽설교

[설교문] 예레미야 3장 1-5절(렘 3:1-5, 렘 3:1~5)

by 카리안zz 2020.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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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앞선 2장의 고발에 대한 대답으로 볼 수 있습니다. 2장의 고발에 따르면 유다는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기는 혼합주의의 늪에 깊이 빠져 자신의 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 가지 궁금증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첫째, 유다에 구원 가능성이 있는지 둘째,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좇는 유다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이 가능한지, 셋째, 유다가 돌아올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들을 받아주시겠는가 하는 물음들이 대표적입니다.

3장은 여기에 대한 답변입니다. 첫째 단락인 1-5절은 두 가지 근거에서 하나님과 유다의 화해가 불가능함을 주장합니다. 먼저 하나님과 유다의 재결합은 법적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신명기 24:1-4을 본다면 재혼 금지에 관한 규정이 있습니다. 여기에 따르면 이혼하고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됐던 여자는 처음 남편에게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제가 한번 신명기 244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으므로, 그를 내보낸 첫 번째 남편은 그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일 수 없다. 이런 일은 주 앞에서 역겨운 일이다.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유산으로 주신 땅을 죄로 물들게 해서는 안 된다.”

남편이신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남자 곧 우상과 놀아난 유다를 다시 아내로 받아들이는 것은 신명기 율법에 위반됩니다. 다음으로는, 유다의 일방적 자기중심적인 하나님 이해가 재결합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유다가 이해하는 하나님은 돌아가기만 하면 언제나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무 때나 찾아가도 쌍수를 들고 환영해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유다의 돌아감에는 신실함과 진정성이 없습니다. 과거와의 근본적인 단절 없이 가볍게 하나님께로 돌아갔다가 다시 쉽게 하나님에게서 돌아선 것입니다. 한마디로 유다의 돌아감은 거짓입니다. 적어도 1~5절의 고발에 따르면 하나님과 유다의 화해는 물 건너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유다 쪽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끝난 것은 아닙니다. 뒤따르는 단락들은 하나님의 결정으로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각절로 한번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절에는 하나님께서 유다가 잘 알고 있는 율법을 활용 이들의 음행을 고발하십니다. 서두에도 언급되었지만 1절의 근거는 신명기 241-4절의 금지된 재혼규정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 규정을 따르면 재혼했다가 혼자가 됐거나 다시 이혼한 여자는 처음 남편에게로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한 일은 약속의 땅을 죄로 더럽히는 가증한 짓입니다. 유다의 우상숭배는 처음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로 가버린 행위와 같기 때문에 여호와 유다의 재결합은 율법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앞 장인 27절을 본다면 배교와 우상숭배로 인해 유다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으로 주신 상속재산을 더럽히고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후반절은 유다의 뻔뻔스러움을 고발합니다. 많은 애인들과 음란을 즐기다가 다시 본남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지 유다는 깨닫지 못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우상들과 놀아났기 때문에 본인들이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 인식조차 하지 못합니다. 유다의 생각에 따르면,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기에 아무 때나 돌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사실 유다의 우상숭배는 법적으로 이혼하지 않았음에도 애인들과 행음하는 것이기에 간음에 해당합니다.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놀아난 여자가 죽음의 징벌에 넘겨지듯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한 유다도 멸망의 심판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2-3절을 본다면 유다의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께서 상속재산으로 주신 가나안 땅이 더렵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의 일부 지역에 국한된 타락이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입니다. 우상을 찾아가는 자들로 모든 산이 불결해졌습니다. 유다는 일찍부터 산의 푸른 나무 아래에 산당을 차려놓고 우상들에게 제사를 드리며 풍요를 기원했습니다. 출애굽과 언약의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가나안에서 알게 된 바알이나 아세라와 같은 우상들에게 풍요를 구했습니다. 가나안의 모든 산이 우상숭배자들로 헐벗은 산이 됐다는 고발은 이중적입니다. 일차적으로는 산당을 찾아 산을 오르내리는 자들이 너무 많아 산이 헐벗을 정도였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께는 무관심하고 산당의 우상들에게는 열심이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산당의 풍요제의가 산당이 자리 잡은 산들을 헐벗게 만들었습니다. 풍요와 번성을 바라며 산당에서 우상들에게 제사를 드린 결과로 나무들이 죽고 산이 황폐해졌습니다. 산당 제의가 죽음을 가져다주는 헛것임을, 그리고 산당 제의에 빠진 유다가 모든 것을 빼앗기고 헐벗은 산처럼 될 것을 시사합니다.

유다의 우상숭배는 심각성에서도 한계를 넘었습니다. 음란에 사로잡힌 유다는 길가에 앉아 욕정을 해소해줄 여자 또는 남자를 기다렸습니다. 수치심을 상실하고 거리에서 호객행위를 하는 창녀처럼 유다는 대놓고 여자와 남자를 찾아다닙니다. 풍요를 바라며 산이 헐벗을 정도로 열심히 산당을 찾았는데, 결과는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단비가 거두어지고 늦은 비도 내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가나안의 농사는 거의 전적으로 비에 의존했기 때문에 때에 따라 내리는 비는 식물의 성장과 결실에 결정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로 더러워진 땅에 비를 금하심으로써 땅의 결실을 누가 주관하는지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가나안의 신 바알이 아니라 출애굽과 광야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단비와 늦은 비를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3절 하반절에서 5절을 보면 유다의 우상숭배를 징계하려고 하나님께서 비를 금하셨지만 유다는 이를 깨닫지 못합니다. 오래전부터 혼합주의에 빠져 살아온 유다는 가나안을 휩쓴 가뭄에서 하나님의 경고를 읽어내지 못합니다. 문자적으로 창녀의 이마를 의미하는 창녀의 낯은 징계를 받아도 회개하지 않는 유다의 완고함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직업적인 창녀가 된 유다에게 수치는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린 단어였습니다. 뻔뻔한 유다는 창녀같은 행위들을 즐기면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합니다. 가나안의 풍요제의에 빠져 산당을 오르내리면서도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나의 청년 시절의 보호자로 부릅니다. 하나님은 유다가 우상을 숭배하고 언약을 깨뜨렸다고 고발하시는데 유다는 언약 관계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유다가 옛적부터 당신의 구속을 싫어해 떠났다고 고발하시는데 유다는 여전히 그분의 보호 아래 있다고 믿습니다.

유다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출애굽과 시내산의 하나님이 아니라 유다가 원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나의 아버지로서 나의 청년 시절의 보호자로서 유다가 부르면 언제라도 달려와 도와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에게 하나님의 진노는 별다른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유다에게 하나님의 진노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습니다. 때가 되면 풀어지는 노여움이었기 때문에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분의 노여움에 관해 심각하가 되돌아볼 이유가 없었습니다. 우상숭배에 화가 나셨을지라도 돌아가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받아주실 것이기에 유다의 돌아감에는 철저성과 진정성이 없었습니다. 유다의 일방적이고도 자기 중심적인 하나님 이해가 죄에 대한 영적 감수성을 완전히 마비시켜 더 깊은 혼합주의의 늪에 빠진 겁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유대의 생각을 보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분이시기에 내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시고 내 마음대로 해도 다 용서해주실 분이시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은 이용대상이며 어떠한 사랑의 마음도 없으며 그저 내 마음대로 이용 가능한 존재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주 격하시켰으며 무뎌진 마음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오늘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우리 또한 그 마음이 굳어지지 않았나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어쩌면 오늘 나도 마음이 무뎌지진 않았는지 나도 하나님을 이용만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러한 죄악의 마음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을 내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사랑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 구하는 오늘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도 마음이 굳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았습니다. 굳을 때로 굳어져서 하나님을 별볼일없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로 격하시켰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관심도 없고 사랑도 없었습니다. 다른 것을 사랑했으면 다른 것에 눈이 팔려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오늘 말씀을 보면서 나 자신을 돌이켜 봅니다. 오늘 이스라엘 유대인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이용가능 대상으로 또는 내 소원을 이뤄주는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나 돌이켜 봅니다. 주여 죄인을 용서하여 주시고 악 가운데로 빠지지 않게 성령님 도와주십시오.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연약합니다. 성령님 우리의 마음을 꼭 붙잡아 주시옵시고 붙들어 주시옵소서. 우리의 힘으로 이길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압니다. 성령님 오늘 하루도 의지합니다. 오늘도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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