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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새벽설교

[설교문] 예레미야 10장 17-25절(렘 10:17-25, 렘 10:17~25)

by 카리안zz 2020.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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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예루살렘은 적들에게 에워쌓여 있습니다. 항복을 하던 함락을 당하던 적들에 사로잡히기 직전입니다. 그래도 아직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 포로로 끌려갈 것을 대비하여 짊을 꾸려놓으면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예전 앗수르왕 때 극적으로 구원받은 일을 다시 기대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이번에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대적에게 넘겨주기로 여호와께서 확고하게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용사나 목자가 적이나 짐승을 향해 물매로 돌을 던지듯이 여호와께서 주민들을 단호하게 내던지십니다. 먼 이방 땅으로 쫓겨나는 유례없이 혹독한 재앙입니다. 여호와로부터 오는 괴로움이기에 이를 피할 길도 없고 그분께 도움을 간구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19절부터는 이미 포위가 끝나고 유배지로 쫓겨나는 장면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앞에서 선포한 위협이 현실화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대변하는 자가 이 처참한 현실을 탄식합니다. 그 고백은 19절에 절절하게 나타납니다. 회복을 기대할 수 없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는데 고통을 호소할 데도, 도움을 요청할 데도 없습니다. 자신이 짊어져야할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모든 것이 절망적입니다. 예루살렘의 처지는 사납게 휘몰아치는 폭풍우나 적들의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줄이 끊어지고 휘장이 찢겨, 완전히 훼손된 장막보다 더 참담합니다. 파괴된 장막은 수선하거나 새것으로 다시 세우면 되지만 자녀가 모두 떠나버리고 아무도 없는 예루살렘은 재건이 불가능합니다. 예루살렘은 전쟁으로 폐허가 됐을 뿐만 아니라, 그 주민도 모두 떠나거나 사로잡혀 갔습니다. 회복을 소망해볼 만한 싹조차 남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가 입은 중상은 치료할 수 없는 자신에게 화를 선포하며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부상입니다.

21절 이후에는 멸망의 원인을 알려줍니다. 그 원인은 목자와 양의 이미지를 사용해서 알려줍니다. 목자와 양 떼를 구분해서 양 떼가 흩어진 책임을 목자에게 묻습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이 여호와의 의지를 묻지 않고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따라 유다 백성을 멸망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위정자들의 어리석음과 불순종이 백성을 사방으로 흩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그 백성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심판의 선고와 탄식과 심판의 원인으로 이어졌는데 그 다음은 다시 한 번 심판을 선고하는 말이 나옵니다. 17절의 예루살렘은 적들에 포위당했고, 20절의 예루살렘은 이미 함락당해 그 주민들이 유배를 떠났습니다. 22절의 적들은 아직 북방에서부터내려오고 있는 중입니다. 전쟁의 진행 순서에 따르면 22절이 먼저 와야 합니다. 아마도 17-21절이 예루살렘에만 관심을 두기에 유다 성읍들의 황폐함을 언급하는 22절을 보충한 것 같습니다. 적들이 북쪽에서 내려오는데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이 땅을 뒤흔드는 무시무시한 말발굽소리와 함성을 뒤로하며 거침없이 진격해 옵니다. 이들의 원정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유다의 성읍들을 황폐하게 해서 승냥이 소굴로 만드는 겁니다. 예루살렘이 찢기고 무너진 장막처럼 되듯이 유다 성읍들도 사람이 살 수 없는 폐허가 됩니다.

23~25절은 간구의 기도를 드립니다. 19-20절의 경우에서 말하는 사람이 다시 등장하지만 동일한 인물은 아닙니다. 19-20절의 말하는 사람은 예루살렘이 직접말하는 거였다면 23~25절은 예언자가 말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본문은 예언자의 사적기도가 아닙니다. 심판을 당한 이스라엘 백성이 드려야 할 기도입니다. 예언자는 이 기도를 통해 멸망의 시대를 사는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는 먼저 지혜문학의 가르침으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은 사람이 자기 길의 주인이 아님을, 길을 걷는 자가 자기 발걸음을 정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기지만 이를 온전히 통제하지는 못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삶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때도 있지만 제 운명을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여호와만을 유일한 결정권자로 인정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찾지 않은 어리석음은 자신을 최고 결정권자로 간주한 유다 백성의 교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계획을 신뢰하였고,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스스로의 능력에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결국 그 교만의 대가로 멸망의 늪에 빠졌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과거의 잘못을 뼈저리게 깨닫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을 결정하시고 이를 그대로 실행하신 분께서 앞으로의 운명도 결정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이스라엘은 멸망과 유배를 하나님의 공의로운 징계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미래를 철저하게 그분께 의탁해야 합니다. 적어도 일부에서는 하나님 백성의 멸망과 유배를 하나님의 무능력과 패배로 돌렸던 거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파국의 원인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과거의 극복 없이는 새로운 시작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완전히 소멸할 수밖에 없기에 너그러이 채찍질해 주시길 간구해야 합니다. 공의로운 징계의 구체적 의미는 분명하지 않지만 진노와 공의를 구별해서 전자는 완전한 멸망과 관련하고 후자는 징계와 관련해서 사용합니다. 아마도 진노는 심판받은 자들에게 지속해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부정적 작용력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초라해진 야곱은 주변 민족들의 좋은 먹잇감이었습니다. 탐욕스런 민족들이 약탈하거나 침략해 들어오지만 야곱에게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땅에서 사라질 위험에 처한 야곱에게는 여호와의 개입만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자신과 관련해서는 너그럽고 공정한 징계를 호소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민족들에게 당신의 분노를 쏟으시길 간구합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야곱은 민족들의 우상을 헛것으로 선포하는 단락의 마지막 절인 16절에 연결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분깃이시고 이스라엘은 그의 기업의 지파이기에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려는 민족들은 여호와의 소유를 탐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야곱의 몫에 대한 보복을 반드시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람의 길이 자기 자신에게 알았던 이스라엘에게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도 자유라는 미명하에 자기의 결정이 가장 위대하다고 절대자도 절대선도 없으니깐 우리가 선택하는 그것이 절대선이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달콤한 말이지만 우리는 그 길의 끝이 어떨지 상상이 갑니다. 인간을 그렇게 신뢰했던 끝이 어땠습니까? 세계 2차 대전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가장 최선이라면 지금의 전쟁의 위기는 어떻게 설명이 가능하겠습니까. 인간의 문명이 위대해 보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우리에게 불안이 늘 가까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도 그 끝이 어떠며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 어디인지를 알려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나 주님을 의지합시다. 우리는 실패하고 졌으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셨습니다. 그분의 뒤를 따라갑시다.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우리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추석 명절 가운데 주님 앞에 나와서 기도로 시작을 합니다. 오늘 말씀에 주어진 멸망의 이유는 이스라엘의 교만과 오만 때문이었음을 들었습니다. 이 죄는 이스라엘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는 죄임을 고백합니다. 실로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의 역할을 자처하고 우상의 자리에 오르는 모습을 봅니다. 위대한 문명을 이룩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구멍들이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주님, 지금도 여전히 구원이 필요함을 고백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로 가길 원합니다. 성령님,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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