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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새벽설교

[설교문] 사도행전 9장 10-19(상반)절(행 9:10-19, 행 9:10~19)

by 카리안zz 2020.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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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는 대표적인 등장인물이 두 명 나옵니다. 한명은 바울이고 나머지 한명은 아나니아입니다. 오늘 본문에 비춰 본다면 바울은 극심한 혼란 중에 있었을 겁니다. 큐티 묵상에 써져 있듯이 그는 극심한 혼란 중에 기도를 합니다. 평생의 확신이 그릇된 것으로 판명되었고, 그 확신으로 쌓아왔던 삶의 공든 탑이 무너졌습니다. 보지 못하고 먹지 못해 철저히 무기력해 졌을 때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기도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순간에 아나니아가 등장합니다. 누군가는 아나니아를 기독교 교회의 잊혀진 영웅들 중 하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아나니아에 대해서는 오늘 본문 말고는 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본문들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만으로도 충분한데 그는 신자였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알았고, 매우 위험해 보이는 일에도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보냄 받은 곳으로 가서 지시받은 대로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명령을 받은 아나니아는 주님께 반문을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울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였기에 그랬습니다. 사실 다소의 사울이 다메섹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분명 사울이 그리로 가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이 직접 성질 급한 젊은이에게 특정 임무를 수행할 권한을 주는 일은 흔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그 임무는 저 멀리 다른 나라에 있는 회당을 급습해 이 위험천만한 이교를 따르는 사람들을 색출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바리새인으로서 사울은 아무런 권한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대중을 대변하는 압력단체였지, 공식 권한을 가진 집단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율법에 대한 열심이 대단했던 사울은 대제사장이 예상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많은 권력자들이 그렇듯 대제사장 입장에서는 기꺼이 나서서 지저분한 일을 해주겠다는 사람이 분명 반가웠을 겁니다.

그렇기에 아나니아와 다메섹에 있던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분명 떨고 있었을 겁니다. 가만히 있어도 이렇게 떨리는데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명령하십니다. 그 명령은 사울에게 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 말은 잘못 들으면 죽으라는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는 주님께 반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아나니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는 기도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보면 바리새인은 누구나 기도하고 경건한 유대인은 당연히 기도한다고 여겨집니다. 이 말은 잘못 들으면 사울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공격하기에 앞서 자신의 종교적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는 말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이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조금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그가 환상을 보았는데 너에 대한 환상이다! 아나니아야, 그는 너를 모르지만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와서 자신에게 안수하여 다시 볼 수 있게 해주는 환상을 보았다.” 아나니아는 환상 속에서 환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갈수록 복잡한 거 같지만 아나니아는 요점을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걱정은 여전합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이 왜 이곳에 왔는지, 그가 예루살렘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우리가 다 아는데 저더러 그를 만나라 가야하냐고 묻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대답하시는데 이때 아나니아는 다른 사람들이 아직 듣지 못한 것을 듣습니다. 주님은 특별한 임무를 위해서 바울을 부르셨다는 겁니다. 한 분이신 참 하나님에 대한 메시지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에 대한 좋은 소식이 더 넓은 세계로 이교도의 세계로 이방인들에게로 이 하나님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사람들에게로 전해질 때가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할 사람은 율법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앞장 설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을 할 사람은 다른 누구보다도 눈에 띄게 열성이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스라엘과 그 전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혹은 율법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이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한 것이라고 여겨져서는 안 될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이방인들의 세계로 나아가는 일을 할 사람은 강경하고 맹신적이고 극단적인 민족주의자에 초정통 바리새파 유대인이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딱 제격이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을 다른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파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이를 보는 사람들은 한번쯤 복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지 않겠습니까?

아나니아는 이를 깨달았던 거 같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자 이제는 두 말 않고 바로 길을 떠났습니다. 이 모습에서 교회에 숨겨진 영웅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쩌면 자신의 목숨이 스데반처럼 날아갈 수 있을 텐데도 그는 주어진 길을 갔습니다. 사울과 마주한 아나니아는 여기서도 위대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사울에게 형제라고 말합니다. “형제 사울이여”, 하고 말했던 겁니다. 형제는 가족입니다. 그는 사울은 이제 우리의 가족이 되었다고 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는 요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왜 용서해주냐고 떼를 쓰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받아드린 것입니다.

이때 바울의 심정은 어땠겠습니까? 아마 형제라는 이 말은 바울이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에게 들은 첫 마디였을 겁니다. 바울은 아마 혼자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철천지 원수가 형제로서 환영을 받았다고? 이 두려운 광신자가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졌다고? 그러나 정말로 그는 교회의 원수에서 교회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는 틀림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후 아나니아는 17절에서 사울이 어떻게 해서 다메섹 도상에서 그에게 나타났던 예수님이 그의 시력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성령 충만하기 위해 자신을 보내셨는가를 설명했습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누가는 의사였기에 의학적인 용어를 사용하며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울을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마도 아나니아로부터 받았을 것이며 아나니아는 그럼으로써 그를 눈이 보이게 하고 공개적으로 예수님의 공동체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그는 음식을 먹고 강건하여졌습니다. 아나니아는 왜 그에게 세례를 주었을 뿐 아니라 음식을 주었을까요. 이 젊은 회심자는 영적 필요 뿐 아니라 육체적 필요 역시도 갖고 있었야 한다는 걸 알았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같이 오늘 큐티에 있는 13, 14, 17-19절에 있는 내용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나니아는 자신의 안위를 살피지 않고, 기꺼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성도들 사이에서 사울의 악명이 자자했고, 그가 성도들을 소탕하려고 다메섹에 왔다는 것을 알고서도, 마음속 두려움보다 주님의 말씀을 더 신뢰했습니다. 지금 내게도 두려움을 떨치고 순종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처음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보다는 상황이 많이 나아졌습니다. 최소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죽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려움을 떨치고 순종해야 할 순간은 있습니다. 오늘도 그 순간의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들은 말씀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고 아나니아와 같은 신앙인의 모습이 보여지길 소망합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기도로 주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오늘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바울과 아나니아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봅니다. 철천지원수였던 바울이 용서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만 비로소 진정한 평화와 화해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세상의 이 어그러짐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길임을 고백합니다. 아나니아와 바울이 만나던 그 은혜의 시간을 우리에게도 임하길 원합니다. 두려움을 떨치고 순종해야할 순간에 우리를 순종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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