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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새벽설교

[설교문] 시편 89편 38-52절(시 89:38-52, 시 89:38~52)

by 카리안zz 2020.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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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 시작은 시인의 한탄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를 내치고 거절하셨으며 노여움의 대상으로 삼으셨다는 것에 한탄을 합니다. 한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다윗을 선택하여 그의 거룩한 기름을 부어 왕으로 높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나의 구원의 바위로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에게 영원하고 견고한 왕조를 주겠다는 언약을 굳게 세우셨고, 깨뜨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 39절에서 잘 나타나듯이 그의 종 다윗과 세운 언약을 경멸하셨고, 그의 왕관을 내동댕이치셨습니다. 왕관은 왕의 위엄과 통치를 상징하는데 그 왕관이 땅에 던져졌다는 건 왕의 자리를 빼앗겨 수치와 모욕을 당했다는 겁니다. 이런 상황은 하나님이 결국 다윗의 언약을 파하셨고, 다윗에게 약속하신 인자와 성실을 거두신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전에 다윗과 그의 후손은 하나님의 임재를 누렸고, 하나님으로부터 힘과 견고함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대적들이 그의 소유를 강제로 빼앗지 못했고, 그와 그 나라를 곤경에 빠뜨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왕을 에워싸 지키던 모든 울타리를 부수셨고 요새들 마저 파괴하셨습니다. “울타리요새는 왕과 나라의 국력과 경제력을 의미하는데 이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왕위와 나라를 위협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이방인들을 사용하시기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왕에게 실어준 힘을 거두십니다. 그 결과 왕과 그의 나라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이상 도움을 받지 못하므로 무방비 상태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지존자가 되어 자기 백성뿐 아니라 세상 왕들로부터 높임을 받도록 약속받은 왕이 길에 지나가는 자들과 이웃들에게 약탈당하고 조롱거리가 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길로 지나가는 자는 멸망을 목격하고 조롱하는 자들을 가리키며, ‘이웃은 거주민이나 이웃 도시나 이방 나라를 지칭합니다. 다윗과 함께하여 힘을 주셨던 하나님은 다윗의 대적 편에 서셨고, 그의 오른손이 아닌 대적들의 오른손을 붙잡아 높여주셨습니다. 다윗의 손을 먼 이방 나라까지 뻗치게 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실 것이라 약속하셨던 하나님은 이제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칼날이 제대로 힘을 발하지 못하게 하셨고 패하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앞 절인 15-17절을 본다면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의 공의와 은총 덕분에 힘을 얻고 높아지며, 종일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운 소리를 외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가 선택한 왕과 그의 백성에게 주셨던 승리와 기쁨을 도리어 대적들에게 안겨주셨습니다. 영원한 왕국을 약속하셨던 하나님은 다윗의 왕위를 땅에 던져버리시고 왕국을 몰락시키셨습니다. 다윗 왕조는 끝났으며 이들은 패배와 수치와 모욕을 견뎌야 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다윗)의 젊은 날을 짧게 하셨다는 표현은 다윗 왕조가 강력한 통치를 더 이어나갈 수 있었음에도 하나님이 이를 좌절시켜 왕조의 통치 기간을 단축하셨음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단명한 다윗 왕조는 하나님이 약속한 영원한 왕국과 대조를 이룸과 동시에 하나님의 언약 파기로 인한 시인의 당혹과 배반감이 드러납니다.

 

이렇게 38~45절에 하나님이 다윗과의 언약을 파기하셨음을 누누이 밝힌 시인은 언제까지니이까?’라고 외치며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을 다시 베풀어주시길 간청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발적인 무관심과 무응답을 암시하며, 그 기간이 계속되고 있어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연이어 나오는 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라는 질문은 하나님이 다윗과의 언약을 파기한 데에 있어 그의 진노가 컸기 때문임을 다시금 강조합니다.

시인은 언약 파기의 책임을 하나님께 묻고 이것에 대해 불만을 표현해왔으나 사실상 하나님이 언약을 파기한 직접적인 원인은 그를 노엽게 한 왕과 백성들에게 있었습니다. 다윗과 후손은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주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으며 이 죄로 인해 하나님의 채찍을 맞으면서도 계속해서 불순종의 죄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함과 견고함을 약속받은 다윗 왕조와 그 왕국이 멸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이미 알았으면서도 시인이 하나님께 항변하는 이유는 그들의 죄를 덮으려는 시도나 시인의 뻔뻔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상황을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셨던 인자를 돌이키실 때만이 다시 왕이나 나라에 소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이 무관심과 노를 속히 그치고 긍휼을 베풀어주시도록 자기 자신이 나약하고 짧은 인생임을 하나님이 기억하시길 호소합니다.

 

49절에 주여, 당신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그 전의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라고 외치며, 시인은 다윗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인자가 사라져버렸음을 하나님께 상기시키고 이에 대해 항변을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 33~35절에서 그의 다윗에 대하여 인자와 성실을 무효화하지 않을 것이며 그의 거룩함으로 다윗에게 맹세한 언약을 깨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모든 것이 뒤엎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인자는 더 이상 진행형이 아닌 과거형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디 있나이까?”라는 항변을 통해 시인은 하나님 파기한 언약과 인자하심을 다시 복구해주시기만을 간청하는 것입니다. 특히, 시인은 왕들이 받고 있는 비방에 초점을 맞춰 하나님이 그 전에 약속하신 인자를 다시 다윗과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주시도록 호소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한 시인의 탄식을 봤습니다. 그런데 이 탄식은 평화로운 것 같은 오늘에도 여전히 울리는 것 같습니다. 본문의 주인공이 살았던 시대는 아마 이방인들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시대였기에 대단히 어두운 분위기였습니다. 우리로 치면 예전에 일제시대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은 너무나 평화롭습니다. 길을 가다가 칼을 차고 있는 사람도 없고, 말 안 듣는다고 마구잡이로 패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평화로운 시대이기에 탄식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평화로운 시대에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탄식을 합니다. 같은 사역자로서 너무 부끄럽고 죄송스럽지만 최근에 또 목회자의 성추문이 일어났습니다. 그냥 그저 그런 사람이 아니라 스타 목사로 일컬어지던 사람입니다. 작년에 청소년 사역자로 대단히 유명한 사람이 성추문을 냈는데 불과 1년 사이에 또 발생한 것입니다. 그 외에도 시시콜콜한 사건 사고들이 참 많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현실에 우리 역시 오늘 본문의 시인처럼 탄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에 기대어 탄식하여야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대어야 합니다. 언젠가 있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전에 교회 사역할 때 제 옆자리에 고등부 사역자분이 옆에 앉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자리에 몇 십장의 작은 종이들이 쌓여있는 걸 봤습니다. 보니깐 자신들에게 교회는 어떤 곳인지 한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종이들을 한 장씩 보다가 어떤 한 문장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그 종이에는 일주일에 만나는 희망의 한 줄기였습니다. 어린 친구들이 어찌보면 어두운 시대에 희망이란 것을 경험해보지 못했을 거 같은 그 아이가 희망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냉랭했던 가슴이 뜨거워져 눈시울이 붉어졌던 기억이 납니다.

교회가 이 모양 이 꼴이여도 교회가 희망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분이시기에 그 신실하심에 기댄다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대어 시인처럼 기도하시는 우리 성도 여러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님, 오늘 본문에서 시인의 탄식이 어찌 그리 공감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시대의 상황과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상황은 완전히 다른데 여전히 우리 가운데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옵니다. 교회를 향한 날카로운 비판도 교회를 향한 덤덤한 변호도 모두 안타까운 탄식 때문으로 보입니다. 주님,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시옵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우리는 기도합니다. 현실에 낙망하여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대어 앉아 기도합니다. 주님은 신실하십니다. 주님의 손은 강하며 편 팔은 넓습니다. 주님의 손으로 우리 교회들을 지켜주시며 편 팔로서 우리를 안아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주님의 강한 손과 편 팔을 의지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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