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흐름은 갑자기 모세가 장로들을 이끌고 다단과 아비람에게 찾아가는 장면으로 바뀝니다. 모든 반역자들이 회막 앞에 운집해 있었는데 그들이 어느 순간 각자의 장막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본문은 그 과정은 언급하지 않고 침묵하지만 아론 가문의 제사장권에 도전한 고라와 250명의 무리만 회막 앞에 여전히 남아 있고, 모세의 정치적 지도권에 반기를 든 다단과 아비람이 진영 내 자신들 구역으로 돌아가 모반을 계속 진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5-27절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경고를 전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행하시기 전에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재앙을 피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모세에게 이르기를 빨리 백성들에게 가서 임박한 심판을 알리라 하신 겁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즉시 백성의 대표 장로들과 더불어 다단과 아비람에게 찾아갔습니다. 여기에서 모세가 고라와 다단, 아비람이 아닌 그들 주변의 회중에게 곧 닥칠 재앙을 경고하러 달려갔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피난 경고의 대상이 그 반역자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장로들이 모세를 따랐다는 것은 백성의 지도자들 다수는 이 반역에 동참하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하지만 고라 일당이 멸절당한 후 보인 ‘온 회중’의 어이없는 반응은 백성들 대다수가 그 반역자들에게 심정적 지지를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6절에 모세는 그 악인들 곁을 떠나고 또한 물건도 만지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단순한 ‘접촉’이라기보다 멸절되는 사람들의 값비싼 물건을 욕심내 빼돌리려는 것을 경고하는 의미로 보입니다. 마치 여호수아서에서 아간의 사례를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이후 반역자 주변에 살았던 무리들이 장막을 떠났으나 다단과 아비람 및 어린 아이들을 포함한 그들의 가족 모두 그 경고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장막 밖으로 나와 그대로 서 있습니다. 아마 여기서 이들은 다단과 아비람의 일족, 즉 그들 아래 딸린 대가족의 식구들을 의미할 것입니다. 여기서 고라는 언급이 안 되는데 현재 25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회막 근처에 집결해 있기 때문입니다.
‘쓸어내다’라는 뜻의 동사를 살펴보면 이 재앙의 성격을 잘 나타냅니다. 싹쓸이를 통한 완전한 파멸에 이른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에서도 동일한 동사가 사용됩니다(창 19:15-17). 역시 그들의 죄 때문에 그들은 땅에서 모조리 죽임을 당했으며, 재산도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한 지역에 멸절의 재앙이 떨어질 때 의인도 동반해서 죽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항상 의인들에게 사전 사전에 그곳을 떠날 것을 경고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로부터 룻과 가족들을 피하게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유월절 재앙을 모면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남은 회중에게 동일한 기회를 주십니다. 비록 회중은 어떤 의미에서 그 반란의 방관자이자 소극적이긴 하나 분명 동조자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피할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28-30절은 반역자들에게 임할 재앙을 예고하십니다. 모세는 자신이 전달하는 경고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거라고 강조합니다. 그들에게 내려질 형벌이 평이한 거라면 자신은 하나님의 대언자가 아닐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말을 거짓말로 취급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매우 특수한 징벌이 내려진다면, 그 자체로 이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로 증명될 것입니다. 말 그대로 무리에게 전혀 새로운 충격적인 징벌이 내려지는데 이 징벌은 땅이 갈리는 징벌입니다. 그들과 그들에게 속한 소유물과 사람까지 스올에 빠집니다. 대지진이 발생해서 사람이 땅 속에 빠져 죽는 일이 발생할 수 있으나 사람이 집단으로 빠질 만큼 거대한 틈이 생기는 지진은 흔하지 않습니다. 대지진으로 사람들이 몰살을 당하는 이유는 무너진 건물들 때문이지 땅속에 빠지거나 그러진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현상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재앙입니다. 더 나아가 33절에는 땅이 다시 덮이는 더욱 기이한 일이 추후 발생해서 하나님의 새 일이자 전대미문의 사건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31-35절은 이렇게 예고된 재앙이 임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경고하 대로 땅이 갈라져 고라에게 속한 사람과 가축을 포함한 모든 재물이 스올 땅속으로 꺼졌습니다. 여기서 고라는 포함되지 않는데 그의 죽음은 26:10에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아마 고라는 자신의 집이 아니라 성막에서 분향 시합에 참여한 250명과 함께 몰살되었을 것입니다.
또, 앞서 말한대로 땅에 거대한 틈이 생긴 것도 놀랍지만 갈라진 땅이 다시 합쳐진 것은 더욱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마치 홍해가 갈라진 뒤 그곳을 건너간 파라오와 그의 군사들이 생각나는데 그들도 바다에서 몰살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전한 말을 듣지 않고 하나님께 거듭해서 반항했던 파라오와 그의 무리는 바다에 수장되었고, 모세와 아론에게 대항하며 하나님께 반역질을 한 고라와 그의 무리는 땅 속에 매장되는 유사함이 보입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회중은 아마 일단 상당히 멀리 피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은 백성들이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도망하여’라고 진술하는데 그들은 먼발치에서 그 공포의 한 장면을 어렴풋이 보면서 그 비명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더 말리 도망갔습니다. 한편, 성막 근처에 아직 머물러 있던 고라와 250명의 무리도 같은 시각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에게 내린 심판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불입니다. 틀림없이 그 불은 하나님의 구름 기둥 속에서 타고 있던 그 불일 것입니다. 구름 기둥 속의 불은 때로 특별한 이유로 밖으로 솟구쳐 나오곤 했습니다. 그 신적인 불이 잘못된 분향을 하고 있던 250명에게 떨어져 그들을 태워 죽였던 것입니다. 고라는 땅속에 매몰되어 죽지 않고 이때 죽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매장과 화형을 통한 두 개의 심판이 거의 동시에 서로 거리를 두고 발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죄’란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참혹한 현실이여서 파괴력 또한 어머어마합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타협의 여지도 남아있지 않으며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입니다. 모세의 편에 있느냐 반역자들의 편에 서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편에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외면하고 업신여기면서 안절할 수 있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죄의 참혹성과 그 와중에 보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오늘 우리 삶에서 보이실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죄란 그저 가벼운 것이 아니며 내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참혹한 현실이며 너무나 무겁다는 것을 오늘 들었습니다. 죄와는 절대 함께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일상에 단조로움으로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주님, 회개합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해주시며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에 기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원합니다. 언제나 늘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에 감사드리며 오늘 역시도 지켜 보호해 주심을 믿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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