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가 보면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 착한 사람들을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는 않는 거 같지만 참 좋아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윤리, 도덕적으로도 너무나 착한 사람 말이죠. 오늘 제가 소개할 한 사람도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살면서 한 번도 법을 어긴 적이 없고 언제 어디서나 최선을 다해서 살았던 그 사람이 퇴근길 버스정류장에서 경찰들에게 체포를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뒤 1961년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버스정류장에서 잡힌 사람의 재판이 열렸습니다. 그 사람은 50대 중반의 평범한 아저씨였습니다. 그런데 이 평범한 아저씨에게 재판관들은 그에게 죄를 물었고 죄를 인정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남을 해치는 것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관심이 있는 건 맡은 일을 잘하는 것뿐입니다.” 알고보니 이 사람은 그저 열차를 고안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열차를 만든건 지시받은 업무를 잘 처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만든 열차 때문에 조직은 시간 낭비 없이 일을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생각해낸 열차는 바로 가스실이 설치된 열차였습니다. 그 열차로 인해 달리는 기차의 가스실 아니면 기차가 멈추는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수백만명의 유대인들이 죽었습니다. 바로 이 죽음의 중심에 서 있었던 사람이 50대 평범했던 아저씨같았던 사람, 곧 그의 이름은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죄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사람도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않았으니깐 말입니다. 그는 그저 시키는 것을 그대로 실천했던 충실했고 말 잘 듣는 관리인이었다고 했습니다. 이 재판을 끝까지 지켜봤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한나 아렌트라는 철학자였습니다. 이 철학자는 아이히만의 이 모습을 보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을 한권 씁니다. 그리고 책의 주제는 악의 평범성, 그러니깐 악은 평범하고 착한 모습을 통해서도 존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악의 평범성의 또 다른 예로는 우리나라에도 있었습니다. 때는 독재정부시절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서 고문을 많이 시켰다고 합니다. 요즘 무죄 판결을 많이 받고 있지요. 영화로까지 나오는데 <자백>이라는 영화가 그 영화입니다. 어쨌든 한 여자가 지독히 고문을 받고 있었는데 우연히 자신을 고문하던 사람의 전화통화를 들었다고 합니다. 누구랑 통화를 했냐면 고문하는 사람의 딸과 통화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딸과 통화를 하던 그 사람은 어느 누구보다도 한없이 따스한 아버지였다고 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딸바보였던 거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따스한 부모인 그 사람이 지금은 아주 잔혹하게 사람을 고문하는 평범하고 착해보였던 사람이었습니다.
비도덕적인 사회에서 한 사람이 아무리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산다고 해도 그것은 악의 평범성을 낳게 되는 경우가 됩니다. 미국이 노예제도를 시행하던 시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들은 노예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잘 대우해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노예제도라는 그 아래에서는 악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었지요. 그가 악을 미워한 사람이었다면 노예제도를 공격하였을 것입니다. 개인의 윤리, 도덕은 이런 악에 영향 아래에서 무기력해졌다는 것은 명백해졌습니다.
그저 착하게 사는 것도 불가능한데 하물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이라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한분을 보내주십니다. 그분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한 방법은 바로 성령님의 능력으로만입니다. 이 성령님께서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계신다고 1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16절 말씀에는 또 성령님을 가리켜 보혜사라고 하십니다. 이 보혜사라는 말을 원문의 뜻을 풀이해서 말한다면 세상의 적대적인 태도에 대해 제자들을 보호하고, 말할 것을 가르칠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진리에 대해 증언하는 변호자로서의 성령님의 역할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법정적으로 이렇게 볼 수 있지만 한 가지 더 이 보혜사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뜻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위로자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 20절의 함께하시는 성령님의 역할을 본다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떠남을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격려하는 문맥에서 보혜사를 보내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8-2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성령으로 부활과 함께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성령님 안에서 상호 내주를 경험합니다.
21-24절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나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삶으로 증명된다고 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사랑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먼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사랑을 보여주시면 우리는 그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서 그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해 봐야할 단어가 있는데 23절에 나오는 <거처>라는 단어입니다. 이 <거처>라는 단어를 원어로 살펴본다면 아버지 집을 묘사할 때 사용되어졌습니다. 따라서 신자를 성전 삼으셔서, 아버지와 아들이 신자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에다가 이제 보혜사 성령님까지 오셔서 새로운 아버지의 집을 이룹니다. 옛 언약에서 ‘아버지의 집’이 예루살렘 성전이었다면 이제 새 언약에서의 ‘아버지의 집’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진 아버지와 아들의 거처입니다.
설교를 이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초두에서 말씀드렸듯이 세상은 악의 평범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악 가운데에서 저항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루터와 그 종교개혁의 후계자들입니다. 그들이 세상의 잣대로 그렇게 윤리적이고 착한 사람들일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디 그뿐만입니까? 영국에서 노예무역을 폐지시킨 윌리엄 월버포스라는 정치인도 있습니다. 돈많은 부잣집 도렷님으로 태어나 방탄하게 살던 그가 예수님을 만나 변화하고 이전에 방탄했던 생활을 끊고 성경 읽기와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목회자가 되고 싶었지만 그는 정치인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그리스도인 정치가로서 노예무역을 폐지하려고 했습니다. 결국 그는 수십년의 좌절과 건강, 재산을 다 잃은 끝에 노예제도를 폐지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월버포스처럼 거창한 일을 할 것을 생각하지는 맙시다. 아마 월버포스도 그런 큰 일을 자기의 힘으로 할 수 있을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저 묵묵히 예수님의 계명을 사랑하는 그 큰 일을 감당합시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그 큰 일을 성령님께 부르짖으며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언제나 죄와 악이 우리의 주변에서 넘치고 넘쳐 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악에서 구해주실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주님은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성령님, 구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이 죄와 악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성령님 우리가 죄와 악을 이기고 예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우리와 늘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힘이 너무나 나약하다는 것을 늘 깨닫게 해주시고 늘 성령님을 의지하기 원합니다.
오늘 하루를 기도로 시작합니다. 성령님, 오늘 하루도 온전히 사랑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온 몸과 행동으로 보일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오늘도 함께해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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