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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새벽설교

[설교문] 민수기 11장 16-25절(민 11:16-25, 민 11:16~25)

by 카리안zz 2020.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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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에 기독교의 메시지 중 가장 거부감을 가지는 게 바로 인간은 죄인이라는 말일 겁니다. 물론 이 죄인이라는 말을 잔혹한 사이코패스와 같다는 말로 오해를 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죄인이라는 말에 거부감 가지고 있다는 건 사실입니다. 오히려 이 죄인이라고 말하는 기독교에 역으로 공격을 합니다. 종교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고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존 레논의 <Imagine>이란 노래 가사가 그렇습니다. 현대에 와서 엄청난 발전을 했고 이제는 기독교가 없이도 하나님이 없이도 우리 스스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듯 보입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저는 오히려 되묻고 싶습니다. “정말 인간은 악하지 않은가?” 이 질문에 아주 좋은 통찰력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랭던 길키입니다.

랭던 길키는 하버드를 수석 졸업했고 그 다음해 중국으로 건너가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 중국과 일본의 전쟁이 일어났고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중국 땅에 있던 적대국 사람들은 포로 수용소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랭던 길키와 또 <불의 전차>로 유명한 에릭 리델도 있었습니다. 포로 수용소의 이름은 <산둥 수용소>였고 랭던 길키가 포로 수용소의 이름으로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책으로 엮었습니다. 랭던 킬키는 그곳에서 그의 뛰어난 통찰력을 발휘하여 한 가지 사실을 받아드렸습니다. 바로 인간의 원죄였습니다. 여지껏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길키 역시 서구의 합리주의를 믿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산둥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이것을 완전히 뒤바꾸어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이 수용소에서는 전혀 그런 모습을 안 보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여유롭고 나눠주며 상냥한 이웃이었지만 제한된 음식과 물품 사이에서는 그러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조금만 나눠주고 양보한다면 모두 다 좋은 상황인데 자기 걸 안 주겠다고 벽을 치고 있던 사람들은 결국 자기 것도 잃고 사람도 신망도 모두 다 잃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한 두 번이지 계속해서 수용소 생활에서 목격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랭던 길키는 서구가 버렸던 원죄를 받아 드렸습니다. 받아 드릴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던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인간의 죄인된 본성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 죄인된 본성이 어디에서 묻어나오냐면 애굽에서의 생활이 더 좋았다고 말하는데에 있습니다. 해서는 안 될 말입니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 애굽땅에서 살았던 그들입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셨는데 이것을 직접 눈으로 봤던 사람들이 애굽이 더 좋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노예에서 해방되었던 사람이 다시 살기 어렵다고 노예가 되려고 하는 거랑 비슷한 경우 같습니다.

여기에서 불평을 터트리며 하나님을 멸시한 백성들에게 자신의 살아있음과 무한한 능력을 다시 한번 작정하여 보이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그 방법이 바로 19-20절 말씀입니다. 하늘 양식은 앞으로 한 달 내내 계속 공급될 것이며 매일 입에 한 가득 뜯은 고기가 콧구멍으로 밀려나올 만큼 질리도록 먹어 결국 냄새마저 역겹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대답을 들은 모세의 반응 참 의외입니다. 약간의 불신있는 거 같은 늬앙스를 보입니다.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묻는데, “보병만 60만명인데 이 광야 벌판에서 어디서 그런 많은 고기를 공급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모세는 아무리 많은 양 떼와 소 떼를 잡는다 해도, 바다의 모든 고기를 다 잡는다 해도 부족할 것이라며 고개를 흔듭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떠올려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막대한 가축을 끌고 나왔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이는 충분히 고기를 먹을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이 고기투정은 단순히 이집트로 돌아가기 위해 갖다 붙인 핑계거리에 불과한 셈입니다. 여태까지 잘 가던 모세가 이번에는 조금 이상합니다. 이 조짐은 11장 초반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모세는 불평하는 백성들 때문에 크게 당혹했고 감사할 줄 모르는 이 둔감한 사람들을 더 이상 떠맡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을 위해서 계속 사역하느니 차라리 죽고 싶어했습니다. 원망은 전염성이 있는거 같습니다. 모세는 자기 회중의 수준까지 낮아지며 그들의 태도를 닮아갑니다.

그래서 이런 모세의 반응에 오늘 본문 초반부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임무를 경감시켜 주신 겁니다. 이런 상황에도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수고를 분담시켜 주셨습니다. 홀로 세상을 가는 것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고 때때로 도와주고 때로는 도울 자를 보내주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신실하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나 불신합니다. 이런 모세와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신에 하나님께서는 짧고 간결한 매우 인상적인 표현의 질문형 답변을 하십니다. 23절 말씀에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할 것입니다.

이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는데 오늘 큐티부분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밑에 18-19절 내용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백성의 불평을 다루십니다. 그들은 하늘의 양식(만나)’을 먹으면서도 땅의 음식(고기)’을 탐했습니다. 하나님은 고기를 먹고 싶다는 그들의 불평 속에 환 애굽의 망상이 숨어 있음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삶의 방식이 아니라 자기 욕망대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한 달 내내 물리도록 고기를 주겠다는 선언에는 욕망의 허망함을 비꼬는 하나님의 불편한 심시가 묻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축복에 만족하지 못하는 한, 탐욕은 결코 잦아들지 않을 것입니다. 욕망은 결핍의 문제가 아닌 영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이 땅을 사는 성도의 진정한 양식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실현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으려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직접 그 큰 일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불평했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어떠하겠습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는 어떠한 배불림도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은혜를 구했으면 합니다. 그 은혜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분의 뜻에 맞게 감당하며 살아가는 우리 OO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가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우리 안에 욕망이 가득차서 하나님의 정해주신 방식을 따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그 큰 일을 직접 눈으로 본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랬는데 우리 역시도 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를 진정으로 배부르게 할 능력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배부르게 하실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은혜를 구합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시옵소서. 그 은혜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길 원합니다. 성령님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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