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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새벽설교

[설교문] 요한복음 5장 10-18절(요 5:10-18, 요 5:10~18)

by 카리안zz 2020.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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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년도 유럽에서는 인간에 이성이 가장 중요하게 강조되던 시기였습니다. 정치, 문화, 사회 모든 부분을 인간의 이성으로 생각해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다 결국에는 종교, 유럽의 종교는 기독교였기에 기독교 역시도 인간의 이성으로 한 번 재단해 보자고 도전이 있었습니다. 특히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이 성경을 인간의 이성으로 재단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난도질했습니다. 이 난도질 끝에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한 가지 결론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볼 때는 다 거짓이기에 예수님은 그저 다른 성인들과 같이 도덕을 가르치는 선생과 같다라는 결론이었습니다. 이러한 결론이 굳어져가고 있던 찰나에 한 명의 학자가 등장하고 그 학자는 논문을 하나 쓰게 됩니다. 그런데 그 논문 하나로 예수님이 그저 도덕을 가르치신 분이라는 오명을 벗게 됩니다. 그 논문의 핵심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단지 그저 도덕만을 가르치신 분이라면 그분은 죽을 이유가 없었는데 그런데 왜 죽었는가?” 였습니다. 맞습니다. 당시에도 그저 도덕적인 말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전혀 죽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바로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에 대해서 나옵니다. 예수님은 건드려서는 안 될 유대들의 정체성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보통 이방 사람들이랑 구별되는 표지가 음식법, 할례 그리고 오늘 나오는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이 안식일을 가차없이 어겨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 독특하시게도 일부러 남보라고 굉장히 도발을 잘 하셨습니다. 대표적으로 마가복음 3장에 역시 안식일날 손 마른 사람을 낫게 해준 장면을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낫게 해주셨을 땐 회당이었습니다. 이때 회당은 지금처럼 이렇게 마주보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벽주변으로 빙~ 둘러싸고 말하는 사람은 중간에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예수님은 보란 듯이 손마른 사람을 가운데로 불러서 자기를 죽이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손 마른 사람을 고쳐줬던 겁니다. 아마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조마조마했을 겁니다. 저처럼 소심한 사람은 그냥 몰래 가서 고쳐주시지 왜 도발을 하시지 의문을 품기도 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장면이 고스란히 오늘 본문에도 겹칩니다. 40년이나 아팠던 사람인데 하루 더 기다리는 건 일도 아니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꼭 오늘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보이신 모습을 제대로 알려면 우리는 안식일이 어떤 날인지 알아야 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너무나 아름다운 피조물들을 만드시고 즐거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참 아름다웠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완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안식일의 진정한 뜻은 완전한 창조, 생명이 충만한 창조를 기뻐하고 즐긴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창조의 세계가 타락한 것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생명가득함에서 이제는 그와 가장 반대되는 죽음이 우리를 덮쳐왔습니다. 이 세상은 아주 치명적으로 고장이 나버린 상태가 되었습니다. 죄와 죽음으로 이제 세상은 하나님께서 선언한 심히 아름다운 상태가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가르치는 안식일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주어진 그 안식이 지금 우리 가운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을 지키라는 십계명의 4계명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태초의 안식을 기억하며 앞으로 있을 새 창조 때에 진정한 안식을 기다리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그렇기에 안식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지켜 지는 날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내 생각과 내 힘으로 내 안녕과 행복을 일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 안녕과 행복은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신앙을 고백하는 날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안식일날 병든 사람을 치유시켜준 의미가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 특히 율법 선생이던 사람들은 이 의미를 전혀 몰랐습니다.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실 것이고 새 창조가 시작되며 그 안식일이 회복될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17절 말씀인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라는 구절도 하나님의 구속사를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하신 이후로 한 번도 쉬시지 않고 계속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고 나니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더욱 죽이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을 듣는 그 당시 사람이라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이미지는 고대 사회에서 일반화 되어 있던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업의 비밀을 물려주는 이미지입니다. 기업이 아버지에서 아들로 계승될 때 그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이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하게 합니다. 이렇게 가업을 전수해 주면 그 가업의 비법이 형성됩니다. 예를 들어 목수라면 어떻게 못질을 하며 대패질하는 방법들을 그대로 따라하게 하고 도자기를 굽는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도자기를 구워내는지 그대로 보고 따라하게 합니다. 이런 이미지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한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오직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할 수 있으며, 예수님만이 아들로서 아버지를 계시한다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는 혹시 정말 간혹이지만 이 병자와도 같은 세상을 어떤 것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유혹받지 않습니까? 우리가 부유해지면 그러니깐 우리가 부자가 되면 이 세상이 치료되지 않을까 유혹받지 않습니까? 아니면 우리에게 지식이 가득하여 넘치게 된다면 이 세상이 죄에서 벗어나 치료될 수 있지 않을까 유혹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유혹에 넘어저셔 그것들을 더욱 추구할 때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병든 이 세상은 무엇이 치료한 것이 아니라 누가 치료하셨다고 합니다. 그 누구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병든 자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치유받았듯이 병든 이 세상도 예수님을 만나면 치유됩니다. 이런 예수님을 믿으며 예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고백하는 우리 OO교회 성도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하루를 시작하는 이 시간에 세상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들으러 나왔습니다. 이 마음을 주님 돌봐주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대로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성령님 도와주시옵소서. 그리고 오늘 하나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깨어진 이 세상을 회복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임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악에서 우리를 건져내셨음을 고백합니다. 그런 예수님을 따르길 원합니다. 오늘도 주님을 따르는 그 여정 가운데 지켜주시옵소서.

어두운 시대에 교회들조차도 힘겨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어둡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일하고 계심을 또 계속 일하실 것임을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눈으로 보며 또 그 일하심 속에 주님의 강한 손과 편 팔안에 있길 원합니다. 우리와 늘 함께 계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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