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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새벽설교

[설교문] 레위기 4장 1-35절(레 4:1-35, 레 4:1~35)

by 카리안zz 2020.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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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본문을 이제 설교하게 되었는데 때마침 최근에 레위기 주석서들이 참 많이 나왔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레위기 박사 총신에 김경열 교수님의 주석서, 백석대 성기문 교수님 주석서, 최고의 주석시리즈로 불리는 NICOT 고든 웨남의 레위기 주석, BST 레위기 주석도 나왔고 이외에도 다른 좋은 주석들도 나왔습니다. 흔히 레위기 르네상스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저도 이중에 몇 개 주석들을 참고해서 보는데 주석이 이렇게 많아도 어려운 건 역시 어려운 거 같습니다. 어려운 이유? 지금 동물을 직접 잡아 죽이던 그때와 지금은 시각적으로 많은 차이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이 안 와닿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한가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분명 구약의 이 제사를 포함한 이 형식들은 신약때에는 다 대체되었는데 왜 레위기 제사를 배워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구약의 예배의 요소들이 다 대체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구약 백성들은 성전의 예배를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4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성전, 둘째-제사장, 셋째-희생동물, 넷째-안식일과 절기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이 네 가지 요소들을 친히 성취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대제사장이셨고, 단번에 올려진 영원한 희생제물이셨고, 제물이 바쳐진 성전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분의 안식일과 그 절기의 주인이십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다 대체되었기 때문에 필요가 없을 법한데 끊임없이 아직도 연구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이 외형적 틀이 가진 의미와 그 안에 담긴 본질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의 마지막은 성막을 완성하면서 끝냈습니다. 성막은 제사를 드리는 공간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레위기의 첫장은 제사를 드리는 걸로 시작을 합니다. 오늘 본문은 네 번째 제사인 속죄제입니다. 속죄제는 비고의적인 범죄의 해결 그러니깐 용서를 구하는 제사입니다. 제단에 드려진 정결예물은 성소 기물의 오염의 제거와 예배자의 죄의 제거를 위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려는 목적으로 드린 것입니다. 우발적인(부지중의) 범죄도 하나님의 현존에 피해를 주고 인간이 제물을 드려야 할 정도로 "악한 것"이기도 합니다. 속죄제의 특징은 대신하여 바쳐진다는데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죄인 대신에 가축이 하나님 앞에서 죽고, 둘째, 죄인 대신에 제사장이 죄 용서의 제의를 거행하여야 합니다. 셋째, 제사장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죄의 용서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이 정결의식의 대행자이지만, 용서를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 하나 본문에서 특이한 점이 있는데 제사자의 신분에 따라 속죄제에 바치는 짐승의 등급이 다릅니다. "기름 부은 받은 제사장"은 대제사장으로 볼 수 있는데 대제사장과 회중은 수소를 바칩니다. 여기서 보면 제사장과 회중은 동급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백성의 죄는 곧 제사장의 책임이고 제사장의 잘못은 백성의 죄를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제사장과 백성 사이의 죄의 연관성은 금송아지 사건을 기억하시면 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줍니다.

제사장 외 족장은 숫염소를, 평민은 약간 더 낮은 등급의 암염소와 암양을 바쳤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암수 구분 없이 집비둘기나 산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바칩니다. 비둘기조차 바치기 힘든 사람들은 곡식으로 속죄제를 바칠 수 있기도 합니다.

속죄제는 이스라엘 제사의 핵심으로 보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속죄제는 죄로 말미암아 생겨난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단절을 끝내고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 언약의 유익들을 온전히 누리도록 사람을 다시 회복시키려는 목적으로 제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 당연히 생각나시는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제물이 되셔서 피를 흘리셨던 대목이 떠오릅니다. 우리를 위해 죽음의 길로 가셨던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옛날 열일곱살 된 한 소년이 오늘 본문을 봤는지 예수님에 대한 영감이 떠올라 시를 남깁니다. 딱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전날인 1224일날 시를 지었습니다. 19341224일 그 소년이 지은 시를 제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시의 제목은 "초 한 대"입니다.

 

초 한 대-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리고도 그의 생명인 심지까지

백옥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보린다.

 

그리고도 책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가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간

나의 방에 풍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이 소년은 재물과 촛불과 예수님에게서 자신을 겹쳐 살아가려고 했습니다. 고작 열일곱살 어린 나이의 소년이 그런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이 결심은 점점 더 커지면 커졌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이 소년은 커서 시인이 되는데 오늘 표현된 이 시가 더욱더 절실하게 표현됩니다. 이것은 그로부터 7년이 지나고 24살 청년이 된 그 소년의 시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소년은 24살 청년에 자신을 대표하는 시들을 남깁니다. 그 시 중 한편이 이겁니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그 유명한 서시입니다. 그 소년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윤동주 시인입니다. 그럼 이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서 나한테 주어진 길을 어떤 길일까요? 서시보다 윤동주의 가장 대표되는 시인 십자가에서 그 길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마지막으로 윤동주의 십자가를 읽어보겠습니다.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그가 걸어가야 할 길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였습니다. 윤동주, 용정중앙교회 주일학교 교사였고 자신의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려고 쓴 시 <조개껍질> 이제 우리나라 모든 아이들이 교과서로 배우는 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청년은 신사참배에 저항했고 일본의 미션스쿨에 입학을 하지만 기독교란 이름으로 일본 천황을 섬기는 모습을 보고 곧 바로 학교를 자퇴하였습니다. 그렇게 윤동주는 시대 앞에서 죽음의 길을 걸어갔더랬습니다. 그것이 예수의 길이기에 그는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그의 나이 불과 29살에 외마디 절규를 외치며 차가운 수용소 안에서 죽었습니다. 불과 29살입니다. 저는 서시를 읽으면서 굉장히 가슴 아픈 구절이 있습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입니다. 지금 제 나이가 29살인데 젊음이 꿈틀거리는 이 시기에 죽어가는 것이 어떻게 보입니다. 살아있고 생동감 넘치는 것이 보이는 이 시기에 그것도 스물 네 살의 청년이 죽어가는 것들을 보았던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 시대는 그 정도로 암울했던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일제 치하 죽어가는 것들이 그의 바로 옆에서 보였겠죠. 윤동주가 살았던 시대는 종말을 기다렸던 시대인 것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처한 오늘 이 시대는 종말을 깨워야 하는 시대입니다. 모든 것이 영원할 것처럼 구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을 돈으로 가리고, 그것을 누구는 권력으로 가립니다. 마치 이것만 있으면 영원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우리의 신앙의 선배가 걸어간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윤동주는 종말론을 기다린 그 한복판을 걸어갔다면 우리는 그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고 영원한 것, 곧 예수 그리스도를 외쳐야 합니다. 입으로 외칩니까? 아닙니다. 그가 걸었던 그 길을 걸으면서 외쳐 나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 신앙의 선배를 본받아 우리에게 주어진 길이 어떤 길인지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에게도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서 조용히 흘리겠다고 고백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묵상합니다. 이 묵상이 단지 나를 위해 주님이 죽으셔서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차원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주님이 죽으러 가신 그 길을 나도 따라 걷겠다는 고백으로까지 이어지게 해주시옵소서. 주님,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는 반드시 누군가가 희생해야 하는 것을 압니다. 비록 우리 세대에는 열매 맺지 못할지라도 사명가지고 죽겠습니다. 괴로웠고 행복했던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주님, 감히 우리를 사용해 달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의 길이 어떤 길인지 잘 압니다. 좁은 길 걸으셨던 예수님의 길, 로마의 큰 길 속에 보이던 으리으리한 건물이 아니라 유대땅 작은 골목길 그 좁은 길 속에 보이던 유대의 허름했던 건물들을 보기 원합니다. 주님이 걸으셨던 좁은 길은 실로 그러한 길이었습니다. 주님, 그 길 걷기 원합니다. 가난한 자들과 고통받는 자들과 억압 받는 자들, 빚진 자들, 마음 상한 자들, 실패한 자들이 교회에 넘치기 원합니다. 바로 주님이 직접 눈으로 보셨던 그 사람들이 지금 우리 가운데 가득하길 원합니다. 제가 그 사람 중에 하나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또 다른 약한 자도 채워지길 기대합니다. 주님,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헌금 드린 손길이 있습니다. 이 손길을 받아주시고 하늘의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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