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장의 특징은 대화가 참 많이 나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과 제자와의 대화, 바리새인과 맹인, 맹인의 부모와 바리새인, 다시 바리새인과 맹인의 대화, 그리고 예수님과 맹인의 대화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맹인과 바리새인의 두 번째 대화입니다. 부모에게 답을 얻지 못하자 맹인과 다시 대화를 하게 된겁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맹인도 상황 파악이 되었던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단순히 사실을 말하기 보다는 자신의 주관을 또렷히 드러냅니다. 아마 이러한 변화는 자꾸 물어오는 바리새인들의 불온한 의도를 눈치챘던 모양입니다.
먼저 24절에서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붙이려는 모습을 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붙이는데도 이 맹인이었던 자는 피해가지 않고 당당하게 그가 경험한 사실을 그대로 말합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자신이 ‘지금’ 분명히 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더니 다시 유대인들이 26절에서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은 10절, 15절에서 했던 동일한 질문입니다. 자꾸 이렇게 동일한 질문을 하는 이유는 압박을 주어서 말을 바꾸게 하려고 했고 또 말하다가 모순된 말은 하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몰아붙이는 바리새인에게서 맹인이었던 자는 호락호락 하지 않습니다. 이번에 아주 거칠게 반응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의 의도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느냐!”, “왜 다시 듣기를 원하는가?”,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는가?”라는 상대를 역으로 당황스럽게 만드는 질문을 한겁니다. 맹인이었던 자는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격하게 반응할 줄 알고도 일부로 조롱조로 말했던 겁니다. 더 이상 유대인들의 질문에 끌려 다니지 않겠다는 당당한 의지를 볼 수 있습니다.
당황하고 모욕을 느낀 바리새인들은 욕까지 하며 과민한 반응을 보입니다. 이어서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면서 모세를 더 우월한 인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모세가 예수님보다 더 탁월한 이유는 하나님이 모세에게만 말씀하셨고 예수님께는 말씀하신 적도 없고 어디서 왔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이렇게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와 예수님을 대립하는 존재로 인식하였던 겁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장 46절에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고 기록된 바 있습니다. 그러니깐 오히려 모세의 제자라면 당연히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겁니다. 모세와 예수님의 관계는 약속과 성취의 관계로 끈끈합니다. 이 점은 이미 요한복음 1장 17절에서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맹인이었던 자의 반격이 만만치 않습니다. 30~34절에서의 맹인이었던 사람의 대답이 압권입니다. 30절에 “이상하다”라는 말을 직역하면 “놀라다”로 볼 수 있는데 맹인이었던 자가 놀란 이유는 예수님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는 것과 예수님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맹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 정도의 기적을 일으킨 인물을 율법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모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도 맹인이 눈을 뜬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고 유대 문헌들을 봐도 겨우 한두번 정도 소개만 할뿐입니다. 더 나아가서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이 나은 경우는 어느 기록에서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깐 맹인이 놀랐던 겁니다. 이런 엄청난 일을 행하신 분을 율법에 아주 도를 튼 사람들이 몰랐으니 말이죠. 그리고 이어지는 답변에는 창세 이후부터 출발을 삼아 예수님의 사역이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을 일임을 강조하였습니다. 곧 이 일 자체가 사실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33절에서 역시 강조하듯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면 이러한 일을 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결국 맹인의 논리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분이시라는 겁니다.
이렇게 맹인이었던 자의 대답을 통해서 바리새인들의 논리가 통쾌하게 다 격파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격파에 바리새인들은 한번 더 당혹스러워 합니다. 그 반응이 고스란히 34절에 나타납니다. 맹인이었던 자를 죄인으로 몰아가면서 과민 반응한 겁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내적으로 상당히 초조하게 여겨 맹인이었던 자를 쫓아 내고 맙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이 바로 역설입니다. 요한복음은 역설이 자주 나오는데 7장 42절에도 역설이 나옵니다. 7장 42절을 제가 한 번 읽어보면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으냐 하며”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부정하는 사람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부정하는 사람의 말이 오히려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사용됩니다. 바로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나셨고 다윗의 후손이었던 겁니다. 오늘 본문도 이처럼 역설이 등장하는데 바로 맹인이 진짜 맹인이 아니라 바리새인들 같은 사람이 진짜 맹인이라는 역설이 나옵니다. 대낮에 하나님의 엄청난 사역이 눈 앞에서 보여지는데 그것을 보지 못하니 영적인 맹인인 것이지요. 하지만 맹인이었던 자는 구약 이사야 29장 18절의 약속의 말씀이 성취가 되는 통로로 사용되어집니다.
오늘 우리가 눈여겨 봐야할 대목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맹인이었던 자의 당당한 고백입니다. 이는 그의 부모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사회적 불익과 정치적 불익 앞에 예수님의 사역을 외면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천하으 저 바리새인들 앞에 서면 그 떨림이 얼마나 컷을 까요? 당시 이 세상을 떵떵 거리며 살던 사람들 아닙니까? 하지만 이런 사람 앞에서 작고 보잘 것 없었던 사람은 자신의 고백을 당당히 했습니다. 평생 아팠던 사람이라면 마음이 작을 만도 한데 그는 대범하게 굴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맹인이었던 자의 고백은 우리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오늘날의 바리새인과 같은 큰 벽 앞에 우리는 맹인이었던 자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늘도 말씀을 붙들었으면 합니다. 오늘 그의 위대한 고백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9장 32-33절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9장 32-33절 말씀입니다.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32절: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오늘도 종일토록 묵상하며 말씀을 먹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주님의 큰 일 가운데에서 용감했던 한 사람을 봤습니다. 거대한 권력자들 앞에서 그는 예수님을 당당하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진실로 빛이신 예수님을 경험하고 고백했듯이 우리 역시고 끊임없이 빛이신 예수님을 경험하며 당당하게 고백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서도 바리새인들과 같은 벽들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주님 우리도 맹인이었던 자와 같은 고백을 하기 원합니다. 당당하길 원합니다. 주님 우리와 늘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설령 넘어질 지라도 주님 손잡고 일어나길 원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늘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 역시도 주님의 말씀을 붙잡습니다. 시작하는 이 시간 주님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설교 > 새벽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교문] 민수기 11장 16-25절(민 11:16-25, 민 11:16~25) (0) | 2020.02.16 |
---|---|
[설교문] 요한복음 14장 15-24절(요 14:15-24, 요 14:15~24) (0) | 2020.02.16 |
[설교문] 요한복음 5장 10-18절(요 5:10-18, 요 5:10~18) (0) | 2020.02.16 |
[설교문] 레위기 4장 1-35절(레 4:1-35, 레 4:1~35) (0) | 2020.02.16 |
[설교문] 출애굽기 37장 1-29절(출 37:1-29, 출 37:1~29) (0) | 2020.02.1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