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홍수 이후 가장 큰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십계명 중 1, 2 계명을 정면으로 어겨버렸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9장부터 안정적으로 지속되어 온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깨어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시내산에서의 언약 파기를 의미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완전히 파멸시켜 버리는 위기였습니다. 그럼 한 번 자세하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론에게 요구했던 말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1절에 보면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십계명의 첫 계명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말이었습니다. 그 십계명이 어떤 말이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직접 귀로 들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통해서 말씀하신바 출애굽기 20장 2절에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는 말을 그대로 패러디 한 말이었습니다. 이 말씀도 하나님께서 직접하신 말씀이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말씀을 그대로 자신들이 패러디를 하면 하나님을 거역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얼마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셨던 말씀이었습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드는데 이때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패러디합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라고 말입니다. 이번에는 모세가 아니라 금송아지가 애굽에서 탈출시킨 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6절에서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고 했습니다. 이런데 이 행위는 얼마 전에 출애굽기 24장에 있었던 하나님과의 언약체결때 했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한 행동이었습니다. 이 역시도 패러디였습니다. 그러니깐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과 자신들과 맺어진 관계를 조롱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 중 십계명 1,2 계명을 정면으로 거절하며 홍수 이후 최대의 위기에 봉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이후에 이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맹렬하게 진노하십니다. 이렇게 엄청나게 화가난 하나님께 완전한 용서를 받기 위해서 모세는 세 번의 중보기도를 드립니다. 오늘 본문에는 다음장 초반부를 포함해서 첫 번째, 두 번째 중보기도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진노하실 때 하신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란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말을 하나님께서 패러디한 말씀입니다. 또 중요하게 봐야 할 표현이 바로 “네 백성”, 곧 “너의 백성”입니다. 구약성경을 통틀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네 백성”이라고 말씀하신 경우는 에스겔서 한번 표현하신 것 말고는 여태껏 하시지 않았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태까지 반드시 “내 백성”이라고 표현하셨지 “네 백성”이라고 표현하신 적은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딱 남의 백성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열가지 재앙을 내리 실 때 그때 재앙을 받을 사람들을 보고 “네 백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니깐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멸망의 대상이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또, 부패하였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때 쓰인 단어는 노아에 홍수때 쓰였던 그대로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심판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10절에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좀더 풀어서 설명하면 “나 말리지 마라 이제 내가 그들을 끝장내 버리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앞서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했던 약속을 없던 걸로 하고 모세를 새 조상으로 하여 새로운 구속사를 열겠다는 말씀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느 정도까지 진노했는지 느껴졌는데 이 상황을 어떻게 할지 모세의 행동이 기다려집니다. 하나님을 말리지 않고 명령에 순종할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제안을 받았을까요? 과연 모세는 어떻게 대처할까요?
모세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랍게도 모세는 하나님께 반기를 듭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지금 하시려는 행동은 “악”이라고 두 번이나 말했습니다. 12절에 나오는 “악한 의도”와 “화”라고 의역을 해놨는데 원래는 “악”이라는 단어로 쓰이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하나님을 대적한 것일까요? 모세가 이렇게 하나님께 대항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진노의 말씀 속에서 자비의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대체해서 모세를 세우겠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에 강력한 반대를 할 수 있는 근거를 줍니다. 하나님의 결정에 보이는 작은 틈이랄까요. 하나님이 진노함으로 빠져나갈 앞문을 다 닫으시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뒷문을 열어두십니다. 모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행동을 ‘악’이라고 부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에서 원래 세우신 목표가 있는데 이것을 어기시는 것은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를 한 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의도를 읽고 가장 충성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 아브라함의 의견을 들으셨던 것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또,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11절에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개역개정에는 주의 백성으로 번역되어 있는데 사실상 이 단어는 “네 백성”, 그러니깐 “당신의 백성”이란 말입니다. 아까 전에 하나님께서 남의 백성처럼 말한 걸 맞받아치며 남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백성입니다!라고 강하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깐 진작에 말씀하실 때는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시다가 이제와서 왜 남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따지고 있는 겁니다. 큰 권능과 강한 손을 강조함으로 하나님께서 크게 수고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이스라엘 백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바로 모세는 하나님의 신실에 기대어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명예 그리고 족장들에게 주신 약속을 기억나시게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의 첫 번째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을 취소하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완전한 용서는 아직입니다. 이 후에 모세가 두 번 더 중보기도를 하므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는 예전과 같은 언약을 회복하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이 금송아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금송아지 이야기는 스데반의 설교에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스데반이 죽음 이유가 있습니다. 금송아지와 당시 하나님이 계시다는 성전을 같은 걸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금송아지, 인간의 손으로 만든 성전 그리고 목이 곧은 백성들이라고 표현하며 그때 이스라엘 백성과 스데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을 동일하게 보았습니다. 천하의 그 성전조차도 스데반은 우상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우상은 끊임없이 등장을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우상을 생각합니다. 또, 오늘날 우리의 교회들도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처해있는 교회의 상황은 두말하면 아플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맘몬과 욕망이라는 그 큰 금송아지 앞에서 맥을 못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저 교회를 비판만하고 가만히 있을 겁니까? 마치 남의 교회들을 말하면서 책임을 지지 않을 겁니까? 오늘 우리가 더욱 주목해 봐야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모세의 중보기도입니다. 모세가 중보기도를 하면서 했던 그 내용. 그 내용을 기억하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도 하나님께 지금 우리의 교회들은 남의 교회들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교회들이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어야 합니다. 신실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상황을 극복하려고 많은 쇄신적인 움직임이 있습니다. 서구에서는 이머징 처치, 미션얼 처치, 영국에서는 성공회에서 극복하려는 움직임을 많이 보이고 있습니다. 새로운 교회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가고 있습니다. 성과도 많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희망이 있습니까? 아니면 오늘날 도저히 살아날 것 같지 않은 우리 대한민국의 교회들을 보면서 희망을 가지지 말아야겠습니까? 무엇이 되었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신실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신실하다 것에 희망을 가집니다. 교회당 안에는 희망이 없지만 하나님께는 희망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지만 하나님께는 희망이 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우리의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상 앞에서 맥없이 넘어지고 심지어 하나님을 조롱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을 불과 바로 얼마 전까지 하나님과 약속을 맺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 오늘날 우리의 교회들을 생각합니다. 우상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는 모습이 우리 역시도 같은 현실인 것 같습니다. 맘몬과 욕망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기도 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지금의 교회들이 남의 교회들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교회임을 기억해 주시옵소서. 주님, 당신의 교회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신실한 분이심을 믿습니다. 주님, 우리의 이 상황들 가운데 은혜와 자비를 부어주시옵소서. 오늘 우리의 교회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오늘 헌금 드린 손길이 있습니다. 주님 이 손길을 귀하게 여겨 주시며 하늘의 복을 이 가정 가운데에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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