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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새벽설교

[설교문] 데살로니가전서 4장 1-18절(살전 4:1-18, 살전 4:1~18)

by 카리안zz 2020.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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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축구대표팀 감독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독일 사람인 울리 슈틸리케입니다. 슈틸리케의 커리어 중에 한 가지 의아한 부분이 있습니다. 슈틸리케가 코트디부아르라는 아프리카팀의 감독을 맡고 있었는데 아프리카컵을 예선 1위로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진출했었습니다. 그런데 본선 무대가 시작할 쯤 돌연 사퇴를 해버리는 겁니다. 사퇴 후 그냥 독일로 가버린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했습니다. 분명 좋은 성적을 낼 가능성이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슈틸리케 감독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희귀병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선 무대가 시작할 때 이 아들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던 겁니다. 그리고 얼마 뒤 아들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시간이 지나 몇 년 뒤 슈틸리케는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감독을 맡게 됩니다. 대한민국 청년들을 이끄는 슈틸리케가 이상하게도 청년들을 보는 눈빛이 다른 사람들이랑은 달랐습니다. , 죽은 아이가 지금쯤 자랐으면 대표팀 청년들의 또래이기 때문입니다. 슈틸리케의 그 눈빛에는 고통의 흔적이 있었던 겁니다.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약혼식을 올리고 이제 결혼식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결혼식이 있기 하루 전날, 일어나선 안 될 일이 벌어집니다. 그 약혼녀가 불의의 사고로 그만 죽어버리게 된겁니다. 그 충격으로 그 청년은 고향을 떠나 캐나다로 살게 되는데 그곳에서 10여년을 살게 됩니다. 10여년의 세월동안 마음이 회복되었던지 다시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고 약혼식을 올립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그 약혼녀 역시도 그만 병으로 잃어버리게 됩니다. 또 다시 약혼녀를 잃어버린 이 청년은 다시 고향을 돌아갑니다. 집에 다시 돌아온 이 청년을 어머니가 너무나 걱정이 되었습니다. 혹여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와중에 아들이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제게는 가장 좋은 친구가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며 자신이 지은 노래를 들려 줍니다. 그 노래 가사를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1.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받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2.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 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3.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드리세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 아멘.

 

이 청년은 조셉 스크라이븐이며 우리가 즐겨 부르고 방금도 부른 찬송가 369장의 작사&작곡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이 찬송가에도 누군가의 고통의 흔적이 있었던 겁니다.

 

인간은 어떤 사람이라도 고통의 흔적이 남기 마련입니다. , 이 고통의 끝이 죽음이기에 안 죽는 사람이 없듯이 고통의 흔적이 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여전히 죽음이라는 문제는 우리에게 화두가 됩니다. 몇 년전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가 주목을 받았던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와서 몇 차례 강연도 했는데 제작년쯤인가 KBS에서 강연하던 걸 몇 십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죽음이라는 주제로 하버드대학과 예일대학에서 논쟁이 있었습니다. 베리타스포럼에서 주최한 논쟁이었는데 패널로는 무신론 철학자 셸리 케이건과 저명한 신약학자인 N. T. 라이트가 맞붙었습니다. 유튜브에 영상이 있는데 번역이 안 된 관계로 내용을 보지는 못했는데 현장에 있었던 분 말로는 셸리 케이건은 기독교의 약한 부분을 집중 공격했고 톰 라이트는 그 자리에서 한 편의 논문을 마지 써내듯 철벽방어를 했다고 합니다.

오늘 날 예수의 제자들이 무신론자들에 맞서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듯이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은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다 같이 본문 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13절 말씀입니다.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아멘.

 

여기 소망 없는 다른 이를 다르게 표현하 기독교인을 제외한 모든 인류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이 얼마 되지도 않았을 터인데 바울은 담대하게 나머지 인류에 소망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그저 죽음을 끝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에겐 부활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달리 말한다면, 우리에게 고통과 그 흔적이 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에겐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고통이 모두 걷히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올 것이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였듯이 우리 역시 죽고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바로 그날이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입니다.

 

설교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으십니까? 우리가 늘 하는 이 신앙고백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가 죽고 사셨듯이 우리 역시 죽고 다시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다스리시는 그 나라에서 우리는 늘 주와 함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 고통의 흔적이 있는 나라가 아니라, 이 어그러진 세상이 아니라, 이 고통의 흔적이 깨끗이 사라지는 그 나라. 주와 함께 늘 거하는 그 나라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는 고통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통의 끝인 죽음을 향해 우리는 달려 나가고 있습니다. 이 고통이 너무나 아픈 나머지 삶을 송두리째 우리는 뒤흔들리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 고통의 절정에 달했던 한 청년의 고백처럼 그 고통 가운데 주님을 생각하게 하소서. 주님이 당하신 그 고통을 생각하며 주님의 고통에 동참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고통의 마지막인 죽음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우리도 죽고 다시 살아남을 믿습니다. 우리도 이 고통이 끝이 아님을 믿고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모든 것을 회복하여 고통이 사라져 기쁨으로 뒤바뀌는 날이 올 것임을 믿습니다.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날에서 늘 함께 살고 싶습니다.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오늘 하루 역시도 살아가겠습니다.

오늘 헌금 드린 손길이 있습니다. 주님 이 손길을 귀하게 여겨 주시며 하늘의 복을 이 가정 가운데에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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