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슬라브 볼프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어느 날 볼프의 스승인 위르겐 몰트만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체트닉 그러니까 (세르비아 학살자)들을 끌어안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볼프가 크로아티아 사람인데 세르비아 사람들이 크로아티아 사람들을 인종학살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강제 수용소에 넣었고 여자들을 강간했으며 교회를 불태웠고 도시를 파괴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을 끌어안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했던 겁니다. 볼프에게 있어서 엄청난 갈등을 느꼈던 주제였고 결국 이 주제로 그는 <배제와 포용>이라는 명저를 남깁니다. 흔히 30년 동안 나온 신학 서적 중 최고라고 평가 받고 있습니다.
볼프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배제>는 극단적으로까지 가면 인종학살이나 인종차별의 문제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사나 우리의 역사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제주 4.3 사건이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죽인 사람들 역시 북한에 있을 때 같은 경험을 했던 것입니다. 재산을 몰수 당했고 가족은 무삼하게 살해당했던 겁니다. 그 증오를 눈에는 눈으로 아니 눈에는 피로 갚았던 것입니다. 피의 악순환이였습니다.
또 다른 배제가 낳은 분열이 있습니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입니다. 이 정책은 인종분리정책으로 백인우월주의 정책이었습니다. 백인과 아프리카인을 구분해서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아프리카인들을 차별했던 겁니다. 노예제도 역시 차별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런 인류사에 르네 지라르라는 사람이 독특한 주장을 합니다. 왜 갈등과 배제가 일어나는 걸까? 바로 타인을 닮고자 하는 그 욕망이 갈등의 원인으로 봅니다. 마치 뱀이 하와를 꼬셨을 때 했던 그 유혹에서처럼 말입니다. 결국 이 갈등을 절정에 해당하는데 폭력을 발생합니다. 그런데 이 폭력은 어디에 발생하느냐? 바로 약한 소수자들에게 발생합니다. 흔히 왕따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인류는 이 폭력을 들키지 않게 신성화합니다. 바로 이 대표적인 예가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그렇습니다. 바로 이게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입니다. 이 희생양 이론으로 불교를 분석한 분이 있는데 불교 역시 은폐된 폭력이 있다. 보살들이 대표적인 그 희생양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 지라르는 인류학자라서 모든 초기의 인류의 역사를 보는데 유일하게 이 희생양 메커니즘을 박살낸게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바로 이 성경이 인류의 악의 매커니즘을 폭로하는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장합니다. 복음서는 신화의 죽음이다. 이것을 발견한 지라르를 흔히 인문학계의 아인슈타인, 인문학계의 다윈이라고 불립니다. 과학계의 빅뱅이론과 비견될 수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에베소 교회에서도 역시 배제와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이방인과 유대인의 갈등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편지를 쓸 무렵에는 가이사랴라는 곳에서 유대인과 수리아인들이 거리에서 서로 대량 학살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교회에서도 차별을 두는 것이었습니다. 그 차별의 기준은 바로 할례였습니다. 유대 기독교인들은 할례를 표식을 그리스도인을 정체성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주장을 정면반박하면서 할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피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두 다같이 오늘 본문 13, 14절을 읽었으면 합니다. 읽겠습니다.
13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하나님의 복음은 바로 배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포용에 있다고 바울은 증거합니다.
그럼 오늘 날 대한민국은 어떻습니까? 이 배제의 역사에서 우리의 사회는 어떻습니까? 요즘 자주 들리는 말 중에 “헬조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사는게 대단히 힘들다는 말을 지옥이라는 말을 붙여가면서 사람들이 쓰고 있습니다. 그럼 헬은 알겠는데 조선이라는 말은 조금 엉뚱한 거 같은데 왜 조선인가 의문이 생깁니다. 이걸 어떤 분이 추측하시길 아마 우리나라 사회가 점점 계급화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아서 조선이라는 말이 붙인거 같다고 합니다. 신분제 사회인 조선처럼 지금의 대한민국도 그런거 아냐? 하면서 같이 등장하는 게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이야기입니다. 사실 너무 자조섞인 말인 거 같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사회적 지표를 보면 그렇다고 영 엉뚱한 소리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 계층의 분열만 있습니까? 고등학생 때 처음 겪는 인문계와 실업계의 시선차, 인서울과 지방대학의 시선차이, 대학을 간 사람과 가지 않은 사람의 시선이 다릅니다. 정치적인 분열은 어떻습니까? 전라도와 경상도의 분열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이데올로기로 우리는 분열하고 있습니다. 저 정치가들은 서로의 이데올로기를 자극시켜 더욱더 분열을 가속화 시키고 있습니다. 이 분열의 소리가 가득한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 다같이 오늘 본문 16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16절: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의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외쳐야 할 소리가 바로 화해의 말씀입니다. 이념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앞서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흔히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300년간 혹독한 시절 가운데서 어떻게 초대교회가 무너지지 않았는지 우리는 배워야합니다. 초대교회는 무엇을 증오하면서 하나가 되지 않았습니다. 반공산주의로 반동성애로 반로마주의로 그들의 정체성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피를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삼았습니다. 십자가와 피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랑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결국 제국은 그 사랑에 무너졌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 역시 세상에 중심에서 사랑을 외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배제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 곳곳에서 배제와 분열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 배제들이 우리 가운데 스며들까 두렵습니다. 주님 우리를 보호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더 나아가 이제 배제가 아니라 포용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거하길 원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포용하셨듯이 우리 역시 주님이 포용하신 사랑을 닮길 원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그것들을 해낼 수 없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힘 주시옵소서. 그 힘을 받아 조금 있을 삶의 터전에서 사랑을 외치고 싶습니다. 우리의 말뿐만이 아니라 몸짓으로도 표현되길 원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로마 제국을 무너트렸듯이 오늘 우리 시대에 분열의 제국도 주님의 십자가로 무너질 줄 믿습니다. 우릴 사용하소서.
오늘 헌금드린 손길이 있습니다. 이 귀한 손길을 주님 받아주시고 하늘의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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