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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새벽설교

[설교문] 사도행전 3장 1-26절(행 3:1-26, 행 3:1~26)

by 카리안zz 2020.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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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문제라는 인류의 큰 주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신정론의 문제와 함께 늘 거론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데 왜 이 세상에는 고통이 있는가?’, ‘왜 악이 있는가?’, ‘왜 불의가 있는가?’ 하는 물음들입니다.

한국전쟁을 겪었던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전쟁의 참혹상을 겪고 과연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악한 하나님일거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커서 지식인이 되었으며 사사껀껀 하나님에 대한 논쟁에 참여했고 기독교를 그토록 공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오래 지난 뒤 그의 딸을 통해 그는 극적으로 회심을 하게 됩니다. 마치 C.S.루이스가 자신의 회심을 체스에 비유하며 하나님에게 체크메이트 당했다고 표현했듯이 이분 역시도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과 바둑을 두다가 드디어 외통수에 걸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분의 이름은 이어령 선생님입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고 한 달 뒤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로 자신의 손자가 아무 병명도 없이 갑작스레 죽었던 것입니다. 이 손자는 버클리대를 막 졸업하고 이제 하버드 로스쿨 입학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 어린 시절 미국에서 자랐는데 미국에는 마약에 빠지고 갱단에 빠지는 아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손자는 그 방황하는 같은 또래 아이들에게 특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 나온 아이들이 있으면 꼭 집에 데려와서 본인의 집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사랑이 많았던 아이가 갑작스럽게 아무 병명도 없이 죽어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어령 선생님은 그 즉시 바로 성경책을 덮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도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고는 10년간 하나님을 저주했다고 합니다. 철학자이자 기독교철학자인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역시도 사고로 아들을 잃게 됩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 고통은 우리가 여태까지 믿어온 신앙까지도 흔들리는 계기가 됩니다. 대표적으로 다윈이 있는데 다윈이 진화론으로 하나님과 멀어진게 아니라 사랑하는 딸을 잃으면서부터 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고통의 문제는 이런 유명한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언젠가 한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옆에 계신 분이 포트기에서 뜨거워진 물을 그만 발에 쏟아 다치신 적이 있었습니다. 다급하게 양말을 벗고 화상을 당한 부위에 간단하게 소독을 하고 급하게 병원을 가면서 일은 일단락 되었습니다. 큰 화상은 아니었기에 참 다행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거기 계신 한 분이 말씀을 꺼내시는 겁니다. 자신은 화상하면 마음이 철렁거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들어보니 자신의 아들이 MT를 갔는데 거기서 그만 불이나 심한 화상으로 아들을 잃어버렸다고 말씀하시는 거였습니다. 평소에 얼굴도 항상 밝으시고 전혀 그런 모습이 안 보였기에 더 가슴이 아팠습니다.

고통의 크기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고통이라는 이 문제는 어느 누구나 우리 모두가 다 겪고 있는 문제입니다. 모두가 다 가슴에 하나씩 이 문제와 씨름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 고통에 끝을 달리는 한 사람이 나옵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인데 그 어떠한 고통 중에서도 아마 비교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일 것입니다. 저는 아직도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 책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책은 소설이지만 사실, 맹인 안요한 목사님의 수기를 이재철 목사님이 직접 녹음을 해서 소설가 이청준에게 글로 써달라고 부탁한 책입니다. 특히나 이 책에서 안요한 목사님의 한 동료가 이렇게 태어난 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태어났다는 말에 분개한 장면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평생 못 걷는 사람도 이처럼 누구보다도 고통에 짓눌려서 마음에 상처입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엉망인 이 세상에서 그 절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평생을 걸어보지 못했던 사람이 여전히 오늘도 성전 문 앞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랑은 조금 다른 날이었습니다. 한 낯선 이들이 자신의 앞에 서서 말을 걸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느 사람이랑은 다르게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측은하게 그 고통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돈을 주며 갔지만 이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은과 금은 없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합니다. 평생 걸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걷는 게 어떤 겁니까 되물을 수도 있었을 텐데 베드로와 요한의 눈빛과 손짓이 그 물음을 싹 가시게 했나 봅니다. 눈빛과 손짓에 정말 걸을 수 있겠다는 믿음이 들었던 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런데 정말로 이 사람은 걷게 되었습니다. 은과 금으론 잠시 잠깐 고통에서 해방되었는데 예수의 이름은 못 걷는 이를 그 근본에서 건져 내었습니다.

 

고통 가운데서 자유한 사람은 없습니다. 마르크스가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미 고통이라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상태입니다. 그 상태를 벗어나려고 모든 사람들은 발버둥 치고 있는 겁니다. 누구는 명예로 고통을 잊으려고 하고 누구는 돈으로 잊으려고 하고 누구는 쾌락으로 잊으려고 합니다. 은과 금이 바로 이를 상징하는 대표입니다.

이것이 벗겨지고 난 후에 우리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하나님에게 따집니다. 왜 이 고통이 있는 거냐고요. 사랑의 하나님이 그럴 수 있냐고 따집니다. 오늘 서두에 말했던 이어령 선생님이 그 따지는 사람 중에 한명이기도 했습니다. 손자가 죽은 뒤 성경책을 덮었다던 이어령 선생님은 그럼에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전 한국전쟁의 그 부조리를 겪고 하나님께 따지고 외면했던 그가 이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인간과는 다르게 아무 죄가 없으신데 고통을 받으셨다. 그리고 죽으셨다.’ 그가 이제는 놀랍게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였습니다. 고통 가운데 외면하지 않으시는 아니 이미 그 누구보다도 심한 죽음이라는 고통을 겪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다 같이 한번 읽었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 18절입니다.

 

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세상에 어느 신이 직접 고통을 당했다는 것은 기독교가 유일합니다. 예수의 이름에 능력이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고통은 가끔 멈추긴 할지라도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어느 날 불쑥 나타나서 우리를 괴롭힐 것입니다. 평생 우리를 따라다니며 괴롭힐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서 보듯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와서 만물을 회복시키기 전까지는 우리의 고통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고통을 당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새벽에 기도하러 나오신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당당하게 손을 뻣은 베드로를 기억합시다. 그 기억 그대로 우리의 이웃들에게 손을 내미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어그러진 세상에서 그 끝을 달리는 한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자에게 은과 금을 주며 잠시 잠깐 고통에서 해방되게 했지만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고통 가운데 짓눌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는 고통에서 진정으로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 이 자의 이야기가 사실 우리의 이야기임을 고백합니다. 은과 금이 우리를 유혹하고 경제와 과학이 때론 교육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그 유혹을 우리는 너무나 받고 있습니다. 그 유혹 가운데 예수님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게 해주시옵소서. 보혜사 성령님, 우리의 이 고통의 순간에도 예수님의 이름이 기억나게 하시며 그분도 고통 가운데 우리와 함께하셨다는 사실을 머리와 가슴에 새기도록 해주시옵소서.

조그마한 바람에도 우리는 흔들립니다. 우리는 그토록 연약합니다. 주님, 그렇기에 오직 당신만이 우리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이 고통 가운데에서 주님의 손길에 우리의 신앙이 더욱더 깊어지길 소망합니다.

오늘 헌금드린 손길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손길들을 귀하여 여겨 주시며 하늘의 복을 이 가정에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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