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에는 예수님의 비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달란트 비유로 유명한 본문인데 누가복음에는 달란트가 아니라 한 므나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한 므나는 당시 일용직 노동자 세 달치 임금이라고 합니다.
또, 이 비유는 한때 있었던 유명한 일화를 가지고 와서 비유로 다시 재구성을 한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어떤 역사적 배경이 있냐면 기원전 40년의 헤롯과 기원전 4년의 아켈라우스라는 사람이 팔레스타인의 지배권을 받기 위해 로마황제로 갔던 것에서 이야기의 배경을 두었습니다. 특히나 비유에 나오는 왕처럼 당시 백성들이 아켈라우스를 싫어해 방해까지 했던 것도 비유와 비슷합니다.
이처럼 오늘 비유 속 왕은 당시 백성들이 환영하지 않았지만 왕권을 받고 다시 귀환을 한 날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떠나기전 10므나를 열 사람에게 주고 장사를 하라고 명령을 했는데 돌아온 후 그 종들에게 일의 성과를 들었습니다. 첫 번째 나오는 사람은 1므나로 10므나를 벌었고 두 번째 나오는 사람은 1므나로 5므나를 벌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한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돈을 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심판을 받게 되었는데 그 심판의 이유는 그가 대답했던 것에도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2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1절: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세 번째 종은 주인을 폭군으로 생각했습니다. 맡기지 않은 것을 가져오라 하고 심지않은 걸 거두라고 하는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쁘고 무서운 사람이라서 그냥 가지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는데 정말 무서운 사람으로 생각했다면 그 돈을 그냥 가만히 둘 수 있었을까요? 오늘 주인의 말처럼 차라리 은행에 맡겼더라면 이자라도 얻어서 무서운 주인에게 변명거리라도 생겼을 것입니다.
결국, 세 번째 종은 주인을 믿지 않았고 왜 내 힘을 들여서 주인을 영광되게 해야하는지 의문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주인과 남남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랑 상관없는 사람! 그래서 결국 그는 명령을 어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심판받은 이유입니다.
이 비유의 세 번째 종은 예수님의 공동체에 속해 있지만 예수님이 누군지 긴가민가하며 신뢰하지 않은 부류를 뜻합니다. 갸령 유다 같은 인물을 염두에 두셨을 겁니다. 그리고 심판은 왕을 거부했던 백성들에게까지 확장되는데 이들은 예수님의 반대자들이며 대적자들로 볼 수 있습니다. 곧, 주의 길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주님이 오시는 그날 심판을 당한다는 비유입니다.
이제 비유를 다 하시고 결전의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드디어 입성을 하시게 됩니다. 예수님이 입성을 하실 때는 스바냐 9장 9절의 예언의 성취를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입성은 왕의 축전행사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는 제자의 온 무리가 예수님의 입성을 왕으로서 오시는 분으로 환영을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알았을까 싶습니다. 예수님이 평화를 가져다 주시는 길에는 죽음이 있다는 것을요. 아마 알았다면 이들은 이렇게 순전히 기뻐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제자들이 보는 평화는 로마를 무찔러서 다시 다윗과 같은 왕조를 세우는 것일 수 있겠지만 예수님의 평화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보다도 더 깊숙한 악의 체제. 근본 악을 깨부수러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방해자들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입니다. 마치 출애굽할 때 파라오와 그의 군대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붙잡았듯이 이제 하나님의 새출애굽의 역사 속에서도 악의 세력들은 한통속이 되어 방해를 합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시니 그 방해자들의 핵심 인물들이 속속히 나옵니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백성의 지도자들이 바로 그 인물들입니다. 악의 시스템 아래에서 꼭두각시가 되어 예루살렘을 조종하고 있었던 겁니다. 특히 성전이 그 핵심이 되었는데 그 성전 안에서는 비참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성전이 중심이 되어 백성들의 삶을 강탈하는 강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시기 전에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다고 했는데 이 악해져버린 예루살렘의 모습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레미야 14장 17절의 기록을 참고하면 여호와의 양떼가 사로잡힌 모습 때문이라고 합니다. 곧 심판당할 그 모습에 그분은 눈물을 흘리시고 계십니다.
이렇게 본문은 우울하고 무겁게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삭개오의 이야기를 한 번 주목해 보려고 합니다. 삭개오는 참 나쁜 사람입니다. 세리 중에서도 세리의 대장이었습니다. 세리들은 식민지 사람들의 돈을 마구 마구 강탈했던 사람들입니다. 강탈할수록 자신들의 이익이 커지니까요. 위에 보내는 할당량만 채우면 되었거든요. 그래서 삭개오는 굉장히 부자였을 겁니다. 그런데 이자는 키가 작았다고 합니다. 물론 키가 작았다는 표현이 나무에 올라간다와 연결되어 나왔을 뿐으로 볼 수 있지만 에반스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이 키가 작다는 신체 묘사를 그냥 단순히 볼 수만은 없다고 합니다. 당시 많은 기록들을 참고해서 봤는데 신체적인 키가 작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편협함'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깐 삭개오는 그 마음이 좁은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곧 낮은 자존감을 지닌 사람으로 볼 수 있는데 아마 그가 탐욕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은 것은 그 낮은 자존감을 채우기 위해서 아닐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삭개오가 왜인지 모르게 예수가 보고싶어서 자신의 작은 키를 극복하며 예수님의 얼굴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에 오릅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예수님과 눈을 마주치게 됩니다. 그런데 그걸 넘어서 예수님께서 말을 거시고 어느 누구도 하지 않았던 말을 합니다. 오늘 본문 5절입니다. 다같이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5절입니다.
5절: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예수님의 그 눈빛과 이 말에 삭개오는 자신의 모든 밑바닥을 꿰뚫어보신 예수님을 환대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병에 찌들었던 그 결과물인 재산을 내어놓게 됩니다. 그가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강탈하며 억압하지만 예수님의 자유케 하시며 회복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걸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또 한번 예수님은 누가복음 13장처럼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가족에 포함하면서 더 크게 이스라엘의 회복을 암시하십니다.
그런데 더 큰 이 이스라엘의 회복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던 방법입니다. 죽음입니다. 오늘 본문 7절에 "그는 죄인들과 함께 먹으러 들어갔다"는 말은 이제 "그는 강도들과 함께 죽으러 나갔다"라는 말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새벽기도에 나온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사탄의 억압이 아니라 그 길을 파괴하며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우리 성도 여러분이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길에는 끊임없이 방해자가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방해자는 억압하는 자이며 폭군이며 우리를 죽음으로 빠트리는 자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방해는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데에는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습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서 회복이 되었던 것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주님 우리도 주님을 만나 주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앞길에 방해자가 끊임없이 있겠지만 하나님 당신이 보이신 그 능력을 믿으며 믿음으로써 헤쳐나가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 보이신 모습처럼 우리의 삶에서도 예수님 당신을 보기 원합니다. 조금 있으면 이제 일터로, 또는 삶의 터전으로 나아갑니다. 그 속에서 삭개오를 바라봤던 그 눈으로 우리 역시 바라봐 주시옵소서.
오늘 헌금드린 귀한 손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손길을 귀하게 여겨주시옵시며 하늘의 복을 내려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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