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가시면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 안에 들어가시자 마자 눈에 띄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맨 먼저는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에게 살벌한 눈빛을 보내는 자들이었습니다. 살벌한 눈빛을 보내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손마른 사람을 두고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이지만 손마른 사람들을 고쳐 줄꺼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같습니다. 나쁜 의미로 믿음이 참 좋은 사람들입니다.
어쨌든 회당에 들어가자 마자 예수님은 그 묘한 기류를 대번에 눈치챕니다. 아마 저같은 소심한 사람이었으면 몰래가서 고쳐주거나 밤늦게 찾아가거나 아니면 문제가 안 생기게 다음날 가서 고쳐주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피하지 않으시고 정면으로 도전하셨습니다. 당시 회당은 지금처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앞에 서있고 듣는 사람들은 말하는 사람 앞에서 앉아 듣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사람을 둘러서 벽가에로 빙둘러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손마른 사람에게 가운데로 나오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모두가 특히나 살벌한 눈빛을 보내던 자들을 보라고 도발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로 일침을 놓으십니다. 줄여 말하면 안식일에 무엇을 하는 것이 옳으냐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일침을 놓으셨던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안식일이 왜 생겼는지에 대해서 일침을 놓으시면서 상기시키셨던 겁니다.
안식일이 생겼던 이유는 애굽에서 노예로 극심한 노동에 시달리며 죽어가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의 선물로 주신 거였습니다. 고로 안식일의 목적과 정신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잊어버리곤 그저 습관적으로 굳어진 전통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동의가 되지 않아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침묵에 그 마음이 굳어짐에 분노를 하십니다. 탄식을 하십니다. 그리고는 손마른 자의 손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굳어진 전통에 저항을 하셨습니다. 최근 구약신학을 대표하는 월터 브루그만의 책이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저도 아직 읽어보진 않았는데 책 제목이 참 인상적입니다. 제목은 바로 <안식일은 저항이다>입니다. 안식일이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굳어져버린 예수님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역시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그보다 더한 것 같습니다. 오늘날 쉰다는 것은 아주 비효율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또, 엄청난 경쟁시대가 사람들의 마음을 차가워지게 만듭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극심한 경쟁사회가 사이코패스, 그러니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낸다고 했습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의 분노로 나타난 뜨거움은 말 그대로 저항입니다. 브루그만의 책 제목처럼 안식한다는 것은 시대로부터의 저항입니다.
예수님의 이 저항과 도발에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들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저항과 도전에 본인들의 노선에서는 함께할 수 없는 헤롯당 사람들과 손을 잡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그림자는 여기서부터 조금씩 드리워집니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 올라가시며 열두 명의 제자들을 뽑으신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안식일과 마찬가지로 출애굽기가 떠오릅니다. 모세가 산을 올르는 장면과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는 장면이 묘하게 겹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창조하심이 산을 배경으로 했듯이 예수님께서 산을 배경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의 창조가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세우신 것이 바로 새로운 이스라엘의 회복을 암시합니다. 그들은 이제 보내심을 받고 말씀을 전파하며 귀신을 내쫒아내는 권능을 가지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스가랴서의 말씀처럼 귀신을 내쫓는 것은 새로운 이스라엘의 회복될 때라는 신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메시아 시대의 특징으로 여겨졌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 그리니깐 하나님의 가족은 이제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당연히 따라나옵니다. 이런 물음이 생각나는 찰나 예수님의 가족이야기가 살짝 등장합니다. 앞서 들으신 이런 예수님의 행동에 같은 혈통을 지닌 가족들이 예수님을 미쳤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미친 것은 귀신들린 사람으로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예수님을 귀신들린 사람으로 본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서기관들입니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혈연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혈족들이 예수님을 못 알아보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의 조건이 혈연적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겐 묘하게 비슷한 점들이 보입니다. 두 집단 모두 예수님이 귀신들렸다고 보았던 점도 닮았습니다.
예수님의 가족과 서기관들에 대해 이야기했던 이유를 오늘 본문 31절~35절이 명확하게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의문을 제시합니다. 33절에 누가 내 어머니고 내 동생이냐? 그러니깐 누가 내 가족이냐라는 화두를 던집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누가 하나님의 백성들이냐? 라는 핵심을 찌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오늘 본문 35절 말씀입니다. 다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35절: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나님의 가족은 하나님의 백성은 혈연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들이 내 형재요 자매요 가족이요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하나님 나라의 선언식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이제 시작될 것이라는 그 신호를 예수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이 시작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 결코 상관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는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제가 참 부러워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2012년 한 나라의 대통령이 탄핵을 당합니다. 탄핵의 사유가 두 가지 있는데 우리로는 조금 놀랍습니다. 첫째는 일반인보다 4%낮은 금리로 대출을 한 것입니다. 이는 대통령의 윤리성에 금이 간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두 번째는 이유가 결정적인 이유였습니다. 공항으로부터 가족들이 공짜 티켓 9장을 받았습니다. 그게 결정적이 탄핵 사유가 되어 한 나라의 대통령직을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요아킴 가우크라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가우크는 그 나라 민주화 운동을 비밀리에 진행하다가 비밀 경찰에게 모진 고문과 감시를 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대통령이 된 이유는 단 한가지였습니다. 그는 신앙의 양심에 따라 국민의 생명과 평화를 위한 헌신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요아킴 가우크, 그는 목사이며 지금 독일의 대통령입니다.
이 나라 수상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습니다. 아시다 시피 메르켈은 독일 기독교민주당 소속으로 독일의 여성 총리로서 유럽을 이끄는 지도자입니다. 메르켈이 유럽을 이끄는 지도자가 된 데에는 한 사람의 모델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녀의 아버지입니다. 메르켈의 아버지도 역시 목사님이십니다. 메르켈이 아버지에게 강렬한 영향을 받았던 것은 바로 목회자적 마음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동독과 서독이 서로 양분될 때 동독으로 들어간 인물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명했습니다. 목사로서 아픔을 겪는 자기 민족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고 절망 중에 있는 동포와 함께 부활의 희망을 노래하겠다는 일념하나였습니다.
독일의 현자로 뽑히는 요하네스 라우 대통령은 어떻습니까? 요하네스 라우 장로님은 정치판에서 산상수훈을 실현하는 게 꿈이었던 분입니다.
부러움의 이유가 독일이 망해가다가 잘 살게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 속에서 신앙이 이 땅에서도 스며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부러워만 할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가 보여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도 이루워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 진다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 삶 속에서 들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그냥 가만히 교회를 다니니깐 설교를 듣고 있으니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어진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에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역시 시작되고 있습니다. 시작되는 이 시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구하며 그 뜻대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주님이 저항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상에 단단히 묻여있는 차가운 마음으로부터 주님은 뜨거움으로 그것을 깨트렸습니다. 주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역시 차가움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역시 세상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또, 하나님 나라의 회복 시작되었다는 선언식을 보았습니다. 이제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이 하나님의 나라는 혈연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이 뜻을 구하며 살아가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단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영역에 해당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가정, 정치, 사회, 문화, 경제, 교육 등 우리가 디디고 있는 땅 모든 곳에서 하나님 나라 회복이 일어날 것임을 믿습니다. 이 회복에 우리를 사용하소서.
오늘 헌금 드린 손길이 있습니다. 이 손길들을 귀하여 여겨 주시며 하늘의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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