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이 쓰여진 시기가 넓게 잡으면 주후 50년과 90년 사이로 추정을 합니다. 아마 누가가 60년대 후반이나 70년대 초반에 책을 쓰고 있었다면 당시 팔레스타인을 휩쓸고 있었던 살벌한 전쟁이 책을 쓴 이유에 한몫을 했을 겁니다. 이유인즉, 4년간의 포위 끝에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망하게 되었는데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여러 동네와 마을 역시 쑥대밭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공동체도 뿔뿔이 흩어졌고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야기들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기에 누가는 이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겨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복음이 이제 팔레스타인 지방을 넘어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는 시점에 예수님에 대한 왜곡된 정보들과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유포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거짓된 정보들이 아닌 권위가 있고 정리된 이야기가 필요했습니다. 그게 바로 누가복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목해 볼 단어가 있는데 본문 2절에 바로 예수님의 목격자들입니다. 개역성경에는 본문 2절이 목격자라고 되어 있는데 헬라어 원문으로 본다면 ‘말씀의 일꾼이 된 목격자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 ‘목격자들’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포함한 예수님의 사역을 직접 처음부터 본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기억된 예수님의 이야기가 바로 누가복음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 생각해 보아야 될 게 있습니다. 지금처럼 사진도 동영상도 없던 시기에 예수의 목격자들의 말은 어떻게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건, 목격자들은 기억된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실천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말이 먹히는 것이지요.
미국을 대표하는 정치학자이자 기독교 윤리학자인 라인홀드 니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니버 전공으로 박사학위 받고 서울대나 다른 유수의 대학에서 가르치시는 분들이 있을 정도로 저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니버를 얘기하려는게 아니라 그 대척점에 있는 존 하워드 요더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요더는 니버와 마찬가지로 미국을 대표하는 기독교 윤리학자입니다. 저도 요더 입문서인 <근원적 혁명>을 읽고 혼자만의 대결을 펼쳤는데 그가 초반부에 쳐둔 덫에 말려 꼼짝달싹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요더가 죽은 후 시간이 지나고 최근에 폭로기사 하나가 떳습니다. 그 기사는 바로 요더에 성추문 폭로 기사였습니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이고 메노나이트 교단에서는 그의 명성 때문에 쉬쉬해오던 일이 터져버렸습니다.
이론은 탄탄하지만 이제 그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을까 싶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윤리학자이기에 실망감은 더하며 그의 말에 의미조차 상실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점을 잘 착안해서 나쁜데 써먹은 사람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문구는 “메시지를 비판할 수 없다면 메신저를 비판하라”입니다. 그래서 나치의 선동가 괴벨스는 이런 말을 했답니다. “나에게 한 문장만 다오.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 중요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렇게 보듯이 말의 논리가 탄탄하다고 그 말들이 전부 의미가 있거나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 걸맞는 것이 보여져야 합니다.
오늘 누가복음에 언급된 예수님의 목격자들은 아마 기억된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살았던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바로 그들의 증언으로 인해 2000년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우리가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의 목격자로 계속 살아갈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새벽시간에 모인 성도 여러분들! 우리도 예수님의 목격자들을 본받아서 오늘 이 시대에 복음을 증언하는 목격자들이 됩시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주님을 처음부터 목격했던 목격자들에 대해 들었습니다. 초대 교회 부흥의 한 부분이 목격자들의 증언과 그들의 모습이 일치했다는 것에 있음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이 목격자들의 역할을 이어 받으려고 합니다. 오늘 이 혼탁한 시대에 주님의 목격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기억했듯이 우리 역시 예수님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보혜사 성령님, 오늘 하루도 예수님이 기억되도록 우리를 도와 주시옵소서.
오늘 헌금 드린 손길이 있습니다. 이 손길들을 귀히 여겨 주시며 하늘의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설교 > 새벽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교문] 누가복음 19장 1-48절(눅 19:1-48, 눅 19:1~48) (0) | 2020.02.15 |
---|---|
[설교문] 누가복음 13장 1-35절(눅 13:1-35, 눅 13:1~35) (0) | 2020.02.15 |
[설교문] 마가복음 3장 1-35절(막 3:1-35), (막 3:1~35) (0) | 2020.02.15 |
[설교문] 마태복음 20장 1-34절(마 20:1-34), (마 20:1~34) (0) | 2020.02.15 |
[설교문] 마태복음 9장 1-38절(마 9:1-38) (0) | 2020.02.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