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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새벽설교

[설교문] 요나서 1장 1-17절(욘 1:1-17)

by 카리안zz 2020.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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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요나서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니느웨에 가서 그들의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다고 전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을 듣자 요나가 다른 예언자들이랑은 다르게 하나님에게서 도망을 칩니다. 그것도 우리로치면 하나님이 부산으로 가라고 했는데 정반대 방향인 서울로 향하는 모습을 요나는 보입니다.

100번 봐줘서 한 번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칩시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나왔듯이 배 안에서의 모습은 참 요나가 왜 저럴까 싶습니다. 그냥 하나님 말씀을 강하고 담대하게 가서 전하면 되는 것이지 왜 자꾸 도망갈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곳에서 정반대에 방향인 곳으로 배를 타고 도망을 치다 하나님께서 보낸 폭풍우를 만나게 됩니다. 어찌어찌하다가 배 안의 사람들이 요나 때문에 그렇게 된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요나에게 어떻게 해야되는지 묻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요나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12절 말씀입니다. 한번 다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요나는 하나님께 폭풍우를 멈추게 해주시며 이제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가겠습니다하는 그런 기도도 아니고 요나는 죽기를 결심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게 죽기보다 더 싫었던 겁니다. 그럼 이쯤 되어서 왜 요나가 목숨을 버려서까지 니느웨에 가는 걸 외면할까 의문이 듭니다.

 

왜냐면 니느웨는 이방 나라 앗수르의 수도였습니다. 당시 니느웨는 최전성기는 아니였지만 팽창하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많은 나라들을 침략했으며 정복했습니다. 그 가정 가운데 아주 악독한 짓거리들을 많이 하기도 했습니다. 남을 상처 입히고 짓밟고 고통에 처하게 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니요! 요나는 먼가 꺼림찍했던 겁니다. 혹시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하려는게 아닐까?하는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에 심판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요나는 속마음을 하나님께 말합니다. 요나서 43절인데 제가 한 번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43: 그는 주님께 기도하며 아뢰었다.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리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다시스로 달아났던 것도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을 도망친 이유가 분명해졌습니다.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혹시나 용서하실까봐 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가라는 곳 정반대에 갔고, 죽기를 선택했습니다. 죽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을테니까요. 요나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는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 용서할 수 없는 누군가 있을 겁니다. 도널드 밀러라는 미국의 기독교 작가가 있습니다. 기독교 작가이면서 베스트셀러 작가인데 의외로 미국 젊은이들이 굉장히 많이 읽는다고 합니다. 이분이 쓴 책 중에 최근에 <아버지의 빈자리>라는 책이 출판되었습니다. 아버지 없이 자란 밀러가 본인의 살아온 과정을 담은 내용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자신을 버렸기에 분노로 자랐지만 결국에는 아버지를 용서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 책을 쓴 계기가 있습니다. 미국 대다수의 범죄자들 중 85%가 아버지 없이 자란 아이들이라는 통계를 본 게 그 계기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로 가득했고 아버지는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 이야기가 단순히 미국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 단순히 아버지 없는 아이들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나라 청소년 폭력 원인중 큰 비율을 차지하는게 가정불화입니다. , 청소년 자살 원인 1위가 학업 문제가 아니고 가정불화라고 합니다. 우리 아이들 역시 아버지의 관계가 어그러졌습니다. 물론 이 문제는 비단 청소년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 시대 자체가 올바른 아버지상을 가진 적이 잘 없기에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누군가에게는 아버지의 부재가 고통이라면 누군가에겐 아버지의 존재가 고통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을 누군가는 아버지 부재의 시대라고 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는 시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용서할 수 없는 모습을 보였던 대표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탕자의 형입니다. 오랜 방황세월에 동생은 돌아왔고 아버지는 그 아들을 받아줍니다. 그 모습을 보고 탕자의 형은 아버지를 당신이라 부를 정도로 분노를 표했습니다. 그는 잔치도 동생도 결국 거부해버립니다.

 

오늘 이 모습을 보며 떠오려야 할 분이 계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모습이 떠올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말만 그렇게 하셨던 분이 아니라 진정 그분은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분은 당시 원수로 여겨졌던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셨고 포용해주셨습니다. 참된 아버지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요나도, 탕자의 형도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입니다. 사실 우리가 탕자의 형이었고 요나였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도 이처럼 용서할 수 없는 누군가 한 명쯤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우리는 요나처럼 외면했습니다. 되려 하나님께 그 사람은 나에게 고통을 주었고 악을 행하였으며 절대 용서받으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떠올립시다.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신 그분을 떠올려봅시다. 우리의 이 모습에 아파하시는 그분의 얼굴을, 그분의 눈빛을 떠올립시다. 오늘 하루 이런 예수님의 깊은 눈동자를 그리는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외면하는 요나의 모습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요나에게 니느웨 사람들은 절대 용서할 수 없으며 심판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나는 혹시나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해 주실까봐 하나님에게서 도망쳤습니다. 하나님, 이 모습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에게도 마음속에 용서할 수 없는 그 누군가가 있는 줄로 압니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었고 상처를 주었으며 악을 행하던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셨던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힘으로는 이 원수들을 사랑할 힘이 없습니다. 성령님, 그 힘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그리고 고백합니다. 내 원수를 사랑하겠습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그 사람을 용서하겠습니다.

오늘 또 헌금드린 손길이 있습니다. 이 손길 위에 하늘의 복을 더하여 주시옵시고 헌금드린 이 마음을 귀하여 여겨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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