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목사님이 되기 전에 사업을 하셨는데 젊은 나이에 아주 크게 성공을 했습니다. 1970년대에 잘 나갈 때는 하루에 천 만원씩 벌기도 했습니다. 당시 강남의 반포아파트 42평이 8백만원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돈으로 강남에서 가장 좋은 아파트를 사고 가장 좋은 차를 샀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낮이면 골프장에서 살았고 밤이면 살롱과 요정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그렇게 살았더랬습니다. 돈이 생기니 홍콩, 파리, 뉴욕 등지의 밤거리를 누비고 다닐만큼 술에 취해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모태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쾌락과 욕망을 채우고 난 뒤에는 마음속에 갈등과 고통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이 목사님은 자신의 이 신앙을, 이 기독교를 이범선
소설가의 표현을 빌려 “구두 속의 돌멩이”같다 말했습니다. 이 구두 속의 돌멩이처럼 내가 넣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빼기도 모호한 그런 돌멩이가 바로 자신에겐 기독교라고 했습니다.
늘 사업이 잘 되지만은 않았습니다. 또 실패도 했고 다시 성공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최고의 프로젝트를 준비하기 했습니다. 당시에는 전혀 교류가 없었던 소련과의 항공계약을 채결하려고 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반드시 성사시키라 할 정도록 나라에서 같이 추진한 사업이기도 했습니다. 거의 체결이 될 직전까지 왔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고가 일어납니다. 대한항공 비행기가 소련의 전투기에 격추당하는 사건이 발생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10.26사건이 일어나 사업의 마지막 활로였던 일이 모두 어그러져 버립니다. 그렇게 잘 나갔던 그 목사님은 그날 이후 점점 빚이 늘어가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항상 술을 먹고 문 앞에서 벨을 누른 다음에 가족을 다 깨운 후 저녁까지 먹고 그렇게 잤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벨을 누르고 싶지 않고 그냥 키로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고 싶었답니다. 들어가보니 아내가 성경을 보다 잠들었는지 성경 곁에 두고 엎드려 자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 밑에 일기장이 있길래 한 번 들쳐보았답니다. 일기의 내용 중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나는 오늘도 버스를 타고 수유리 너머로 갔다. 시골길을 하염없이 걸으면서 오늘도 역시 어김없이 죽음을 생각했다. 약을 먹고 죽을까 아니면 손목을 그어 죽을까... 그러나 그것은 내가 취할 길이 아님을 나는 다시 한 번 더 확인하고 되돌아 왔다.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께서 주님의 뜻을 위해 내게 주신 남편이므로 나는 사랑해야만 한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사랑하라 명령하시므로 나는 사랑해야만 한다.
주님! 도와주세요. 나의 약함을 주님께서 잘 아시잖아요.
그 목사님이 이 글을 읽고 심장이 멎는 느낌이 들었답니다. 그리고는 하염없이 울었다고 합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혼한 이후 매일 밤 12시가 넘어서야 술 냄새를 풍기며 귀가하는 집사 남편을 맞으며 아내가 씹어야 했을 배신감은 또 얼마나 컷을까? 아내가 나 때문에 번민과 고통의 소용돌이 속에서 눈물 흘리던 그 순간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던가? 아내가 오직 믿음으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가? 내 마음속으로부터 끊임없는 질문들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그러나 나는 그 많은 질문에 단 한마디의 대답도 던질 수 없었다. 아내가 죽음의 절망 속에 빠져갈 때 나는 환락의 자리에서 나의 쾌락만을 좇던 한심한 인간이었으니 무슨 대답할 말이 있었겠는가? 그래서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태어나서 그날처럼 울기는 처음이었다. 내가 14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그처럼 울지는 않았다.
나는 주님을 향해 회개의 울음을 터뜨렸다. 잘못 살아온 내 인생에 대한 회개, 자기 착각과자기 도취에 빠져 있었던 어리석음에 대한 회개, 목적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욕망을 위하여 하나님을 도구로 삼았던 그릇된 믿음에 대한 회개. 숱한 배신의 삶으로만 일관해 온 나같이 추하고 역겨운 죄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리가 만무하리라 생각되었다. 나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영혼 아니 저주받은 영혼이라 생각되었다.... 도대체 얼마나 울었을까? 누군가 등 뒤에서부터 나를 포근히 감싸주는 것을 느꼈다. 혹시 나의 울음소리를 듣고 잠을 깬 아내인가?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다시 눈을 감았지만 그 순간 이내 누군가가 또 나를 감싸주었다. 다시 뒤를 돌아보았지만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이상스럽게 생각하며 또 다시 눈을 감았을 때, 내 마음속 저 깊은 곳으로부터 세미한 음성이 울려왔다.
“나의 사랑하는 재철아,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버린 적이 없단다. 네가 나를 버리던 그 순간에도 나는 줄곧 너와 함께 있었단다. 앞으로도 나는 영원토록 너와 함께할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 영혼이 주님께로부터 버림받고 저주받았다 괴로워하며 그 비통하던 밤, 주님의 영은 바로 그곳에 충만한 사랑으로 나와 함께하고 계셨다. 그날 비로서 나를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렇게 변함없는 사랑으로 나와 함께하고 계셨던 것이다.
오늘 악의 길을 걷다가 돌이킨 이 목사님은 신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설교가 중 한 분인 바로 이재철 목사님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스겔서 33장 11절 말씀입니다. 다함께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11절: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오늘 본문 말씀에 돌이킴에 대해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임무를 주시는데 바로 파수꾼의 임무를 주십니다. 파수꾼이 백성에게 경고하는 그런 역할을 맡았는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이 바로 그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경고는 바로 악에서 돌이키라는 메시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악한 길을 가는 두 경우가 나옵니다. 한 경우는 바벨론의 포로로 가지 않고 이스라엘 땅에 남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뜻에 맞춰 해석했으며 칼을 믿어 가증한 일을 행했고 우상들을 섬겼으며 이웃의 아내들까지 넘보았습니다.
다른 한 경우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잘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달콤하게도 여겼고 입으로 사랑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속은 자신의 이익을 따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악한 길을 두고 돌이키라 말씀하셨습니다.
돌이키라고 말씀하신 또 한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외쳤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여기서 회개를 돌이키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 길을 돌이켜 나에게로 오라!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돌이키라를 다르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에 우리를 유혹하는 악한 세력들이 있습니다. 이 악한 세력들이 우리를 무너트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우리를 위해 고난과 죽음을 견디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릅시다.
오늘 하루 예수님을 따르는 이 믿음을 보이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설교 > 새벽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설교문] 에스겔서 44장 1-31절(겔 44:1-31) #150 (0) | 2020.02.14 |
---|---|
[설교문] 에스겔서 39장 1-29절(겔 39:1-29) (0) | 2020.02.13 |
[설교문] 에스겔서 25장 1-17절(겔 25:1-17) (0) | 2020.02.13 |
[설교문] 에스겔서 21장 1-32절(겔 21:1-32) (0) | 2020.02.13 |
[설교문] 이사야서 41장 1-29절(사 41:1-29) (0) | 2020.02.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