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오늘 본문은 사랑에 빠진 한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표현하는 내용입니다. 남자의 시선은 눈에서부터 아래쪽으로 내려갑니다. 먼저 눈에 대한 표현을 봅시다. 사랑하는 이의 눈(1)이 비둘기 같고 머리털(2)은 염소 떼 같다고 표현을 합니다. 이(3)는 양같고, 입술(4)은 홍색 실 같으며, 입(5)은 석류 한쪽 같다고 합니다. 목(6)은 다윗의 망대, 가슴(7)은 사슴 같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사실 이렇게 보면 머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겠습니다. 염소, 양, 홍색실, 사슴 등 우리 주변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한 번에 알아 들을 수 있었겠죠. 머 우리식으로 표현 하자면 계대 정문 앞길 조명의 빛에 비친 그대의 눈동자. 계대 정문에 길이 있는데 저녁에 조명 빛을 받으면 정말 아름답거든요. 아니면 머 팔공산 이슬 머금은 풀잎 같이 라던가. 우리나라 문화권에서 표현이었으면 확 와닿았을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사랑의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느낌을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을 보면 사람의 몸을 정확하게 관찰을 합니다. 과학적으로 수치화 시키죠. 그래서 키는 몇, 팔 길이, 다리 길이, 눈은 어떻게 생겨야 해며 코는 어디까지 솟아야 하며 머 그런 자세히 수치를 정합니다. 그래서 서양은 보면 다비드 상이나 그런 조각상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어떻게 생겼는지 감이 잡히십니까. 도저히 오늘 본문으로는 도대체 얼마나 예쁘길래? 라는 물음은 생각나지만 아! 그렇게 생겼구나 그래서 예쁘구나라는 감탄은 나오지 않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표현으로 나와야지 너를 보고 수치를 계산한는 것은 굉장히 기계적입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죠.
그런데 이 남자가 이 여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9절을 한번 볼까요.
“내 누이,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여기서 누이는 당시 사랑하는 사람을 표현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그럼 내용을 보면 눈 짓 한 방에 이 남자가 깊이 사랑에 빠져 버렸습니다. 이걸 제일 잘 표현한 cf가 있는거 같습니다. 바로 포카리스웨트 광고입니다. 나나나~ 바로 이 눈 짓 한방을 이리 잘 표현을 하다니. 남자들은 도대체 날 좋아하는 거랑 포카리라 먼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자기도 모르게 손이 포카리로 갑니다.
어쨌든 저에게도 이런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좋아했냐면 고등학생 때였습니다. 저희 고등학교에서 영화 촬영을 했었습니다. 여자 주인공이 탤런트 김사랑입니다. 미스코리아 출신이죠! 저는 우연히 운이 좋게 김사랑 씨를 아주 가깝게 봤어요. 한 2~3m 거리에서 봤죠. 우와~~~~예쁘다!! 이런 반응이 나와야 하는데 그 때 참 좋아했던 자매에게 문자를 날렸더랬죠. “너 보다 안예뻐. 너가 훨씬 예쁜데?”
그런데 아가서 4장의 이 남자와 저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아가서의 4장에서 사랑을 표현하는 이 남자는 지금 자신의 신부에게 표현하는 사랑입니다. 저처럼 한낫 지나가는 마음이 아닙니다. 결혼의 사랑은 영원을 맹세합니다. 얼마전 저는 김사랑 보다 예쁘다는 그 자매를 결혼식장에서 봤습니다. 허참. 제가 그 때 왜그랬는지;; 그런데 결혼을 한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맹세를 합니다. 결혼에는 그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서 16절에는 그 표현입니다. 당신만 사랑하겠다는 그 표현입니다.
아가서 4장 1절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라고 표현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어여쁘다라는 표현보다 사실 아름답다라는 표현이 원어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다시 고쳐 읽으면 “아름다워라, 나의 사랑! 아름다워라”로 다시 읽을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이 아름답다고 고백하는 이 사랑을 창세기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31절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좋았던 이 창조세계는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어그러진 세상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 9-11을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오늘 아가서 4장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는 단순히 사랑을 고백하는 차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결혼한 한 남자의 한 여자만을 영원히 사랑한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영원을 고백하는 사랑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어찌 인간이 영원히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시늉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주님의 은혜입니다.
풀은 말랐고 꽃은 시들었습니다. 우리의 마음 역시 식었습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고백은 영원합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는 주님의 사랑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사랑 고백은 유한하며 말뿐이지만 주님의 사랑은 영원하며 실로 이 땅에 그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말뿐인 사랑이 아니라 행동으로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목자 잃은 양들을 바라보셨을 때 그토록 애통해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목자가 있는 양들 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양들 입니다. 주님이 이 양들을 얼마나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는지요. 주님, 당신이 우리의 목자라는 것 그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길 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살길 원합니다. 성령님 도와주십시오. 오늘 기도가 끝난 뒤 세상 밖으로 나갈 때에도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쳐 보이는 삶을 살도록 성령님 도와주시옵소서.
주님, 오늘 새벽재단에 주님께 헌금을 드렸습니다. 이 헌금을 받아 주시옵시고 하늘의 복을 내려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주기도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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