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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신학

[책리뷰] 토마스 롱 - 고통과 씨름하다

by 카리안zz 2020.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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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토마스 롱. 유명한 설교자이다. 작년에 토마스 롱이 한국에 왔는데 조용했다. 내 느낌으로는 팀 켈러와 비교해도 설교자로 밀리지 않을 것 같은데 팀 켈러가 한국에 왔을 때와 비교하면 너무 차이가 났다. 홍보의 중요성을 느꼈다. 그래도 5월에 톰 라이트 오는 거는 좀 다르겠지. 신학계의 슈퍼스타이니!

 요즘은 고통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한창 10대때 내 주요 고민 중 하나가 이 고통이었으나 30대 중반을 향하는 지금은 그닥 고통에 관심이 안 생긴다. 지금은 그때보다 살만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4년 전에는 조금 관심이 있었나 보다. 아마도 이 책을 출판한 사장님께서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하기에 구입했던 것 같다. 

 이 책은 신정론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그림을 그려준 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리스본 대지진 이후 사람들이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계신가?하는 물음이 생겼다고 말한다. 아마 C. S. 루이스의 어떤 책인지는 모르겠지만(고통의 문제였던가?) 거기에도 리스본에서부터 그 물음이 생겼다고 읽은 적이 있다. 다른 책에선(팀 켈러였던가?) 그 당시 철학자들의 책들을 소개하며 정말 근거를 제시해 주었다. 이 책에서도 그 리스본의 사건을 조명한다. 

 

 책 전체적으로 설명을 잘 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답을 딱 내놓지는 않지만 고통에 대해서 큰 그림을 설명해 준달까? 고통. 평생을 안고 가야할 주제이고 목회자들에겐 늘상 붙어다녀야 할 주제이다. 당신의 교인들이 그 고통 가운데 있으니깐. 비록 내가 고통 가운데 지금 있지 않지만 고통 가운데 있는 성도를 위한다면 고통에 관한 책은 꼭 읽어보자. 고통은 논리적인 문제가 아니지만 책들에게 고통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사람들의 흔적은 알 수 있다. 물론, 마주하는 고통없이 글로만 읽는 고통은 아니었으면 한다. C. S. 루이스가 <고통의 문제>에서 논리적으로 접근한 것을 <헤아려 본 슬픔>에서 후회했다. 고통을 마주한다는 것은 논리로 생각하는 것과 차이가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거기에 대해서 깊이 생각한 흔적들을 없이 여기지는 않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도 고통 가운데 계셨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이 책을 추천한다. 

 

 


 

 

 

메모

리스본에서 일어난 지진이 그 도시를 폐허로 만든 이유는 분명하다고 쳐도, 이것이 서구 문화와 지성사에서 대규모의 재난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 (27)

- 나도 정말 궁금!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 다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정의될 수 있다면, 대체 하나님의 역할은 무엇인가? 심지어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32)

- 응당한 질문!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은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 다른 대안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36-7)

- 우리는 원래부터 당연하지 않았다. 이것은 서구의 이야기

 

 

 

계몽주의와, 계몽주의가 수반하는 탈신화화를 통해서만 우리는 세계와 하나님을 분리된 실재로(유신론), 심지어 하나님이 없는 자연 세계를(무신론) 말할 수 있다. (37)

- 유신론이 아니라 이신론 아닌가?

 

 

 

한때는 이런 참사를 포용할 수 있었던 윤리적-신학적 범주를 단숨에 압도해버렸다. 그 끔찍한 재앙이 도시를 덮쳤을 때 리스본 시민들은 하나님께 기도와 찬양을 드리고 있었다. 이 엄청난 참사는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경건한 사람이든 타락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그 누구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임했다. 만일 이런 끔찍한 사건을 일으킨 지적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누구든 간에, 피에 굶주린 그의 폭력성은 무작위적이고 무분별하다고 볼 수 있었다. 만성절에 일어났던 리스본 참사 배후에 도덕적 의지가 존재했다면, 그것이 전달할 수 있었던 도덕적 교훈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 의지적 잔인함은 극단적이었다. (41)

- 설명을 잘 하신다.

 

 

 

1장을 다 읽고 난 뒤 메모 (46)

- 아! 문제제기를 이렇게 와닿게 설명하다니! 너무나 명쾌하다. 사고의 전환을 이리도 간결하게 설명하다니. 우리가 마주하는 큰 질문의 인트로를 이렇게 잘 설명을 했다. 앞으로 전개가 기대된다. 왜 김요한 목사님이 이 책을 빨리 출판하려 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은 1장이었다!

 

 

 

칼 라너는 위르겐 몰트만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툭 까놓고 말해, 하나님이 나와 동일한 곤경을 겪고 계시다는 사실은 내가 엉망진창인 상태와 혼동, 절망을 벗어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과정 신학의 하나님 개념을 향해 라너는 이런 멋진 질문을 던졌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내게 어떤 위로를 줄 수 있단 말인가?" (129)

- 음... 그게 위로가 안 된다고?

 

 

 

여기저기서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정론의 문제에 관한 한 우리가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와 선하심은 결국, 사랑과 공의와 선함에 대한 우리 인간의 이해가 하나님께 투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148)

- 그런데 인간의 이해를 바탕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것을 인식하나?

 

 

 

5장을 다 읽고난 뒤 메모(236)

- 이 장에서 "가라지 비유"는 참신했다. 그의 설명이 나름의 생각거리를 준다. 솔직히 4장까지 읽었을 땐 왜 이 책을 그토록 극찬했을지 의문이었지만 이 번 장에서 그 이유를 알 것만 같다.(지금보니(20/1/24) 1장과 4장 사이의 평가가 참 극단이었다.)

 


 

 

책 맛보기

"어느 특정한 순간, 유럽에서 일어난 지진은 신앙의 기초를 뒤흔들었으며 선한 창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들었다." 즉, 이것은 시대의 문제였다. (28)

우리 모두는 리스본의 후손들이다. 오늘날 교회에 나와 앉아 있는 많은 사람들이 1775년에 일어났던 리스본 지진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그 비통한 날로 상징되는 사고의 전환으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44)

전능하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믿음이 무고한 고통이라는 불합리와 불가해로 인해 큰 도전을 받는다는 것이다. (45)

지금도 신자들 대부분은 삼백년 전 리스본이 야기했던 질문을 던지고 있다. (46)

반면에 현대의 정신은 고통을 당할 때, "이 고통이라는 실재가 나의 세계관과 어떻게 어울리는가? 내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실재의 조각들은 어떻게 서로서로 논리적으로 조화를 이루는가?"라고 물을 것이다. (53)

신정론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과 악, 고통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통찰이나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해도, 그것이 깊은 상실과 비통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아니라면 그것은 이런 "지혜"가 실제로는 복음이 아니며 따라서 전혀 언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믿을 만한 표시다. (81)

어떤 신학자들이 보기에 이 불가피한 문제는 우리가 "불가능한 체스 경기"라고 표현한 신정론의 방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1)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2)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3) 하나님은 사랑이 많고 선하시다.
(4) 무고한 고통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등식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유신론의 하나님, 계몽주의의 하나님, 철학자들의 수학적인 제일원인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아니다. 따라서 이런 방식을 따른다면, 신정론 문제에 대해 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하나님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 아니면, 기독교 신앙에 생소한 견해를 수반하는 수학적이고 철학적인 "해결책"뿐이다. (92-3)

성경은 "제가 보건대 악한 자들이 번성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존재하시는지 궁금합니다"가 아니라 "오 하나님,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번성합니까?"라고 묻는다. 폴 틸리히가 표현했듯, "하나님이 질문의 기초가 아니라 질문의 대상일 때 우리는 그분게 가닿을 수 없다. (94)

그렇다면 신정론의 임무는 철학 안에서 논리적인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지만 위험에 처해 있는 세계관을 보수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직면한 위험은 무신론과 위험한 장난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강화될 수 없는 것을 떠받칠 수단을 찾는 것이 되는 것이다. (98)

즉, 우리가 무고한 고통을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든지 간에, 결국 그 고통을 정당화하고 말리라는 경고로 인도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의 길로 좇는 것이 아니라, 욥의 친구들의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다. (99)

"유신론자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은, 그분의 능력에 제한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비논리적 제한이 없다는 뜻이다." (106)

하지만 때로 선명한 논리는 차가운 위로밖에 주지 못한다. 하나님이 (1) 전능하고 사랑이 많으며 공의로우시다는 사실과 (2) 무고한 고통과 악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동시에 주장하는 것이 비합리적이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행하실 힘을 가지신 이 세상에 왜 이렇게 많은 고통이 일어나는가 하는 문제 앞에서 곤혹스러워하며 사유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참된 평안을 줄 수 있는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108)

즉 현재 일어나는 허리케인과 지진, 산사태 등 자연재해의 책임을 과거에 존재했던 인간 역사의 도덕적 악행에 귀속시키는 자유의지 신정론의 논리는 현대인들에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135)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유의지에 대한 묘사는 현대의 신정론, 즉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믿음에 대한 옹호가 아니라, 어떻게 인류가 악에 매이고 그리스도의 구속을 필요로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135)

다시 말해 핵심은 욥의 고통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 하나님과 인류의 관계의 본질에 대해 중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163)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지점은 욥이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로 전락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더 이상 환상을 통해 유지될 필요가 없는 실제적인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앞에 두고 살아가는 참된 존재와 인간 곧 티끌로 만들어진 피조물이 되었다. 그 안에서 욥은 위안을 얻었다. (176)

욥은 자신이 사랑하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과 자신이 신뢰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178)

"하나님, 이 고통의 문제를 제 머릿속에서 이해하게 되면, 이 선을 넘어 당신에게로 가겠습니다"라거나 "당신께서 저의 정의관을 존중해주신다면 저도 당신을 신뢰하겠습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 선을 넘어 기도와 믿음으로 무릎 꿇어야 한다. (178)

신정론이 논리적 문제의 해답이라기보다는 의미를 향한 순례에 가깝다는 것이다. (182)

안셀무스의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란, 신자가 문제와 질문을 탐험한다는 것이 야간 망원경을 통해 보는 것과 비슷해서, 신앙이 우리를 도와서 진실로 존재하지만 신앙 없이는 놓치고 마는 무엇을 좀더 잘 보도록 한다는 의미다. (185)

그리스도인은 신정론의 질문 같은 인생의 심오한 문제에 대해 논리와 정직성, 냉철한 사고로 접근하는 동시에, 기도와 찬송과 예배와 섬김에 참여함을 통해서도 그 신비를 탐구한다. (186)

"이것이 어떻게 좋은 창조입니까? 하나님, 어떻게 이것을 허용하실 수 있습니까? 당신은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악이 있도록 하신 것이 당신입니까?"라고 물을 때 이것은 신앙의 부재가 아니라 신앙의 표현이다. (196)

사람은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의 상처를 통해 치유된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원수와 싸우시는 데 칼의 힘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연약한 능력을 사용하신다. (224)

하나님이 우리가 호각을 불 때마다 모든 것을 고치시기 위해 임하는 분이라는 생각을 버린다. 그리고 그 대신 많은 사랑을 숨기신 용사로서 고통 가운데 역사하시고 신실한 자들을 불러 자신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하시는 하나님, 아픔이 가득한 현 세상을 사는 사람들을 불러 모든 인류가 마지막에는 되어야 할 존재, 즉 이들의 의가 하나님의 승리하시는 사랑 안에서 해처럼 빛나는 자들이 되도록 하시는 하나님을 믿게 된다. (241-242)

 

 

 


 

 

 

목차

감사의 글

서문

 

1장 기초가 흔들리다

 

2장 불가능한 체스 경기

 

3장 위험한 길

 

4장 동료 순례자들

 

간주곡: 울부짖음, 윱과 폭풍우

 

5장: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코디: 천로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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