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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설교문] 5분 설교 - 고린도전서 1장 18절, 고전 1:18[쎈척 I 한국 교육 I 풀꽃도 꽃이다 I 입시 I 스펙 I 무시 I 우월감 I 바울 I 예수님 I 약함]

by 카리안zz 2023.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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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읽기: 고린도전서 1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얼마 전 아이들과 심방을 할 때였습니다. 아이들이 초등학생들이지만 거친 말을 하거나 욕을 할 때가 있습니다. 밥을 먹다가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들 왜 욕을 쓰냐고 물으니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나왔습니다. “욕을 쓰면 쎄보여요” “맞아요하면서 동의를 하는 겁니다. 물론, 제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아이들이 욕을 쓰는 이유는 다른 이유들도 있어보였지만 아이들 스스로의 대답을 듣고는 새로운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쎄보이기 위해서 욕을 쓴다. 이렇게 욕을 쓰는 건 중고등학생들이 할 법한 이유를 초등학교 저학년 친구들 역시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쎈척. 저학년 아이들이지만 학교라는 세상에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한 자기들만의 무기였습니다. 남의 시선들 속에서 욕 안 쓰고 착한 모습 보이면 무시당하기에 아이들은 쎈척을 합니다. 그게 욕으로 표출됩니다.

 

최근 우리교회 초등학교 선생님들께 책 추천을 9권받았습니다. 초등학교 부모님들이 읽으면 좋을 책들을 손수 선정하셔서 추천해주셨습니다. 저도 올해 안에는 다 읽어볼 예정인데 세 권 정도 읽었습니다. 가장 먼저 읽은 책은 아이들 심방하기 전에 읽었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머지 두 권의 책은 학교 현실에 관한 책입니다. 한 저자는 학교에는 교육 아니면서 교육인 척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지적이 뼈저리게 느껴졌습니다. 아직도 학교가 그러나? 라는 생각이 아니라 더욱 노골적으로 학교라는 곳이 변했구나 싶었습니다. 한 저자는 왜 공부를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소설로 잘 표현을 해줍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아빠가 가장 속상해하고 분해하고 하신 게 권력자들에게 당하는 거였어. 이 권력, 저 권력 앞에서 그저 머리 숙여야 하는 게 너무 억울하고 분하셨던 거야. 그래서 술 취하면 ...사시를 쳐서 판검사를 만들든, 행시를 쳐서 고급 공무원을 만들어 당한 만큼 원수를 갚았어야 하는데... 너한테 첨 하는 얘긴데, 엄마 아빤 세상이 알아주는 대학을 못 나온 게 평생 콤플렉스다. 그러니 너는 꼭 SKY 대학 나와야 엄마 아빠 원이 풀리지 않겠니? 알아들어?”(219-21)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공부를 합니다. 때론 더욱 변형되어서 무시하기 위해서 공부를 합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욕을 쓰는 이유부터 대학을 가는 이유까지 하나의 이유가 흐릅니다. 제가 읽은 책은 2016에 나온 책인데 그즈음 일제고사, 그러니깐 전학생 등수를 매겨서 공개하는 게 시행되었나 봅니다. 경쟁이라는 미명 아래서 쎈척의 이유들이 늘어만 갑니다. 좋은 고등학교는 대학진학률, 명문대에 몇 명 진학시킨 것으로 학교는 평가를 받습니다. 인문계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최근 개봉한 <다음 소희>라는 영화가 그걸 잘 표현해줍니다. 실업계 고등학교의 평가도 취업률입니다. 학교는 거기에 맞춰서 경쟁을 합니다. 어떤 기업인줄도 모르고 그냥 막 취업시킵니다. 그래서 취업한 소희라는 소녀는 거기서도 줄서기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곳은 콜센터였고 거기서도 1등부터 꼴등까지 줄서기를 합니다. 결국, 그곳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이 일은 실제 있었던 이야기이기에 더욱 가슴 아프기만 합니다. 아무도 그 죽음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이 극단에서 우리는 세상의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얼마나 망가트리는지 우리는 목격합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는 학교의 모습을 통해 이런 사실들을 잘 보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학교의 모습이 자주 매스컴에 등장할까요? 드라마만 해도 스카이 캐슬부터 지금 일타강사 스캔들까지 그 사이 꾸준히 학교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제 생각으론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고 잘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남들 시선과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고, 스펙 쌓는 게 어디 학교만의 문제일까 싶습니다. 조심스럽지만 목사님들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담임 목사가 되기 위한 열망은 학교가 명문대 보내는 것이나, 대기업 가고 싶은 열망이나 유사합니다. 어떤 신학대학원은 노골적으로 이 욕망을 이용해서 돈벌이로 활용합니다. 학교에서 이상한 걸 하나 개설해서 학생들을 모집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저는 예수님을 생각해 봅니다.

 

조금 우스울 수도 있지만 예수님 스펙을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출신이 아니라 지방 갈릴리 나사렛 출신입니다. 바울은 그래도 예루살렘에서 공부하고 가말리엘 학파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은 제가 알기론 그 근처도 가지 못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 연봉은 얼마였을까요? 공생애 기간에는 돈을 안 버셨으니 0원이겠지만 그전 목수일을 할 땐 수입이 있으셨을 겁니다. 그리 많이 받으셨을까 싶습니다. 확실한 건 큰 교회 목사님들보단 적게 버셨을 것 같습니다. 대기업 사원 연봉보다도 당연히 덜 버셨겠죠.

예수님의 냄새를 상상해봅니다. 예수님은 주 업무 중 하나가 아픈 분들 고쳐주신 거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주변에 많았고요. 아마도 냄새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을 겁니다. 예수님의 옷도 그렇게 명품과는 거리가 멀었지 싶습니다. 저는 그래서 극명하게 대조되는 한 장면을 상상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과 대제사장이 마주쳤을 때입니다. 대제사장이 걸친 에봇은 화려합니다. 보석으로 꾸며져 있고 좋은 재료로 옷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냄새도 향기롭습니다. 성전에 분향할 때 값비싼 재료를 사용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 귀한 향기가 몸에 배겨있을 겁니다. 반면, 예수님의 옷과 냄새는 어떨까요? 대한민국 학교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은 부끄럽습니다. 그는 좋은 학교 근처도 나오지 않았고 지방 도시 출신입니다. 돈도 많이 벌어보지 못했습니다. 서른즈음 청년의 나이, 옷은 후즐근하며 냄새는 거리의 사람들 냄새가 낫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수치스럽습니다. 그는 결국 수치의 최절정인 십지가에서 비참하게 죽습니다. 이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걸리는 돌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진정한 이 모습을 알게 된다면 걸려서 믿지 않을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런 예수를 어떻게 믿냐고요.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26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27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28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29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30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31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 한 대로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강조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로 우리가 받아야 할 수치를 대신 받으셨으며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죽음의 세력에서 우리를 구해주셨습니다. 다른 그 어떠한 강력한 세력도 하지 못했지만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도로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누구보다도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도 예수님처럼 수치를 짊어지고 고린도교회에 외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유대 세계에서야 공부 좀 하는 사람이었지 그리스세계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존재였습니다. 바울의 글쓰기도 당대 지식인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학자는 비교해보면 바울은 당시 고등학교 수준 정도의 글쓰기를 한다고 하더군요. 그런 바울인데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의 모습을 우린 상상해 봐야 합니다. 도시에서 거의 죽기까지 매를 맞았기에 바울의 몸은 흉터투성이었습니다. 얼굴에도 그 흔적이 심했겠지요. 바울이 왜 고린도 도시에서 무시당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도시의 관료들과 바울을 비교해보면 바울은 너무 부끄러운 존재입니다. 갈아치우고 싶었을 겁니다. 차라리 예수님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을 보내면 면이 서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과 바울은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어 버리셨습니다. 고린도전서에 자주 나오는 자랑, 우리 말로 하면 쎈척쯤 될까요? 바울은 이제 자랑하려거든 누구든지 주님을 자랑하라고 말합니다. 지방도시 나사렛에 살았던 예수님, 돈 많이 못 벌었던 예수님, 후즐근한 옷을 입었던 예수님, 냄새나던 예수님,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자랑해야 할 바이며 우리가 바라봐야 할 창문이며 우리가 따라야 할 길입니다. 이것이 오늘 이 세상에도 여전히 능력 있는 십자가의 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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