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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신학

[책리뷰] 윌리엄 윌리몬 -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에게 왜 복음이 필요한가?[IVP I 풍요의 시대를 사는 이들이 복음대로 사는 법 I 복음 I 풍요의 시대]

by 카리안zz 2022.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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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아이들을 본다. 집에 돈이 없어서 학원을 잘 다녀본 적이 없던 나에겐 학원 가는 것을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본다. 고등학생 땐 학원 보내 달라고 그렇게 졸라대도 돈이 없어서 못 보내준 가정 형편이었기에 학원을 의무적으로 보내주는 부모님들을 볼 때마다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상대적이겠지만 요즘 자라나는 아이들은 부유하게 보인다. 물론, 풍요로움 속에 다른 문제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은 뒤로 하고 풍요롭기에 신앙에 대한 필요도 못 느낀다면? 이들에게 복음에 대한 필요를 느낄까?

 

윌리엄 윌리몬은 당시 미국의 분위기를 알려준다. 예수님을 믿게 된 계기에는 어떤 비참함 뒤에 예수님을 만나고 결핍이 해결되고 회심하는 것이다. 간증의 패턴이며 대개의 설교도 그렇다. 이를 요약하면(35)

 

당신에겐 문제가 있다.

그리스도가 답이시다.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라

 

이것에 대한 지나침 때문에 억지로 문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때론, 드라마틱한 회심이 없으면 복음이 아닌 것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저자는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두고 그녀가 어떤 비참하다고 느꼈기 때문이거나, 무릎을 꿇는다면 용서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간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녀가 예수님에게 간 이유는 오직 그녀가 예수님의 사랑과 인정을 먼저 느꼈기 때문이다.”(62) 탕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할 때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다(63).

 

그러나, 결핍을 느꼈기에 사랑을 잘 알 수 있었지 않았을까? 탕자가 왜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을까? 자신의 상황에 비참함을 돼지우리에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 여인도 마찬가지도. 세상의 멸시와 시선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예수님이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전통적 지지자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지적질하는 것은 잘못되었지만 그렇다고 어떠한 비참함을 느끼지 못한 것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걸 못 느낀 것은 오히려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 아니었을까.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왜 못 느꼈을까? , 다르게 이해해서 그렇겠지만.

 

저자가 지적하는 것에 상당히 공감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적 설교와 신학의 패턴이 뒤집어져야 한다. 전통적 설교와 신학은 ‘행위 의’, ‘누구나 자신을 위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얻는다’는 문화의 후예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시작된다(‘당신에겐 문제가 있다’), 이로써 구원(‘...구원을 받으라’)은 보상, 우리의 의로운 성취에 알맞은 상급이 된다. 전통적 설교와 신학은 하나님의 사랑을, 쓰디쓴 약을 먼저 삼킨 뒤에야 받는 알사탕으로 바꾸어 놓는다.”(55-6)

 

내가 회개했으니 구원받았다고 자기 스스로 확신을 가지는 것은, 그리고 강대상에서 회심했다고 선언하는 것은 역시 마땅하지 않다. 저자는 아마도 이러한 방식이 문제라고 하는 것같다. 나는 위에 요약된 저 도식이 문제인가 싶다. 저자 역시도 후반부 문제들을 지적한다. 바로 종교가 필요하지 않는 사람들의 문제를. 본격적으론 5장 이후 시작된다.

 

“아, 어릴 때에는 교회에 다녔어요.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교회에 갈걸요. 그런데 그뒤에 나는 대학에 들어갔고, 혼자 힘으로 직장을 구했고, 다시 종교가 필요하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나는 종교든 무엇이든 반대하진 않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나름대로 꽤나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나는 그냥 종교가 필요하지 않아요.”(101)

 

이들에겐 숨 막히는 죄책감이나 비탄에 찬 절망을 전혀 느끼지 않는 이들이다. 그러니 전통적 방식으로 억지로 그것을 만들어내려 하지 말라(108).

 

“‘강한 자들의 죄’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자기 의와 안주, 자기만족과 전능의 가면, 더 약한 형제자매들과 공감하지 못하는 실패 등 몇 가지 들 수 있다. 이런 것들은 힘을 지니고 있지만 감사의 결여와 고마움의 결핍에 감염된 이들이 시달리는 죄다.”(111)

 

설교를 준비하면서 너무 현시대의 잘못된 무언가(우상들)를 들추는 것만 같았다. 저자가 이에 대한 반대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방식의 문제였다. 서른에 썼다는 것을 먼저 봐서 느낀 선입견인지는 모르겠지만 30대 때 근본주의에 빡쳐서 쓴 글 같았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설교로 고린도교회에 썼던 바울의 편지가 중요한 자료가 아닐까. 부요함을 추앙하는 이들의 세상 속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걸려 넘어지는 돌일 것이다.

 

물론, 부요함을 가진 사람들이(그것이 권력이든, 돈이든) 어떻게 그것을 사용하는 것 역시 알려줘야 하는 것 역시 복음 안에 있을 것이다. 당장에 생각나는 마가도 상당히 부요한 자였고, 바울도 어느 정도 잘 사는 사람이었고, 뵈뵈 역시도 부요한 자, 그리고 갑자기 이름은 생각 안 나는데(유니아였나?) 그녀는 상당히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다. 아아,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복음대로 살게 되는 모습이 복음을 가진 자의 모습일 것이다. 증언자의 모습이랄까나? 그렇기에 부요함을 가진 그 뒤가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돈을 어떻게 모으는 것에 더 집중하기보다는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에 더 집중을 해야 할 것이다.

 

, 미국 사람들이야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없는 것이지만 동양의 나라들은 원래 하나님이 필요가 없었다. 기독교 인구 90%에서 70%, 60% 떨어져 탈기독교 사회가 되었다고 호들갑 떤다던데 기독교 인구 5%가량 될 것 같은 대구라는 도시를 나는 살고 있다. 이제 앞으로 5%에서 더더욱 줄어들 것이다. 원래 하나님이 필요 없었던 사회에서 왜 복음이 필요할까? 필요없는 이들에겐 필요를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니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만이 내 역할이 아닐까 싶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을 듣고 오겠지 싶은. 그렇기에 차가워진 내 마음엔 오히려 복음 전도자의 뜨거운 선포가 필요한 것일지도. 여튼, 공감될 듯 말 듯 하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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