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훌 털어버리고”
‘기다리는 사람들’이란 찬양곡이 있다. 그 곡 가사 중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가사를 참 기억에 남는다. 20살 첫 연애를 지독하게 겪었다. 어디 하소연할 길 없던 지독함을 교회 동생에게 말하게 되었다. 왜 그 친구에게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친구 동네를 하염없이 돌아다니며 속을 털어놨다. 그때 이야기하면서 “훌훌 털어버리고”라는 가사 이야기가 나왔다. 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교회동생은 “오빠, 가사 완전 좋은데?”라는 반응과 어떤 드라마에서 봤던 대사를 말해주곤 최고의 복수는 완전 잊어버리는 것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막 그 주 교회 같이 가서 도와주고 했던...ㅋㅋ 20살 어린 나이에 복수를 그렇게 하는 건 도저히 내 혈기가 가만히 두질 않아 당시 여사친들과 친한 모습으로 복수를 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 동생이 참 고맙더라. 속을 터놓고 마음을 훌훌 털어버린 날, 그 친구의 배려가 없었더라면 나는 당시 지독히도 깊은 어둠을 벗어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 자라니 그런 마음이 보였다. 이번에 읽은 ‘훌훌’이라는 이 책이 바로 이런 이야기였다.
주인공 유리는 입양아였고, 입양을 한 엄마에게 버림을 받은 지독히도 상처받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유리처럼 쉽게 깨어질 수밖에 없던 주인공은 삶을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 자신을 버린 부모에게 복수라는 일념으로, 상처, 분노로 삶을 이어간다.
“언젠가 찾아오고 말 미래의 그 상황을 이런 장면 저런 장면으로 바꿔 가며 상상하곤 했다. 상상하면 마음에 독기가 서렸고 공부에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됐다. 할아버지로부터 상처받지 않을 수 있었고 부모님과 살아가는 친구들을 볼 때마다 치사한 기분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유리는 완전히 깨어지지 않는다. 할아버지와 벽을 치고 있던 사이가, 동생과 교류할 수 없을 것같은 사이가 도리어 허물어진다. 동생의 존재가 유리를 점차 변화시켜갔다.
“연우가 오고 나서 집안 분위기가 달라졌다.”
동생 연우가 성격이 좋던가 아이가 맑던가 그런 애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유리보다 상처가 더 깊은 그런 아이를 통해 유리가 변해가고 가정이 변해간다. 그리고 유리의 주변 친구들로부터 특히 오향숙 선생님에게 자신의 처지를 훌훌 털어버리며 분노와 복수, 상처로부터 멀어져 간다. 그리고 마침내 연우가 살아갈 삶을 생각하며 아파하고, 할아버지를 어떤 마음이었는지 이해하게 되고, 결국 자신을 버린 엄마의 삶을 이해할 정도로 성장한다. 그렇게 회복되고, 가족이 되어간다.
“살아온 길이 저마다 다르니까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나는 그 사정을 알 수가 없잖니.”
유리가 오향숙 선생님께 자신을 훌훌 털어버리고 난 뒤 선생님이 해주신 말이다. “붕대를 감아 줄 수 없다면 남의 상처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 미우라 아야코의 (속)빙점에서 등장한 문장이었는데 너무 공감되었다. 함부로! 상대방의 상처를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피하기도 했고, 그 상처를 함부로 판단하여 지레짐작하지 않으려고도 했다. 그리고 남녀 사이 서로의 상처를 열어버리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알기에 피하기도 했다. 서로가 상처를 치유할 줄 알았지만 더 지독한 상처로 이어지는 파국이 일어난다. 그래서 난 이 오향숙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참 좋다. 어른.
“선생님이 우리 집 사정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아 주어서 고마웠다. 문득 선생님의 사정이 궁금했다. 고향숙 선생님의 지난 삶도 궁금했다. 선생님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 연우의 지난 삶을 생각했고 연우가 살아가며 겪게 될지 모를 무수한 어려운 일들을 생각했다. 목이 메어 왔고 눈물이 돌았다. 엄마 서정희 씨의 삶을 생각했다. 내가 살아가야 할 삶도 생각했다. 나는 목청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나는 삶이 회복되는 이야기를 보면 천국의 그림자를 본 것처럼 반갑다. 우리가 유리의 가족만큼의 사정은 아니지만 저마다 각각의 사정에서 상처를 입고 분노로 때론 복수로 삶을 이어나간다. 그런 삶에서 우린 어떻게 구해질까? 이 책은 그 힌트가 들어있다.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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