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

[설교문] 5분 설교 - 로마서 12장 21절, 롬 12:21

by 카리안zz 2022. 9. 12.
반응형


로마서 12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복수극은 늘 인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웹툰과 웹소설의 주요 소재 중에 회귀물이 있습니다. 회귀물이란 일생을 살다가 죽었는데 그 기억을 가지고 예전에 시점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 회귀물과 잘 이어지는 게 바로 복수극입니다. 전생의 삶에서 대단히 찌질하고 척박한 삶을 살았기에 주변에 자신을 멸시하는 시선들이 많았습니다. 이제 다시 예전의 기억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살 때는 자신을 멸시하던 사람들을 복수하는 내용이 주로 이어집니다.

최근에 <어게인 마이 라이프>라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는데 바로 회귀물과 복수극이 잘 나타난 드라마입니다. 원작은 웹소설이고 웹툰으로 이어졌다가 이제 드라마화가 되었습니다. 대강의 내용은 열혈 검사가 대한민국의 거대한 흑막을 수사하다가 죽어버립니다. 죽었지만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는데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죽기 전에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말입니다. 다시 고등학생 때로 돌아가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데 자신을 죽였던 거대한 흑막들을 추적하면서 복수해 나가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복수를 할 때 깊은 쾌감을 느낍니다. 재미있어요. 자신을 멸시하고 핍박하고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사람인데 어떤 기연을 계기로 자신의 힘이 강해져 버립니다. 그럼 이제 예전에 수치스러운, 또 자신에게 해를 가했던 자들을 찾아가서 응징을 합니다. 주인공의 이야기를 자신이 몰입할 때 굉장히 더 재미있어지고 쾌감이 더 해가는 것 같습니다. 마치 내가 불의한 일을 겪었다가 내가 강해져 내가 복수를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요즘 사이다라는 말들을 좋아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탄산을 먹을 때처럼 속이 시원해지니 사이다 발언, 사이다 정치, ‘사이다라며 열광합니다.

 

물론, 이런 드라마와 같은 내용은 가상의 이야기이기에 단순히 대리만족하는 걸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과 가치들이 내 삶과 현실에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복수와 보복이 드라마와 같은 이야기라던가 또, 남의 이야기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저는 살아가면서 느낍니다. 가장 강렬하게 느낄 때가 바로 운전할 때입니다. 아무런 신호가 없이 갑자기 차를 끼어들면 굉장한 분노를 느낍니다. 옆에 쫓아가서 크락션을 누리며 분노를 표시합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되려 화를 내면 제 분노 게이지는 더 높아집니다. 적절한 응징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 화가 가라앉지만 상대에게 내가 당한 걸 더 복수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화가 가라앉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분노만큼 적절한 보복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일하게 위해를 가하는 것은 보복을 제한하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축구 경기에서도 상대가 보복 반칙을 하면 바로 퇴장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경기 전체를 망가트릴 수 있는 더욱 큰 화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이걸 심판이 제대로 못하면 축구 경기에서 선수들이 큰 부상을 많이 당하죠.

 

성경은 시종일관 이 보복에 대해서 반대를 합니다. 대표적으로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형들을 보복하지 않습니다. 형들 자체도 동생에게 했던 자신들의 잘못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요셉은 형들을 용서합니다. 다윗은 어떤가요? 다윗 역시도 어느 누구보다 분노에 잠식당했을 환경이었습니다. 사울이 자신을 몇 번이나 죽이려고 했습니까? 자신은 목숨 바쳐서 골리앗을 죽인 전쟁 영웅이었잖습니까. 그런데 자기를 죽이려 한 사울에게 보복하지 않습니다. 사울이 죽고 이제 새 왕국을 시작하려 할 때도 다윗은 이 피의 보복으로 나라를 시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죽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언약을 맺으려고 했습니다. 이 계획이 틀어졌는데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이 아브넬을 죽여버려서 였습니다. 요압은 왜 아브넬을 죽이려고 했냐면 자신의 동생을 아브넬이 죽였기 때문입니다. 보복이었죠. 다윗은 이 보복이 분명 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악행을 하나님께서 그대로 갚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보복으로 새로운 나라를 시작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언약을 통해 화해를 이룬 나라를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다윗 이후 왕국의 분열에서 반란의 보복들이 계속되는데 성경은 이 보복을 계속해서 고발합니다.

 

다윗의 자손을 그토록 기다린 이유가 바로 보복이 아니라 화해와 평화를 이룬 것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그 다윗의 후손답게 자신이 보복할 원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5:44)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부터 초기 기독교에 계속 가르쳐 내려왔습니다. 복음서보다 이른 시기에 기록되어진 바울의 편지 중 로마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12:19-21)

 

성경은 끊임없이 원수를 보복하지 말고 오히려 사랑하라고 말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실 원수의 보복이 아니라 원수를 품으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원수를 사랑한 본을 보이셨습니다. 분노하게 하는 사회를 살고 있습니다. 때론, 분노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분노가 제한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분노는 모든 걸 태울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리스도를 본받아 친히 원수 갚으려 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깁시다. 오히려 우리는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합시다. 선으로 악을 이깁시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