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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설교문] 5분 설교 - 고린도후서 5장 18절, 고후 5:18

by 카리안zz 2022.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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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518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오늘 본문은 고린도후서입니다.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사역하면 가장 힘든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나 고린도후서 18절에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라는 말을 하며 살아가는 것조차도 힘겨워하는 지경에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쓰고 난 뒤 에베소에서 어떤 오싹한 경험을 한 뒤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지경에 있었고 그때 덮친 격으로 고린도에 보냈던 편지, 고린도전서입니다. 그 편지의 답신이 왔습니다. 내용을 보니 바울 자신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있다는 말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더구나 외부인들이 고린도에 오면서 바울을 향한 의심은 더욱 커져가고 있었습니다. 그 외부인들은 고린도후서 1211절에 나오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환상을 보고 기적을 행하는 경우처럼 고양되었고 영적 실존 상태를 체험한 일을 자랑했습니다. 특히 화려한 언변, 감동을 자아내는 수사, 정교한 영적 해석을 자신들을 한껏 뽐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고린도의 일부 교인들이 바울과 그의 복음을 충실히 따르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과 그들의 의견에 동조된 고린도 교인들이 합세를 해서 반 바울 정서가 지금 뭉쳐져 있는 분위기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고린도 공동체 안에서 바울과 그의 복음이 지닌 정당성을 위태롭게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여기에다가 고린도전서를 보낼 때 선교 여정 계획을 말했었는데 그 계획으로 인해 갈등의 골을 더욱 깊어졌습니다. 고린도전서에 쓰였던 계획은 그리스 북쪽으로 해서 마지막으로 고린도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실제로는 고린도를 먼저 방문해서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고린도로 가는 선교계획을 고린도후서 115-16절에서 말합니다. 하지만 이 계획도 완전히 다 실행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한 번 방문하고 나머지 계획을 포기하고 그대로 다시 에베소로 가버립니다.

고린도후서 123절과 21절에 바울은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한 번의 계획으로 어떤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자신이 개척한 교회에서 자신이 의심받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목도했을 때 그 충격이 대단히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 고린도에 있을 때 바울의 태도 역시 문제가 되었습니다. 한 특정인에 대해서 바울은 굉장히 강경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418-21절에 강한 말이 나옵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고전 418-21

18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바울은 그 특정인에 대해서 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내가 가면 가만히 안 둔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실제로 고린도에 갔을 때 어땠을까요? 강하게는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서는 바울이 다녀간 뒤 이런 말이 돌았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후서 101절입니다.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라고 자신을 말합니다. 그러니깐 요즘으로 말하면 키보드 위에서는 굉장히 강한 말을 내뱉다가 현실에서는 조용조용한 그런 모습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니 고린도 일부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했겠습니까? 바울은 약하고 무능한 지도자라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습니다. 결국 그들은 바울이 사도 자격이 없다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고린도에서의 모습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엄청난 수치심이 들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고린도의 일부 사람들이 바울이 사도 자격이 없다는 근거로 세 가지 정도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 고린도에 와서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이 바울과 비교했을 때 훨씬 훌륭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의 자격이 있을까 그들은 말했습니다.

둘째, 고린도전서에서 말했던 선교계획을 지키지 않고 다른 계획대로 움직인 모습을 보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가 의문을 가졌습니다.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이 사도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기름을 끼얹습니다.

셋째, 돈을 대하는 바울의 태도에서 그가 사도 자격이 없다는 걸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되려 이게 그들은 문제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사도라 할 만큼 훌륭하지 인물이 아니니깐 돈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기에 교회의 돈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연보를 보내려고 헌금을 받고 있었는데 그 연보를 자신이 쓰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습니다. 연보에 있는 돈을 쓰기에 교회에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바울은 자신의 자격에 대한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인해 고린도 교회는 굉장한 분란이 일어난 것이죠.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런 의심들에 대답을 합니다. 고린도후서 10-12장에서 바울이 사도직을 변호한 내용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극심한 분열의 상황에서 오늘 본문을 썼습니다. 고린도후서 518-20절 말씀을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18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19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20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켜서 여러분에게 권면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화해케 하셨듯이 우리 역시도 이제 화해의 직분을 맡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 중에 화해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극심한 분란이 일어나고 있는 고린도교회 상황 속에서 들려진 말입니다. 과연 바울과 고린도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힌트를 우리는 로마서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를 고린도에서 썼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가 써진 뒤에 로마서가 써졌습니다. 그것도 극심한 갈등이 있었던 고린도에서 써졌습니다. 바울은 연보를 거둘 때 고린도교회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이렇게 썼습니다.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낼 구제금을 마련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사역을 의심했던 분란은 사라지고 바울의 사역에 흔쾌히 함께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결국 화해를 이룬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들에게서도 보이지 않는 세대 간의 충돌이 보입니다. 저는 20~40초반 젊은 층이 교회를 떠나고, 교회를 외면하는 현상에서 보이지 않는 갈등을 봅니다. 어떻게 보면 눈에 보이는 갈등은 없습니다. 갈등조차 하면 안 되는 분위기에 계속 조용하거나 떠나거나 외면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갈등이라고 저는 표현하고 싶습니다. 20, 30대의 종교인구를 보이 절반쯤이 무종교라는 데이터를 보았습니다. 5, 10년 뒤의 모습을 종종 떠올려 봅니다. 눈에 보이는 갈등조차 일어나지 않기에 차라리 세대갈등이 눈에 보이는 세상의 뉴스들이 부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면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하고 이제 이야기를 듣고 무언가 행동이 시작될 수도 있으니깐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세상을 화해케 한 일들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화해를 이루신 사건을 떠올려 봅니다. 성령님께서 성도들 사이에서 각양각색으로 하나되게 하시는 일을 생각해 봅니다. 그 모습을 바울은 말했습니다. 실제로 바울과 고린도 교회는 화해를 이루어냈습니다. 부흥하기 위한 화해는 필요 없습니다. 전도가 잘 되기 위한 화해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화해를 보여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화해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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