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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영화

[영화 리뷰] 고레에다 히로카즈 <어느 가족> Shoplifters I 안도 사쿠라, 릴리 프랭키 주연 I 가짜들의 진짜 이야기 I 기생충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 I 결말포함

by 카리안zz 2021.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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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레에다 히로카즈. 그 이름을 참 많이 들었다. 일본에 그나마 기대하는 감독이라고. 얼마 전 라이너의 유튜브에서 일본 영화를 평하는 걸 봤다. 왠걸 작년에 <귀면의 칼날>이 영화 최고 흥행작이었단다. <귀면의 칼날>은 다 봤지만 무한 열차 극장판은 못 봤다. 평이 좋지만 언제 볼까 싶다. 근데 어쨌든 애니메이션이 흥행 1등을 하고 나머지 영화작품들은 다 밋밋했다. 코로나여서 감안은 해야지 싶지만 일본 영화계의 침체가 될 듯하다. 코로나 이후 일본은 정말 위기인 것같다. 우리가 곧 추월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까? 

 여튼,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면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일본 최고의 감독이다. 이 <어느 가족>으로 2018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2019년 일본 아카데미를 쉽쓸기도 했다. 과연,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 작품은 어떤 작품일까. 흥미가 제법 있었다. 혹자는 기생충과 어느 가족을 비교하기도 했다. JTBC 방구석1열에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나와서 이 질문을 했는데 그 대답에 공감한다. 가족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 말고는 주제 자체가 다르다. <어느 가족>은 가짜로 모인 이 가족이 정말 가짜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기생충>은 계급에 대한 이야기다. 둘은 전혀 다른 영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는 초반에 집중이 되진 않았다. 시간도 2시간이라니. 그래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니 견디고 봤다. 
 가족이 한 집에 모여 산다. 근데 여느 가족과는 느낌이 이상하다. 아버지처럼 보이는 사람과 아들은 동네마트에서 절도를 한다. 참고로 영화의 영문제목은 <Shoplifters>(가게 좀도둑)이다. 정상처럼 보이는 부자 사이는 아니다. 절도 후 집으로 간다. 집에는 할머니와 아이의 어머니같이 보이는 사람도 있다. 누나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다. 어딘가 위화감을 느끼게 하는 가족이다. 그들의 대사가 아무래도 좀 일반 가족과는 미묘하게 달라 보인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집 밖에 나와있는 한 어린 소녀를 본다. 쥬리라는 이름의 아이. 이 아이는 집에서 학대를 받고 있다. 그 아이를 이 미묘하게 이상해 보이는 집에 데려온다. 그리고 같이 산다. 중반까지 이 가족의 이야기가 계속 된다. 
 아버지 같은 사람은 시바타 오사무. 노가다꾼이다. 어머니 같은 사람은 시바타 노부요. 세탁기 공장에서 일한다. 누나처럼 보이는 시바타 아키. 유흥업소에서 일하고 있다. 집 주인인 할머니처럼 보이는 이는 시바타 하츠에. 죽은 남편의 노령연금으로 먹고 살고 있다. 아들처럼 보이는 이는 시바타 료타. 학교도 안 가고 도둑질을 하고 있다. 학교는 집에서 공부할 수 없는 이들이나 가는 곳이라는 아버지 같은 시바타 오사무의 명언이 기억에 남는다. 이런 가족들 사이에 시바타 유리(린)은 함께하게 된다. 

 

 

 위의 포스터에서 볼 수 있듯이 한번도 바다에 가보지 못한 유리(린)을 위해 바다로 놀러 간다. 정말 가족같다. 하지만 이후 이 단란해 보이는 가족은 현실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슬픔보다 돈을 더 중요시 하는 것 같은 모습때문일까. 할머니가 죽었지만 신고하지 않고 그냥 집에 매장시킨다. 왜냐하면 할머니의 연금을 계속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쇼타는 자꾸 의문이 든다. 더구나 문방구 할아버지는 자신이 도둑질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걸 묵인해주었고 동생(유리)에겐 시키지 말라고 한다. 할아버지의 말이 자꾸 떠오른다. 매번 하는 것처럼 마트에서 도둑질을 하려고 하지만 이번에 유리에겐 그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그렇게 홀로 도둑질을 하려고 하는데 유리가 기다리지 않고 와서 도둑질을 한다. 쇼타가 그 모습을 보다가 동생의 도둑질이 발각될까 자신이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양파망을 훔쳐 달아난다. 결국 막다른 길에 몰린 쇼타는 잡히게 되는데 이때 이 가족의 현실이 들어난다.

중후반부가 이 영화의 묘미였다. 

 쇼타를 버리고 도주를 하려다 경찰에게 잡힌다. 잡히면서 취조를 당하는데 이때 이들의 사정이 드러난다. 오사무와 노부요는 업소에서 만난 사이다. 노부요의 원래 남편이 있는데 오사무와 눈이 맞은 모양이다. 그런데 노부요의 남편은 가정폭력범이었던 듯 싶다. 오사무가 노부요의 남편을 죽였다. 오사무가 죽이지 않았더라면 자신들이 죽었을 거라고 말한다. 이는 법원에서도 그렇게 판결이 났다. 할머니를 묻을 때 오사무가 이런 짓을 또 하게 될 줄이야 하는 대사의 복선이 이것이였다. 할머니 하츠에와 아키의 사이도 각별해 보였지만 여기에도 역시 사연이 있었다. 할머니 하츠에의 남편은 불륜으로 낳은 아들이 있었다. 그 아들의 집은 제법 부자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집 첫째딸 사진에 아키가 있는 것 아닌가. 아키는 죽은 전 남편의 손녀였다. 불륜으로 낳은 아들의 딸. 그 집에서 꾸준히 돈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돈을 쓰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걸로 봐서 하츠에는 아키에게 복수를 위해 데리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으로 아끼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죽기 전 (다들 고마웠어)라는 대사를 봐도 아키를 원망하고 복수를 했다기 보다는 어느 함께 사는 가족이 되었다는 게 맞아 보인다. 쇼타 역시 어딘가에서 구조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게 구조인지 유괴인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부모가 그렇게 찾지 않는 걸 보면 버려진 것 아닐까. 유리(린)이 버려졌듯이 말이다. 찾지 않고 있다가 유치원에서 안 보여 발각되어 찾았지만 말이다. 
 

안도 사쿠라(시바타 노부요 역)


 그렇게 보면 시바타 노부요의 취조 장면에서 한 대사가 생각난다. "버린 게 아니라 주워온 거예요. 버린 사람은 따로 있는 거 아닌가요?" 아이들도 다 버려진 사람이고 정황상 아키도 스스로 집에서 나왔지만 무언가 자신이 집을 버리겠끔한 무엇이 있는 것 같다. 유흥주점에서 이름을 사야카라고 했는데 이는 자신의 동생이름이다. 동생과 자신 사이에서 차별적인 대우가 있었을까? 영화에서는 명확히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러한 일이 집을 나오기까지 일이 된 것같다. 자기 발로 나왔지만 무언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않았을까. 이처럼 시바타 노부요는 남편으로부터 버려진 사람이었고, 버려진 할머니(하츠에)의 딸로서 역할했고, 버려진 아들(쇼타)의 어머니처럼 역할했고, 버려진 동생(아키)의 언니 역할을 했고, 버려진 딸(유리)의 어머니 역할을 했다. 실제로 그랬다. 그런데 취조하던 경찰의 대사가 숨을 막히게 한다. 이 영화 최고의 장면. 최고의 대사라고 생각한다. 


경찰: 두 아이는 당신을 뭐라고 불렀어요? 엄마? 어머니?

노부요: 글쎄요... 뭐라 불렀을까요... 

 

안도 사쿠라라는 배우를 기억에 남긴 장면이었다. 엉엉 울지도 않았으며 자신이 뭐였을까 싶은 그 장면. 무슨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순간을 그는 연기로 표현했다. 이 가족은 어떤 가족이지? 우린 무슨 사이였을까? 버려진 우리들이 함께 모였는데 우리가 피로 맺어진 가족들보다 더 진짜였지 않았을까? 근데 우리는 어찌되었든 가짜야. 가짠가? 

 

 가짜로 모여서 함께 살고 먹고 자고 그랬지만 피로 맺어진 진짜 가족들은 자신들에게 그래주지 못했다. 때렸고, 차별했고, 버렸다. 버려진 이들끼리 함께 모여 살았다. 하지만 이제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고 오사무는 이제 쇼타에게 아빠가 아닌 아저씨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쇼타를 보내준다. 쇼타는 버스를 타고 시설로 가는데 그때 오사무가 쇼타를 쫓아온다. 쇼타에게 아버지로 불리기 원했지만 버리고 떠나려고 한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그 모습을 보고 그제서야 쇼타는 속으로 오사무에게 아빠라고 불러 준다. 

 유리도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엄마의 폭행은 계속되는 것을 암시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유리가 혼자 노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네이버 명대사에서 그 장면의 의미가 나온다. 유리는 혼자 숫자를 세면서 놀고 있다. 1, 2, 3을 센다. 일본말로 2, 3은 니, 산. 붙이면 니산, 오빠라고 한다. 유리는 쇼타 오빠를 그리워 하고 있다. 가족이 가르쳐 준 노래를 흥얼거리기에 가족 역시 그리워한다. 마지막 장면의 의미가 뭔지 몰랐지만 일본어를 알았더라면 정말 먹먹했을 장면이다. 글로만 알아도 그런데. 휴. 

 가짜 가족의 진짜 가족 이야기다. 피로 맺어진다고 다같은 가족이 아니다. 어찌보면 기독교 공동체 역시 육신의 피로 맺어진 진짜 가족은 아니지만 어느 가족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가족. 교회 역시도 어느 가족이다. 교회가 영화에서 나온 가족을 버린 사람들의 가족이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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