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이야기』
한국 교회 이야기는 5주간 진행될 예정입니다. 오늘은 간단하게 어떤 내용들이 듣게 될 건지 살펴 볼 예정입니다. 먼저, 오늘은 간단한 처음 기독교가 전래된 이야기와 한국의 부림절 사건을 한 번 들어보려고 합니다.
두 번째 시간에는 옥성득 교수님이라고 UCLA의 한국기독교학 교수님이신데 이분이 외국어로 쓴 한국교회사 책이 있습니다. 이게 때마침 번역되었는데 이 책의 첫 챕터인 하느님이냐 하나님이냐 논쟁을 살펴볼 예정입니다.
이 책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책입니다. 한국 교회사를 바라보는 관점에는 두 가지 시선이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시선은 보수적인 사람들의 시선입니다. 동양에서 유래없는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걸 기독교의 승리주의로 생각을 했습니다. 기독교가 불모지에서 특히 유교, 불교, 토속종교의 뿌리가 깊은 동양의 한국 땅에서 기독교는 살아남았고 숫자까지도 엄청나게 많아졌습니다. 옆 동네 0.1%도 안 되는 일본과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어떤 지역은 기독교 인구가 30%가 넘기도 합니다. 수도권과 전라도가 기독교 인구 비율이 높습니다. 어쨌든 사정이 이러니까 당연히 기독교가 타종교에서 승리하여 이런 부흥을 일궜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합니다. 이걸 기독교 승리주의 관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나머지 관점은 신학적으로 자유주의 진영이나 진보적인 그룹에서 가지는 시선입니다. 이들은 한국 기독교를 배타적이며 전투적인 근본주의 신앙으로 봅니다. 한국 기독교가 이런 신앙을 가지게 된 이유가 초기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한국의 전통 종교 문화를 파괴한 배타주의자요 오리엔탈리즘(동양에 대한 서양의 왜곡된 시선)으로 무장한 문화 제국주의라고 비판을 합니다. 물론, 이러한 모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과연 그 말에 근거가 있을까요?
저자는 사실 관계를 찾아가면서 초기 선교사들이 과연 그랬는지 추적해 나갑니다. 그 모습이 가장 잘 부각된 게 바로 하나님과 하느님 논쟁입니다. 하느님은 다른 종교에서도 쓰였던 단어였기에 성경 번역과 타 종교와의 문제가 얽힐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또, 타 종교는 어떻게 생각을 했는지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세 번째 시간은 한국의 주류는 아니지만 무교회주의자들로 알려진 성서조선의 사람들을 배워보려고 합니다. 무교회주의가 교회를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무교회주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이 별명을 붙인 것입니다. 이분들은 혼자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였습니다. 사실 이것 역시도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형식과 어떤 제도가 우선이 아니라 성경을 가장 우선시 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에서 시작해서 그의 제자들인 함석헌, 김교신. 그리고 이 둘의 차이. 김교신의 제자들. 덴마크의 농업을 왜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강조가 되었는지 살펴볼 예정입니다. 소수이지만 신앙인들이 어떻게 우리 사회에 영향을 끼쳤는지 또, 지금도 그 흐름이 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내용은 김건우의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이란 책을 참고할 예정입니다.
네 번째 시간은 한국 기독교 흑역사를 살펴 보려고 합니다. 아직 정확히 어떤 아픈 점을 이야기할지 구체적으로 짜지는 않았지만 일제와 이승만 정권부터 독재 시대를 거치며 주류 교회들이 어떤 행보를 보였는지 살펴볼 예정입니다. 시간이 가능하다면 기독교 기업 잔혹사까지 다루려고 합니다. 책은 강성호 작가의 <한국 기독교 흑역사>에서 참고할 예정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시간은 한국 교회의 어두움 점을 봤다면 이번에는 밝은 점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일제 시대 독립운동부터 신사참배 반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 기억해야 할 분, 여성문제 특히 위안부 관련 문제들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등 근현대서를 오가며 한국 개신교의 빛나는 모습을 다룰 예정입니다. 참고 서적은 강성호 작가의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으로 할 예정입니다.
독특한 조선 선교
개신교 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처음 온 사람은 귀츨라프입니다. 1832년에 조선에 와서 주기도문을 우리말로 번역하고 감자 심는 법과 포도주 만드는 법을 알려주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어떤 배를 타고 조선으로 왔는지가 중요하기도 합니다. 어떤 배였냐면 동인도회사 소속 로드암허스트 호를 타고 왔다 합니다. 동인도회사는 잘은 모르지만 딱 떠오르는게 제국주의가 떠오릅니다. 서구 열강들이 아시아를 등처먹을 때 그 앞잡이로 동인도회사가 떠오릅니다. 이 회사 소속 선박에 길 안내 겸 통역으로 동승한 선교사들의 모습이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귀츨라프가 바로 그 역할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정부가 교역을 거부했기에 로배는 떠나야 했고 귀츨라프도 그래서 떠나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 영국인 토머스 목사님이 오십니다. 1866년입니다. 토머스 목사님은 미국 프레스턴 무역 회사 소속 제너럴셔먼 호를 타고 옵니다. 제너럴셔먼 호는 어렸을 때 많이 들었던 배 이름일 겁니다. 토머스 목사님은 이 배의 길 안내 겸 통역이었죠. 그런데 교과서에서도 봤듯이 이 미국 배가 평양 사람들의 인내심을 자극하여 무력충돌이 벌어졌죠. 그리고 배가 불타게 되고 승무원은 전원 죽게 됩니다.
귀츨라프 선교사님과 토머스 선교사님의 선교는 실패를 하였습니다. 두 분 다 미지의 땅에서 순교를 각오하셨을 것이고 토머스 선교사님은 실제로 순교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분의 선교가 잘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겠지만 다르게 생각해 볼 여지도 있습니다. 이 두 분이 타고온 배가 바로 서구 열강들이 정치적·경제적 침략에 앞장 선 배들이었다는 점입니다. 만약 타민족을 수탈하는 배들을 타고 복음을 전하였다면 복음의 내용은 진리이지만 겉은 다른 것으로 꾸며졌을 겁니다. 이상한 포장지에 어쩌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 기독교 역사와는 전혀 다른 한국 교회의 역사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확장 과정에서 동남아와 중남미 국가 교회들이 처한 현실을 본다면 영 터무니 없는 소리도 아닙니다. 그들에게 복음은 강자의 것이고 출세 지향적이며 자본주의적인 기독교인을 배출하는데 여력을 다합니다. 우리 역시도 그랬다면 한국 교회는 지금보다 비교도 안 되게 아니 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타락한 집단이 되었을 겁니다.
토머스 선교사님이 순교하시고 8년 후 존 로스라는 선교사님께서 조선을 선교하려고 하십니다. 만주에서 활동을 하셨는데 만주에서 조선사람들을 만나면서부터 였습니다. 고려문이 있었던 봉천이란 곳에서 선교를 했는데 거기는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무역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의주라는 곳에서 건너온 상인들이 많았습니다. 존 로스는 선교 방법으로 성경을 번역하여 조선사람들에게 나눠줄 계획을 가집니다. 그래서 조선어 선생님을 이응찬을 만나게 됩니다. 이응찬은 때마침 장사를 하다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전 재산을 날려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중 존 로스를 만나게 됩니다. 기독교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로스의 조선어 선생이 되기로 합니다. 로스는 언어에 뛰어난 감각이 있는 사람인지라 1년 만에 영어로 조선어 문법책을 저술할 만큼 실력을 쌓았습니다. 2년 후 1879년, 4복음서와 사도행전의 번역 초고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완성된 초고를 가지고 본국인 스코틀랜드로 돌아가 모금운동을 벌이기 됩니다.
존 로스가 모국으로 돌아갔을 때 매제인 매킨타이어가 로스 대신 선교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때 백홍준이라는 20대 청년이 찾아옵니다. 그가 찾아온 이유가 세례를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세례를 받기까지가 독특했습니다. 3년 전 존 로스 선교사가 백홍준의 아버지에게 양초와 한문 성경을 나눠준 적이 있었습니다. 종교에 관심이 많았던 백홍준은 아버지가 가져온 책을 열심히 공부하며 마침내 진리를 발견하고 결심합니다. 세례 받기로 말입니다. 그 결심에 압록강을 건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습에 자극 받았던 사람이 바로 이응찬, 존 로스의 한글 선생이었습니다. 존 로스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다 성경의 내용을 들어서 인지는 몰라도 그도 세례를 받게 됩니다. 선교사를 만난지 3년 만의 일입니다. 이들이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세례자들입니다.
이렇게 개종자들이 많이 나오게 됩니다. 로스, 매킨타이어와 의주출신들이 번역한 한글 쪽복음이 인쇄되어 나오기 시작합니다. 1882년 봉천에서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이 처음으로 인쇄되어 나옵니다. 그런데 그해 조선은 미국과 통상조역을 맺습니다. 로스는 최초 한글 성서 발행과 조미조약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것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느꼈습니다. 로스가 번역한 이 성경은 이제 조선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의주, 소래, 서울에서 백여 명에 가까운 개종자들이 세례를 받겠다고 의사를 밝혔습니다. 서구 제국주의의 앞잡이인 동인도회사가 아니라 성경을 통해 닫힌 조선의 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른 역사도 써지고 있었습니다. 1882년 여름, 임오군란이 발생합니다. 흥선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수구세력과 명성황후를 중심한 진보세력의 무력충돌로 발전되 이 사건 와중에 명성황후의 목숨을 지키는 데 공헌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수정이라는 분입니다. 사건이 정리된 후 보상과 같이 일본 유학길에 오릅니다. 개화된 문영의 농학과 법률을 배우고 싶어 일본의 대표적인 농학자 밑에서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일본의 대표적인 농학자인 츠다센이란 분이 유럽에서 유학 중에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인지라 스승의 집에는 성경구절이 적힌 한문 족자가 있었습니다. 동야에서보던 글귀가 아니여서 흥미가 갔는데 그 성경구절은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이었습니다. 이수정이 호기심을 보이자 스승은 한문 성경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 낯선 책을 몰두해서 읽어 나갔습니다. 어느날이었습니다. 꿈을 꾸는데 '낯선 사람' 둘이 책을 한 보따리씩 안고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이수정이 묻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낯선 사람들이 대답을 합니다.
"당신 나라 조선에 가장 귀한 책이오."
"무슨 책이오?" 다시 이수정이 물었습니다.
"성경이오."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이 신비로운 꿈을 꾼 후 계속 성경을 읽기 시작하고 마침내 이수정은 세례를 받게 됩니다. 1883년 일본에서 이루어진 조선인 최초의 개신교 세례였습니다. 이수정은 성경을 우리말로 옮기기 시작합니다. 1885년 2월 순한글본 <신약전서 마가복음셔언해>를 인쇄하게 됩니다.
이수정은 조선도 기독교를 받아들여 일본처럼 개화가 되는 꿈을 꿉니다. 그래서 미국 교회에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편지를 씁니다. 이 편지는 미국에서 발행되는 선교 잡지에 실리게 됩니다. 1년 후 미국 교회는 조선 선교를 결심합니다. 장로교에서는 언더우드, 감리교에서는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가족 등 조선 선교 개척단이 꾸려졌습니다. 1885년 2월 그들은 조선에 들리기 전 일본을 방문합니다. 그때 이수정은 그들에게 우리말과 문화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 선발대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인천에 상륙하게 됩니다. 이수정의 꿈처럼 '낯선 두 사람'이 '조선에 가장 귀한 책'을 한 보따리씩 갖고 들어갔습니다. 그 책은 이수정이 번역한 한글쪽 복음인 마가복음이었습니다.
조선 선교에 앞서 이미 성경이 한글로 번역된 것입니다. 선교사가 가서 성경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미리 번역되어 조선에 전파된 것입니다.
조선의 부림절
페스시아 제국의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시 1세, 기원전 486-465) 대왕 시절 아말렉 족속 출신의 야심가 하만은 아하수에로에게 제국 내 유대인을 모조리 죽여주면 그 대가로 은 일만 달란트를 바치겠다고 제안한다. 하만은 유대인을 몰살시킨 후 그들의 재산을 빼앗아 그걸로 아하수에로에게 바칠 궁리까지 다 마쳐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유대인 모르드개의 용기와 에스더의 헌신 덕분에 유대인들은 멸절을 면하고 오히려 하만이 효수를 당한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이날을 부림절로 지키며 민족적 위기 앞에서 자신들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섭리를 기념하게 되었다. (286)
위와 같은 사건을 부림절 사건이라고 한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대한민국에서도 일어날 뻔 했다고 한다. 때는 일제 강점시. 1899년 서울시내에서 전차 이권을 놓고 친미파와 친러파가 갈등을 일으켰다. 친러파에 <이근택, 이용익, 김영준> 등이 있으며 보수파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친미 개화파를 제거하기 위해 1900년 말 "기독교인 말살 음모"를 꾸몄다. 친러파는 활실 재정을 관장했고, 친미파들에게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 1900년 중국에서 반외세, 반기독교 성격의 의화단사건이 일어나고, 국내에서도 반외국인 감정이 고조되자, 친러파 인사들은 이를 배후에서 지원하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 공사 알렌과 다른 외국 공사들의 협렵으로 전차 운행이 정상화되자, 고종 황제의 칙령을 날조하기에 이른다. 그 날조의 내용은 10월 10일(양력 12월 1일)부로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을 모두 죽이라는 통문을 지방관청에 하달했다.
미국 선교사(사무엘 마펫=마포삼열)의 보고에 따르면 의주 등 북방 지역에서 추수를 마치는 대로 기독교인들을 축출하려 모의중이라는 설이 있으므로 이를 예방할 것을 요청했다. 이 사태를 주도했던 것이 친러 보수파 김영준이라는 자이다. 이 자는 서자 출신이지만 고종의 총애로 경무사(경찰청장)까지 된 인물이다. 그러나 양반가에서는 서자출신이라 꺼렸기에 그는 배화학당에 교펀을 잡고 있던 유영지 전도사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선교사로 굳게 헌신한 유영지는 그를 거부했다. 양심을 품은 김영준은 친러 보수파 이용익과 짜고서 1900년 12월 1일 기해 모든 기독교인을 몰살할 음모를 세웠다. 결국 고종 황제의 칙령을 위조하여 지방관청에 밀지를 하달했다.
한편, 미북장로회 회의를 마친 언더우드 선교사는 황해도 순회 전도에 나섰다. 해주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끔찍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기독교인 학살칙령"이다. 12월 1일 모든 유학도들은 가까운 서원에 모여 서양인과 예수교인 모두를 죽이고 교회와 학교와 병원을 불태우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급해진 언더우드는 알렌 공사에게 전달해줄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직접 전달해주면 의심받을 것 같아 에비슨 의사에게 대신 부탁을 하였다. 전보 내용도 중간에 사람들이 볼 수 있어서 영어 대신 라틴어로 적었다. 이 편지를 받은 알렌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태도를 바꿔 외부에 알리고 드 다음 고종을 만나서 음모 사실을 보고했다. 고종은 이 말이 실제로 떠돌았는지 확인을 했다. 실제로 그랬다. 즉각 살해 칙령은 조작된 것이며, 기독교인을 보호하라는 새로운 칙령을 내렸다. 이로써 기독교인 살해 음모는 사전에 무산된 것이다. 보름 후 김영준은 이일과 외국 공관 협박 사건에 연류되어 처형을 당했다. 그래서 교회사학자 김승태는 이를 "한국의 부림절 사건" 이라고 한다.
출처: https://kuyrian.tistory.com/204 [카리안의 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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