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갈의 소모는 막대기
사사기 3:31
“에훗 후에는 아낫의 아들 삼갈이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블레셋 사람들은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온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그 근거로는 ① 가나안 원주민들과 달리 블레셋은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점 ② 돼지 고기를 즐겨 먹는다는 점 ③ 다른 가나안 민족처럼 제국적 왕정을 이루지 않았다는 점 ④ 블레셋 사람들은 그리스 사람들처럼 자유와 이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는 점 ⑤ 블레셋 도시 가드에서 발견된 뿔이 달린 제단이 있다는 점. 이런 점들을 이유로 블레셋 사람들의 기원을 그리스로 추정한다. 이스라엘에서 고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그것에서 고고학 작업을 했던 임미영 박사 역시도 고고학적 증거가 많이 발견되어서 블레셋 사람이 그리스에서 왔다는 걸 말해준다고 한다.
어쨌든 이들은 그리스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를 했다. 이주를 하고 땅에 정착한 뒤 가나안 지역의 바알과 아세라를 그들의 신으로 받아드렸다. 거기에다가 블레셋 사람들은 철기 문명을 누리고 있었다. 겨우 청동기 문명을 맛보던 가나안 땅 주민들이나 이제 겨우 가나안 땅에 정착하려는 이스라엘에게 블레셋은 확실한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의 힘으로는 격차를 줄일 수 없는 상대를 가리킬 때 쓰는 신조어)이었다.
사사기 3장 31절은 삼갈 선지자가 소를 모는 막대기로 강력한 해양 민족인 블레셋 육백 명을 죽였다는 기적이야기가 있다. 이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것은 ‘바알’이다. 바알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지만 그 은유적인 표현이 등장한다.
시리아 북쪽 지중해 가까운 곳에 우가릿이란 곳이 있다. 도시 유적으로 유명한 곳인데 이곳에서 B.C 14세기로 추정되는 바알 신상이 나왔다. 이 신상은 머리에 황소 뿔 모양의 투구를 쓰고, 오른손에는 망치 모양의 철퇴를, 왼손에는 끝이 뽀족한 지팡이를 들고 있다.
고대 가나안에서 소는 전쟁의 신으로 바알을 암시했다. 바알은 전쟁 뿐 아니라 번영과 풍요, 가축을 주관하는 목축의 신이었다. 그야말로 이 지역에서는 가장 크게 영향력을 미치는 전지전능한 최고의 신이었다. 그래서 블레셋 백성들의 보호자와 수호자 였던 바알을 이겨야 전쟁을 승리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사사기 3장 삼갈의 ‘소 모는 막대기’라는 표현은 어떤 의미일까? 말 그대로 소를 치는 목동의 막대기였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소는 드물었다. 소를 키울 수 있는 곳은 사마리아 산지 북쪽부터 소 목축이 가능했다. 밷세메스 지역을 제외하고는 남쪽 유대 지방에서는 아주 드물었다. 그래서 실제로 소를 본 사람들은 아주 소수였을 것이다.
이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위대하며 완벽한 전쟁, 다산, 풍요의 신 바알이 보잘 것 없는 소 모는 막대기를 든 목동 앞에 고개 숙인 장면을 상상해 보자. 여호와 앞에서 바알은 그저 소치는 목동 앞에 놓인 한 마리 소에 불과하단 말이었다. 하나님께선 말만 하지 않으셨다. 목동이 소 치는 막대기로 소들을 이리저리 몰고 다니듯 삼갈을 통해 블레셋을 물리치셨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게 삼갈이 ‘아낫의 아들’이라는 표현이다. 삼갈의 아버지는 아낫이 아니다. 아낫은 가나안 여신의 이름이었다. 전쟁과 사랑의 신으로 가나안 사람들을 숭배했으며 아세라 여신과 동일시 되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사사 삼갈이 이 이방신의 아들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아낫의 아들이란 말은 아낫 신의 대리자라는 말이기도 했다. 이를 ①삼갈이 이방인이었다는 걸로 보기도 하며 ② 삼갈 집안이 이방신을 섬겼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③로 볼 수 있는 것도 있다.
이를 보려면 먼저 당시 이스라엘이 어땠는지 살펴보자.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강인함과 월등함에 기가 죽어 있었다. 그들은 철기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잘 나가는 사람들이 섬기는 신은 풍요의 신 바알과 아세라 그리고 아낫이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떠나 눈앞의 힘, 권력, 풍요로움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③의 해석은 이것이다. 이런 상황을 보고 사사기는 삼갈을 ‘아낫의 아들 삼갈’로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낫의 아들 삼갈을 보내셔서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을 무찌르겠다고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참으로 통쾌하시다. 이스라엘이 눈앞에 바알과 풍요, 번영에 쫄아 있을 때 그때 하나님께서는 유쾌하게 삼갈의 소모는 막대기를 사용하신 것이다. 기죽은 이스라엘에게 보인 하나님의 행동이셨다.
2. 솔로몬의 일천 번제?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열왕 3:4)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렸던 곳은 기브온 산당이었다. 솔로몬 시대 번제단은 아카시아 나무를 놋으로 감싸서 만들었다. 번제단은 가로와 세로 각 2.5미터이며 높이는 1.5미터 정도였다. 이 정도 크기의 번제단에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린 것이다. 기븐온 신당이 아무리 커도 제물은 번제단에서만 바쳐진다. 단 하나의 번제단에서 많은 제물들을 바쳐야 했다.
“여호와 앞 곧 회막 앞에 있는 놋 제단에 솔로몬이 이르러 그 위에 천 마리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역대하 1:6)
이 번제단에 소 한 마리, 아니면 양이나 염소 두 마리 정도는 올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상은 힘들다. 대부분은 한 마리씩 올렸다. 그렇다면 역대하 1장 6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천 마리를 번제단 위에 탑으로 세웠을까? 아니면 쉬지 않고 천 마리의 제물을 번제단에 올렸다는 말일까? 그런데 또 생각해 봐야하는게 있다. 번제를 바치기 위해서는 도축한 후 배를 갈라 내장과 기름을 제거하고 번제단에 올려 불로 태워야 했다. 아무리 능숙한 사람이라도 최고 반나절 걸린다. 그러면 혼자서 하루에 천 마리의 제물을 바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면 하루에 한 마리씩 1000일 동안 드린 것일까? 아니면 오전, 오후 각 한 마리씩 드려서 500일이었을까? 크기가 작은 양이나 염소로 한 번에 2마리씩 오전, 오후에 하면 250일 정도 걸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 또 문제가 생긴다. 예루살렘 성에서 기브온까지 12Km 걸린다. 나귀를 탄 솔로몬 병사들과 신하들을 거느리고 가면 아무리 빨라도 반나절이 걸린다. 이런 강행군으로 1년 동안 지속한다는 것은 한 나라의 왕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제사만 드렸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당시 국내나 해외의 상황을 본다면 불가능하다.
도축도 레위기에서는 바치는 자가 직접하고 제사장은 거들도록 되어 있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직접 1000마리를 도축했다는 말이 된다. 하루에는 당연히 불가능하다. 땔감도 문제다. 팔레스타인에서 나무는 귀하다. 그 귀한 재료를 일천 번제에 쓰려면 정말 막대한 양이 필요하다. 물론 당시 솔로몬의 시대가 부유했기에 가능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전에 솔로몬은 후궁이 칠백 명, 첩이 삼백 명 도합 천 명이다. 당시 예루살렘 성 안의 인구가 5000명으로 추정하는데 1/5이 솔로몬의 아내들이었을까? 여기에 등장하는 천 명은 또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이해는 일천 번제와 연관이 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24:60a을 볼 필요가 있다.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의 어머니가 될지어다”(창 24:60a)
창세기에 등장하는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조카 브두엘의 딸이며 라반의 여동생이었다.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을 따라 가나안 땅에 와서 이삭의 아내가 되었다. 위의 구절은 리브가 가족들이 리브가에게 한 말이었다. 또,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축복하며 이렇게 말한다. “에브라임의 자손은 만만이요 므낫세의 자손은 천천이리로다”(신 33:17b)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에 대하여 이렇게 칭송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b)
이 외에도 이런 표현들은 많이 등장한다. 일천과 일만은 성경에서 대부분 ‘많음’, ‘가득함’을 뜻하는 관용어로 사용될 때가 많다. 솔로몬의 일천 번제는 일천 회의 번제나 일천 마리의 번제가 아니라 많은 번제를 드린 데 대한 강조로 볼 수 있다. 한 나라의 왕이 반나절 걸어가서 직접 제물을 도축한 후 번제를 드리고 밤늦게 다시 왕궁으로 돌아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열 번만 해도 백성들에게는 대단히 인상적일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은 천천, 다윗은 만만’이라고 칭송했던 것처럼 솔로몬의 제사를 두고 일천 번제라고 한 것은 극찬으로 볼 수도 있다.
어쨌든 이것을 두고 ‘일천’에 겅조하여 천일기도를 한다던가 천 번의 헌금을 드린다는 식의 해석은 온당하지 못하다고 저자는 본다. 우리 조상의 문화를 억지로 성경에 적용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오류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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