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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공부흔적

[강의] 무교회주의자들 - 우치무라 간조, 김교신, 손기정, 류달영, 풀무학교, 풀무원

by 카리안zz 2021.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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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교회주의자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Boys, be ambitious"로 유명합니다. 이 말은 윌리엄 클라크라는 사람이 했던 말입니다. 농학박사이기도 한 윌리엄 클라크는 삿포로 농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또다른 직업이 있었으니 바로 선교사였습니다. 삿포로 농학교를 시작하고 몇 년 흘러 대부분의 아이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켰다고 합니다. 그러다 포교활동때문에 결국 사임하게 되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학교를 떠날 때 한 말이 바로 그 유명한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입니다.

윌리엄 클라크 동상


뭐 혹자는 앞에 크리스천 소년들이여가 있다나 아니면 뒤에 돈도 명예도 아니라 인간됨을 위한 야망을 가져라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워딩이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 때 있었던 학생들 중에 쟁장한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제가 예전에 검색을 했을 때 몇몇 기억에 남는 분들이 있었는데 지금 딱 기억에 남는 사람은 니토베 이나조입니다. 니토베 이나조는 서양에 기사도가 있다면 일본에는 무사도가 있다고 알린 사람이기도 합니다. 무사도란 책을 써서 일본인 최초로 세계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서구 사회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대단했냐면 일본 구화폐에 실린 인물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분을 카톨릭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글에는 퀘이커교도라고 하는 사람도 있기도 합니다. 어쨌든 크리스천입니다.

니토베 이나조

지금은 삿포로 농학교는 지금 홋카이도 대학이 되었는데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대학이라고 합니다. 농학부는 도쿄대와 교토대와 함께 탑3이고 수의학으로는 일본 원탑이라고 합니다. 니토베 이나조가 농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대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공부하다보니 삿포로 농학교보다 수준이 너무 떨어져서 자퇴했다고 합니다. 삿포로 농학교가 당시에는 최첨단의 근대 학교로 보면 될 거 같습니다.
한 때 홋카이도에 참 가고 싶었는데 홋카이도 대학에 윌리엄 클라크 동상을 한 번 보고오는 코스도 생각을 해 봤습니다. 미우라 아야코 생가와 작품을 영감을 받은 홋카이도 마을도 가보고 싶었고 그랬습니다. 뭐니뭐니해도 니토베 이나조의 동기인 우치무라 간조가 있기도 합니다.

우치무라 간조

무교회주의자의 창시자로 알려진 우치무라 간조입니다. 고등학생때 이분의 <구안록>을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르고 계속 읽었는데 지금 보면 알까 싶습니다. 그외에 <우치무라 간조 회심기>는 제법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우상이 많은 일본에서 회심을 한 내용을 썼기에 제법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어쨌든 이 무교회주의. 교회라는 곳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분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게 바로 성경입니다. 장로교에서 우치무라 간조에 대해서 비판을 합니다. 너희들의 정체가 의심스럽다고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 논박하며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인 김교신 선생님께서 이렇게 답합니다.

'전도 데이', '전국총동원', '대거전도', '대거기행렬' 등의 문구나 선동은 일찍 한 번도 우치무라 선생께서 들을 수 없었습니다.
대 전도를 하려고 시도하지 말고, 대 기적을 행하려 말고, 오직 신명을 중히 하고, 그 말씀이면 다만 좇고, 신을 믿는 것이 곧 사업인 줄로 믿고, 무위에 유사한 생애를 보내는 것이다. 신앙생애의 대부분은 인내다. 정숙이다. 그러므로 활동 비약을 사랑하는 이 세상과 이 세상 교회에는 칭찬받지 못하는 생애다. 그러나 이것이 신과 함께 걷는 생애다..... 아무런 사업을 일으킴이 없을지라도 감히 불만을 느끼지 않는 생애다. 또 신에게서 어떤 것도 받지 않을지라도 저 자신을 주셨으므로 그 외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생애다.

<김교신> 키아츠 엮음, 137-139.


그러니깐 지금처럼 전도축제니 총동원전도주일이니 그런 것이 아니라 주류교단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을 강조했던 것이 바로 무교회주의자들의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서구에 의해 형성된 제도된 교회가 아니라 성경을 바로 받아드려진 우리의 교회를 추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점에서 분명 비판할 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동양인의 눈으로 성경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 형성될 수 있는 어떤 지점을 분명 발견하기도 해야 합니다.
우치무라 간조는 농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일본으로 귀국하게 됩니다. 여러 자리들을 거치지만 제일고등중학교 교사로 부임하게 됩니다. 이곳에 부임하고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사건이 바로 "불경사건"입니다. 천황의 사진 앞에서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해야 하는데 우치무라 간조는 그걸 안 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후에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의 제국주의를 계속한다면 하나님에게 불벼락을 맞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죠.
여튼 그후 만든게 도쿄의 작은 모임이 세워졌는데 성경공부 모임이었습니다. 이때 한국인 제자들도 생기는 그 유명한 함석헌 선생님이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뒤에 살펴 볼 김교신 선생님이 계시지요. 잠깐 이 성경공부 모임이 어떻게 되었냐면 이때 제자들이 패망한 일본을 일으키는데 일등공신들이 됩니다. 동경대 총장 3명, 교육부 장관이 5명이나 배출되었습니다. 아마 초등학교 개념도 그 제자 중 한 사람의 작품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저자가 우치무라 간조이기도 했죠. 그래서 지금의 일본을 있게 한 20명 중에 한 명으로 우치무라 간조를 꼽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제자인 김교신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치무라 간조가 자신의 말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 조선인들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유명한 건 함석헌 선생님이시지만 저는 김교신 선생님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함석헌 선생님

함석헌과 김교신 두 분 모두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이긴 했지만 갈리는 지점이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류영모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래서 동양사상을 많이 수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김교신 선생님이 함석헌과 큰 거리감이 있었습니다. 노자를 예수님과 같은 위치로 보고 범신론이 있고 하니 김교신 선생님 그룹에서는 경계를 많이 했지요. 오직 예수, 오직 성경의 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충분한 반응입니다.

김교신 선생님은 말그대로 학교 선생님이셨습니다. 양정 고등보통학교의 선생님이었습니다. 이때 제자가 바로 마라톤 금메달 리스트인 손기정 선생님이셨습니다.

손기정 선수는 김교신 선생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무엇이 저절로 배워지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손기정 선수와 김교신 선생님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양정보통학교 시절 손기정 선수의 비공식 트레이너가 김교신 선생님이었는데 1935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베를린 올림픽 국가 대표 선발전때였습니다. 손기정 선수의 요청으로 김교신 선생님이 앞서 갔는데 예전에 자전거로 알고 있었는데 어떤 곳에는 자동차로 되어 있고 정확한 건 모르겠습니다. 일화로는 김교신 선생님이 손기정 선수에게 "기정아! 나라를 생각하고 뛰어라"라고 전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나라와 예수님"을 생각하고 뛰어라고 말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근데 예수님은 추가한 문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손기정 선수는 "선생님 얼굴을 보면서 뛰겠다"고 전했습니다.
동시 작사가로 유명한 윤석중 역시도 김교신 선생님의 제자였습니다. 윤석중은 '퐁당 퐁당 돌을 던지자', '졸업식 노래', '떳다 떳다 비행기', '새나라의 어린이' 등 유튜브로 그의 동요를 들어보니 어렸을 때 한 번 쯤은 들어보았던 동요였는데 이 동요의 작사가가 윤석중입니다.

한 사람의 교사로서 제자들에게 영향을 많이 끼친 분이 김교신이었습니다. 그분의 정신은 "조와 사건"이라는 교과서에도 실린 사건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성서조선>이란 잡지에 실린 글이 문제였습니다. 조와 사건은 겨울이 되었지만 아직 살아남은 개구리가 탄성을 질렀다는 글이 문제가 되어서 폐간이 되었습니다. 개구리는 조선을 상징하죠. 취조하던 일본 고등경찰이 성서조선 사람들을 가장 악질이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전향시키기가 쉬운데 성서조선 사람들은 종교니 신앙이니 하면서 500년 후를 내다보니 다루기가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김교신 선생님은 오래 사시진 못합니다. 나이 44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것도 1945년 4월 25일 민족해방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십니다. 말년에 공장 노동자로 취직했는데 그 공장은 약 5000명의 조선인이 징용되어 열악한 환경에서 비인간적 대우를 받으며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근로과 직원이 되어 의료, 주택 등 조선인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과 생활환경 개선에 진력을 쏟습니다. 그러다 병에 걸려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성경과 노동, 땅을 일구는 꿈을 꾸웠던 김교신은 그렇게 사라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제자 한 사람이 그가 꿈꾸던 것을 이 대한민국 땅에 엄청 큰 스케일로 시도하게 됩니다. 그 제자의 이름은 류달영이라고 합니다.
우치무라 간조가 강조했던 나라가 바로 덴마크 였습니다. 덴마크하면 유명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와 교육자로 유명한 그룬트비였습니다. 철학자는 목회자 지망생이었지만 목사 안수 받기 전 설교에서 목사님들께 독설을 남기고 목사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룬트비는 루터교 목사님이셨습니다. 덴마크의 국부라고 불리기도 한다는데 이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땅을 사랑하자"는 말로 유명합니다. 예전 KBS인가 이분을 다루는 특집을 봤는데 지금의 덴마크 교육을 이 분이 일궜다고 한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농촌에서 땅을 일구는 것을 강조한 분이시기도 했는데 이 분을 우치무라 간조가 일본에서 강연으로 많이 알렸습니다. 당연히 그의 제자들이 우치무라 간조의 책들을 번역하면서 덴마크 이야기를 듣게 된 것입니다. 농촌 운동에 무교회자들이 관심을 많이 갖게 된 것이죠. 스승 김교신 크게 영향을 받은 류달영은 평생 농촌 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합니다. 결정적인 계기는 우치무라 간조의 <덴마크 이야기>를 김교신 선생님이 보여준 것이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동양의 덴마크를 꿈꾸게 됩니다. 류달영은 김교신을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의 나의 인생관과 세계관은 모두 김교신 스승과의 만남으로 자리 잡은 것"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양정고등보통학교에서 뿐만이 아니라 김교신의 주일 성서 모임과 또 이후 일상을 같이하는 시간도 가졌다. 류달영은 우리나라에 농촌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분이다. 이분이 '농심'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신 분인데 '농심'이라는 기업의 말고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 꿈을 이룰 계기가 다가옵니다. 해방 후 서울대 농대 교수가 된 류달영에게 군사 정부가 다가옵니다. 훗날 1961년 쿠데타 직후 군사 정부에서 만든 '재건국민운동본부'의 본부장을 맡았습니다. 박정희가 여러 차례 직접 류달영을 만나 본부장 직책을 맡아 줄 것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단, 박정희가 일체 간섭을 하지 말라는 조건으로 승낙했습니다. 이후 류달영은 덴마크 모델에 따라 국민운동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착수 했다.
후에 재건국민운동은 새마을운동의 주요 모델이 되었습니다. 왜 류달영의 재건국민운동은 사라지고 새마을 운동이 생겨났을까. 그것은 국가주의자들과의 대립때문입니다. 확실히 무교회주의자들은 국가랑 친하질 못합니다. 우치무라 간조도 고등학교 선생이었는데 천황의 교육 칙어에 대한 불경 사건으로 학교에서 짤렸고 러일전쟁을 반대해서 일본의 적으로 몰려 있었다는 걸 앞서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 중에 유명한 사람이 여럿 있지만 대표적으로 야나이하라 다다오입니다. 그는 일본 군국주의에 반대하여 도교대학교 교수직에 쫓겨나기도 했다. 쫓겨난 이후 1940년, 1942년 두 차례 한국에 와서 서울과 평양 등지에 무교회주의 집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모두 김교신 선생님이 주최한 것이었죠. 1942년 평양 방문때는 김교신 선생님께서 장기려 선생님께 지시를 내려 모임을 준비하게 했습니다. 장기려 선생님의 전기를 보면 그 모임에서 조선총독부의 감시가 있었다고 합니다. 왜냐면 야나이하라 다다오는 반정부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훗날 도쿄대학교 총장으로 부임하게 되죠.
다시 돌아와서 류달영 선생님은 결국 군사정부와의 알력으로 재건국민운동본부는 해체되었습니다. 이용만 당한 것이죠. 그래서 동아일보에 박정희 군사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실기도 했습니다. 민간이 중심이 되는 걸 꿈꿨던 류달영이기에 군사정부의 개입은 참으로 맞지 않았습니다. 류달영은 재건국민운동과 새마을운동을 연관시키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새마을운동의 전개에 실질적인 힘을 보탰습니다. 새마을운동 중앙 연수원 원장이 된 김준 등, 자신이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을 맡았던 시기에 운동에 참여시켰던 서울대 농대 제자들 중 많은 수가 이후 새마을운동의 주요 간부가 되었던 이유도 있었습니다. 류달영은 이런 방식으로라도 농민이 잘살게 된다면 그 자체로 의미 있다고 생각했던 듯합니다. 그는 농민을 사랑했고 '농심'이란 말을 창안해 사용하기도 했다.
류달영이 국가 정책에 참여함으로써 이룬 성과는 큽니다. 대한민국 사회에 류달영이 기여한 것은 농촌 사업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평생교육' 개념은, 1980년 헌법 개정 심의위원으로 참여한 류달영이 '평생교육' 조항을 헌법으로 제정케 함으로써 대중화된 것입니다. 이 때도 류달영은 덴마크 교육 모델을 참조했습니다. (143)

무교회주의자들이 농촌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고 위에서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공동체를 열었는데 그 공동체가 바로 풀무 공동체입니다. "이찬갑의 풀무 공동체는 한국 무교회주의자들의 세계관과 가치관, 방법론을 집약해서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나중에 홍성에 풀무학교가 새워집니다. 우리가 아는 풀무원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풀무원의 창립자 원경선은 풀무학교 이사진 중 한 사람이었고, 풀무학교의 이름을 따서 농장 이름을 지었"습니다. 원경선 장로의 아들이 바로 국회의원 원혜영이죠.
여튼, 풀무라는 이름은 "녹슨 쇠붙이를 녹이고 정련해 새로운 농기구를 만든다"는 뜻입니다. 성서에도 등장하는 용어여서 이를 이름으로까지 지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개역개정 성경으로 풀무를 검색했을 때 위와 같은 맥락에서 쓰인 단어는 없습니다. 개역한글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말했는지 각주가 없어서 모르겠습니다(아마도 신명기 4장 20절에 쇠 풀무불이 풀무이지 싶다. 출애굽, 즉 구원과 연관되기에 의미가 맞지싶다). 하지만 위의 맥락에 쓰이는 성경 구절은 있긴 합니다. 이사야서 2장 4절이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이 구절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새로운 농기구를 만든다는 것만 같아서 입니다. 개역한글의 풀무는 심판을 말할 때 자주 쓰이는 표현인데 어떤 성경구절을 보고 풀무를 붙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문구에서 우리는 새마을운동에서 풀무원이라는 기업까지 왔습니다. 김교신 선생님의 제자로 장기려 선생님도 계신데 의료보험 역시도 그 흔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흔적을 보면 신기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그리스도인들의 발자취를 볼 때 저는 참 기쁩니다. 그래서 이 기쁨을 나누려고 이번 강의를 준비했습니다. 잘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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