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환대
먼저 오늘은 창세기 18장 1-8절 본문을 읽고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세 명의 나그네가 하필이면 가장 뜨거운 대낮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습니다. 중근동 지역은 TV나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듯이 너무나 뜨거운 곳입니다. 그래서 한낮에는 웬만하면 다니지 않습니다. 더위를 피해 쉬어야 할 때 지금 나그네들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움직이기가 가장 싫을 때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합니다. 마실 물도 귀한 광야에서 물을 가져다가 나그네의 발을 씻김으로 대접을 합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음식을 만들어 줍니다. 아브라함은 조금만 가져온다고 했지만 그 양을 보니 좀 심각합니다. 6절에 고은 가루 세 스아로 빵을 굽기 시작합니다. 고운 가루는 밀가루로 당시 중동에서는 가장 귀한 재료였습니다. 양도 어마어마 합니다. 한 스아의 밀가루는 약 7.3리터였고, 세 스아는 22리터 정도이고 무게는 대략 13킬로그램입니다. 작은 크기의 빵하나가 밀가로 50그램 정도인데 세 스아는 빵 300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빵을 만들었을까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많은 양의 빵을 만들려면 많은 양의 숯불이 필요합니다. 엄청난 양의 숯불을 쓰면서 화덕 역시도 가정용 넘어서 야외용 화덕들도 여럿 설치했을 겁니다. 지금 아브라함 온 집안 사람들이 분주하게 일하고 있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여기서 끝나는게 아니라 아브라함은 더 대접을 합니다. 바로 송아지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중동지방은 목축하는게 어려운 동네입니다. 그래서 광야에 적응된 양과 염소가 대부분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소고기는 상상하기도 힘든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송아지는 더더욱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송아지 요리는 구이가 아니라 찜으로 하는데 이때도 찜 요리를 했을 겁니다. 송아지와 함께 아브라함은 엉긴 젖과 우유를 대접합니다. 엉긴 젖은 지금으로 치면 요플레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금도 중동에서는 송아지 찜에 양젖이나 소젖을 발효시킨 요플레 같은 게 많습니다. 물론,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닙니다. 송아지 요리하는 것도 일인데 6개월 된 송아지가 250키로 하니 고기만해도 150키로 넘는 엄청난 양을 지금 요리하고 있습니다.
세명의 나그네를 대접하기 위해 지금 엄청나게 힘을 쏟는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이 눈에 선합니다. 가장 뜨거울 때 움직이기는 게 너무나 싫고 힘겨울 때 아브라함은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은 온 사람들을 불러 모아 300여 개의 빵을 굽고 150키로나 되는 송아지를 요리합니다. 그야말로 성대한 잔치가 지금 벌어지고 있습니다. 세 나그네를 대접하는 장면은 한 마디로 잔치입니다. 성대한 잔치! 이 나그네들을 가장 귀한 손님으로 생각한 걸로 보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과는 대비되는 게 있습니다. 바로 다음 장에 소돔과 고모라에서의 장면입니다. 그곳에서도 역시 나그네가 들립니다. 그들은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요? 아시다시피 소돔과 고모라는 나그네를 천대했습니다. 배제하고 멸시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아브라함에 비해 훨씬 부유한 도시인데 왜 나그네들을 이렇게 천시하고 멸시했을까요? 사실은 당시 문화로 보자면 소돔과 고모라가 이상한게 아니라 아브라함이 이상했습니다. 당시에는 환대가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광야에 거주하며 목축하는 사람들을 천시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당연히 나그네들을 차별했고 멸시했습니다. 심지어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기에 생명도, 재산도, 몸과 삶 역시도 빼앗았습니다. 그들을 연약했기에 그렇게 대해서 자신들에게 별 화가 안 닥쳐 오는 것이죠.
그러고 보면 창세기에서 사사기까지 낯선 나그네들을 환대하기보다는 혐오하고 천대한 이야기들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차별하고 멸시하고 선을 긋던게 당연한 시대에 나그네를 환대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특별해 보입니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할 수도 있는데 누군지도 모르는 낯선 사람들을 극진히 환대했던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안락하고 안전한 삶을 살았던 이들은 천대했고 광야에서 천대받던 아브라함은 환대를 했습니다. 신분과 계급이 자꾸 고정되려는 시대에 아브라함의 이 환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메시지인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창세기 22장 1-19절을 읽고 시작하겠습니다.
이삭은 일등 아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제물로 바치려 했을 때도 순종했고, 리브가를 만나기까지 묵묵히 기다렸고 결혼 후에는 60세가 다 되어 쌍둥이를 얻기까지 기다린 사람도 이삭이었습니다. 우물을 둘러싸고 갈등을 겪을 때도 포기할 줄 알았던 사람이 이삭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던 때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까지는 사흘 길입니다. 번제를 드리려면 많은 양의 나무가 필요합니다. 당시는 철기 문명이 발달하기 이전이라서 단단한 땔나무를 준비할 도구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나무는 100키로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살던 곳에는 나무가 귀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급히 많은 양의 나무를 준비하고 사흘 길 동안 갈 생필품 또한 챙기며 한가득 싣고 이동하는 모습이 눈에 그려집니다. 산 입구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나귀를 지키라고 말하고 한 손에는 불, 다른 손에는 칼을 들고 이삭과 산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말씀하신 곳까지 다와갑니다. 백 살에 얻은 귀한 자식을 바쳐야 할 때입니다. 당시 고대 중동에서 인신제사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흔한 일을 아브라함은 그저 행동에 옮기려고 한 것일 수 있었을 겁니다. 물론 한켠에 물음이 있었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들과 다르게 인격적인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이삭도 의문이 있었습니다. 왜 제물이 되는 양이 없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혹시나 하던 생각은 맞아 떨어집니다. 자신이 제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어떠한 반항도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받아드립니다. 오늘은 아브라함보다 이삭을 중점으로 보도록 학겠습니다. 번제단 위에 누워 있는 이삭을 상상해 봅니다. 창세기 22장 7절에서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이 없다는 질문을 했습니다. 조금 문학적 상상력을 가미한다면 이삭은 집에서 떠날 때부터 했던 생각일 수 있습니다. 무언가 다른 게 있겠지 싶다가 이제 산 위에 오르자 드디어 말을 꺼냈던 겁니다. ‘혹시 내가 제물인가?’하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맞아떨어집니다. 본문에서 이삭의 심리가 전혀 안 나와있어서 조금 상상을 해봅니다. 갓 사춘기를 넘긴 아이가 제물이 되었고 아버지가 자신을 향해 칼을 든 장면을 떠올려 봅시다. 아마도 사흘 간의 불안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공포가 이삭에게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쩌면 칼로 자신을 찔러 죽이려던 아버지의 모습이 트라우마로 남았을 지도 모릅니다. 번제를 드릴 때마다 어쩌면 생각나는 장면일 지도 모릅니다. 물론, 추정입니다.
어쩌면 일등 신앙인이던 이삭에게 이런 고통스런 기억이 있었고 그것을 치유하시던 하나님을 경험하여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삭이 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강의 때 트라우마보다 오히려 신앙의 발돋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수강생분들이 말씀해주셨다. 듣고 보니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기에 트라우마보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기억이 더 남아 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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