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낀 점
이 책은 그렇게 학술적으로 엄밀하게 쓰여진 책은 아니다. 보니 여러 자료들을 가지고 한국 자본주의 정신을 추적해 나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소예언서 중 호세아서를 강연하기 위해서 읽었다. 호세아서에 나오는 바알신앙이 바베식으로는 천민자본주의, 보다 이 책에서는 김덕영이 말하는 에리식톤 콤플렉스와 대비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우리의 자본주의는 에리식톤 콤플렉스(에리식톤은 아무리 먹어도 허기를 느끼는 저주를 받아서 끊임없이 먹어치우는 그리스신화의 등장인물)라고 이덕영은 보는데 국가(박정희)가 주조하고, 재벌(정주영)이 구현하고, 개신교(조용기)가 성화했다고 본다. 그 상징 인물로 이명박을 둔다. 그는 이 세 부분을 관통한다. 한 번 이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맛보도록 하자.
한국 자본주의 정신
근대 자본주의와 정신
먼저, 근대의 자본주의를 만든 사람들은 칼뱅주의자들로 알고 있다. 자본주의를 칼뱅주의자들이 만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인류의 역사에서 개신교가 등장하기 전에도 여러 형태로 있었기 때문이다. 약탈자본주의라는 것도 있는데 이같은 경우 해적들의 무기와 선박이 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 자본주의도 있는데 이같은 경우 군인들의 무기가 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근대 산업자본주의는 여태의 자본주의랑 어떠한 차이를 가질까? 베버의 정리이다.
첫째, 베버에 따르면 근대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상 명멸한 여타의 자본주의와 달리 일상적 삶의 수요 전체를 포괄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방식을 제거한다면 경제적 삶의 조직이 와해될 것이다. 근대는 전형적인 자본주의시대이다.
둘째, 베버에 따르면, 근대 자본주의 기업은 합리적인 자본 계산에 기반하는바, 이는 구체적으로 근대적 부기의 수단과 대차대조표 작성을 통해 수익성을 통제하는 것을 가리킨다.
셋째, 베버에 따르면, 근대 자본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과 시민계층을 그 중요한 특징으로 한다. 먼저, 프롤레타리아트는 노동시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팔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무산계급이다. 기업은 이 프롤레타리아트 게급의 자유노동을 합리적이고 자본주의적으로 조직한다.
...
이러한 논의에 입각하여 베버는 근대 서구에서 발생한 산업자본주의를 "자유노동의 합리적인 조직에 기반하는 시민계층적 기업자본주의"라고 규정한다. 근대 서구의 시민계층은 형태 또는 체계로서의 자본주의와 정신으로서의 자본주의를 담지하는 사회집단이다. (29-30)
그러니 시민계층이 자본주의 형태와 체계를 만들고 기업의 중심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시민계층은 다름 아닌 프로테스탄티즘(칼뱅주의자)이었고 그들의 정신이 근대 산업자본주의의 정신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만든 산업자본주의의 형태와 체계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자유노동, 기업, 시장, 화폐와 유가증권, 복식부기 등과 같은 체계적 요소"(41)이다. 그들의 정신은 어떤 내용일까? 칼뱅주의 정신이며 그 정신에는 예정론이며 거기에서 파생되는 직업소명과 금욕주의가 있다. 저자의 설명을 들어보자.
이렇게 칼뱅의 예정론에 의해 초래된 개인의 심대한 내적 고독감이라는 심리학적 효과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사회학적 결과를 가져왔다. 먼저 칼뱅주의자들은 신으로부터 소명받은 직업노동에 헌신하고 이로부터 발생하는 이윤을 쾌락이나 향락 또는 경제 외적 목적을 위해서 소비하거나 낭비하지 않고 사업에 재투자하여 사업을 더욱더 번성케 함으로써 신의 영광을 드높이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칼뱅주의자들은 그렇게 함으로써만 자신의 구원상태, 즉 자신이 구원으로 예정된 자들에 속한다는 것을 내적 · 외적으로 확증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확증사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칼뱅의 예정론에 의해 초래된 개인의 심대한 내적 고독감이라는 심리학적 효과는 한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은 사회학적 결과를 가져왔다. 칼뱅주의자들은 교회, 성직자, 성례전 그리고 신 자체로부터도 분리되어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으로서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에만 의존하게 되고 직업윤리를 바탕으로 금욕적이고 합목적적으로 행위하고 직업 외적인 일상적 삶 역시 금욕적으로 조직하고 영위하게 되었다. 그 결과 종교개혁 이전까지 '수도원의 골방'에 한정되어 있던 금욕주의, 그러니까 수도승들의 탈세속적이고 초세속적인 금욕주의가 수도원의 높은 담장을 넘어서 구원으로 예정된 자들의 세속적 금욕주의로 확산되었다. (35-36)
자, 그러면 근대 산업자본주의의 틀과 정신을 시민계층이었던 칼뱅주의자들과 그 프로테스탄티즘(칼뱅주의)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자본주의는 누가 만들었고 정신에는 어떤 게 있을까?
에리식톤 콤플렉스
한국의 자본주의는 국가가 주도하여서 틀을 만들었고, 재벌이 구현하였으며, 개신교가 성화(의미를 보니 신성화가 맞을 듯하다)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 정신은 에릭식톤 콤플렉스다. 베버식으로는 천민 자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좀더 한국 상황에서는 에리식톤 콤플렉스가 맞다. 에리식톤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 인물은 "아무리 먹어도 허기를 느끼는 저주를 받아서 끊임없이 먹어치운다"(19). 이것이 한국 자본주의의 정신을 단적으로 나타낸다고 저자는 본다. "물질적 재화에 대한 무한한 욕망"(19) 이것을 저자는 에리식톤 콤플렉스라고 부른다. 그리고 국가의 지도자였으며, 재벌의 신화로 불렸고, 개신교의 장로이기도 한 이명박 대통령이 이를 상징한다. 그리고 그의 CF에서 "이명박은 배고픕니다". 더할 나위 없이 이명박을 통해서 한국식 자본주의를 알 수 있는 정확한 척도가 마련된다.
환원근대
에리식톤이 먹는 것을 통해서 끊임없는 욕망을 보였듯이 대한민국은 경제성장에 대해서 그러한 욕망이 보였다. 1만달러, 2만달러, 3만달러 곧 그것이 환원된 근대화이기도 했다. 근대라고 한다면 정치적 · 사회적 · 문화적 가치(합리적 시장, 금융 시스템, 노동윤리, 기업문화, 노동조건, 노사관계 및 합리적 경제정책, 분배와 복지 등, p. 54)를 고루봐야 하는데 그것을 전부다 경제로 환원시켜 버렸다. 그렇게 국가-재벌의 동맹자본주의가 탄생한다. 이들은 네 가지 차원을 구체화 했다.
1. 경제가 곧 근대이고 경제성장이 곧 경제다.
2. 국가와 재벌이 곧 경제다. ... 그 밖의 개인이나 사회집단은 근대화의 주체가 아니라 경제성장을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간주되면서 객체화되고 주변화되었다. 그리하여 개인과 인권이 억압되고 사회가 미분화되었다.
3. 경제가 근대화되면 경제 외적 영역도 근대화된다. ... 다만 경제가 근대화되면 경제 외적인 것도 근대화된다는 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경제 이외의 근대를 말하는 것은 반근대주의적인 발상으로 간주되었으며, 심지어 때로는 억압을 받았다.
4. 전통은 근대의 토대가 되어야 하거나 근대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한국의 환원근대는 전통에 대해 삼중적인 태도를 취했다. 첫째, 전통이 근대의 토대가 된다. 둘째, 전통은 근대를 위해 파괴된다. 셋째, 전통이 화석화되고 박제화된다. 이것은 경제적 근대주의와 문화적 전통주의의 결합이다. (54)
국가(박정희), 재벌(정주영), 개신교(조용기)의 메세지
국가(박정희)
박정희는 1963년 8월 31일에 행한 제5대 대통령 후보 지명 수락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이제 전 국민이 주동이 되어 의연히 일어서서 공화의 번영의 신천지를 이 땅 위에 건설할 때가 왔습니다. 대대로 이어온 우리의 땅을 우리들의 손으로 더욱 기름지게 가꾸어, 반만년 유구한 역사에 이루지 못한 선조의 꿈을 기어코 실현시켜야 할 것이며, 전진하는 역사에 발맞추어 새로운 민주 한국의 자주적 인간상을 창조하여야 할 것입니다. ······ 우리의 적은 바로 가난 그것입니다. 새로운 바탕 위에 계획된 건설목표를 향하여 풍요한 자원을 개발하고 우리의 의욕과 지혜와 땀으로써 영원히 이 땅에서 빈곤을 구축하고 자유와 번영의 복지국가를 건설합시다. (107)
4월 18일의 전주 유세에서 박정희는 다음과 같이 대중을 설득하고 있다.
그런데 제1차 5개년 계획이 성공적으로 완수가 되었는데, 왜 아직까지 우리의 살림살이가 그리 좋아지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이 많으냐 하는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 또 한번 해서 부자가 되는 그런 계획이 이 세상에는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수백 년 수천년 동안 물려받은 이 가난을 완전히 탈피를 하고 우리가 잘사는 나라가 되자면, 우리가 모두 부자가 되자면, 5개년 계획을 한번 하고 또 두번 하고 세 번쯤 해야 됩니다······ (121-122)
결국 이러한 메세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한한 발전을 통한 무한한 물질적 욕망의 충족 그 자체가 삶의 목표가 되었다. 부단히 피와 땀과 눈물을 쏟으며 일함으로써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것 그 자체가 삶의 목표가 되었던 것이다"(126)
재벌(정주영)
1998년에 출간된 정주영 회장의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 나의 사랑온 이야기>에서 그는 말한다.
나의 지독한 현장 독려는 우리 직원들 개개인과 나 자신, 나아가 우리 사회와 국가 모두의 발전을 위한 이로운 채찍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현재 '현대'의 중역이나 산하 생산업체 책임자들은 모두 건설 현장에서 나한테 눈물이 빠지도록 혼나가면서 잔뻐가 굵은 사람들이다. ······ 건설 현장에서 내 단련을 받으면서 일을 배운 사람은 어떤 자리에 갖다 놓아도 안심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그들을 무슨 일이든, 어떤 일이든, 누구보다 철저하고 완벽하게 수행해 낼 능력과 책임감 있는 '진짜 일꾼'으로 만들어놓았기 떄문이다. 매일매일 발전 그 자체라야 한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은 정지가 아니라 후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 걸음 두 걸음씩이라도 우리는 매일 발전해야 한다. 매일 발전하지 않으면 추월당하고 추월당하다가는 아예 추락하게 되고 그 추락은 중간에 세울 수도 비끄러맬 수도 없다. (172)
"그가 말하는 발전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고 현대가 선진기업이 되어서 국민들이 잘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정주영에게 선진국은 경제가 성장하여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를 가리키며, 따라서 발전은 궁극적으로 돈과 부로 표현된다. 정주영에게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일, 일, 일이다. 다시 말해 다른 나라 기업들이 10시간을 일에 쓴다면 우리는 20시간, 30시간을 일에 투입해서 1백 년이라는 차이를 단축하는 것이 발전이다. 그 발전의 결과는 선진국들과 그 기업들을 따라잡는 것이다. ... 아무튼 박정희가 중단 없는 전진과 휴식 없는 노력을 요구했다면, 정주영은 분면불휴(자지도 아니하고 쉬지도 아니함) ) 노력을 요구했다."(173)
이렇게 보면 박정희는 총사령관이고 정주영은 야전사령관쯤 되어 보인다. 국가-재벌 동맹자본주의의 두 사령관들은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서 국가 발전, 즉 근대화를 이룩해 빈곤을 극복하고자는 공통된 신념하에 서로 인정하고 신뢰하면서 1인당 국민 소득 67달러의 나라가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의 나라가 될 수 있는 터전을 닦았다는 것이 정주영의 생각인 것이다."(190)
개신교(조용기)
개신교는 대형교회들이 있다. 여기에 대표되는 인물은 조용기 목사이다. 개신교의 성장은 한강의 기적과 시기가 비슷했고, 메세지 역시도 비슷했다. 개신교회는 국가와 재벌 이데올로기의 전도사였다. 국가와 재벌이 경제 성장을 위해 근대를 환원하고 나아갈 때 개신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대형화로 환원하며 저 대형교회로 나아갔다. 그들의 메세지들을 살펴 보자.
한국기독교총연합호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10.17 특별선언은 현하 국제정세의 해방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일대의 영단으로서 이를 적극 지지한다.
그리고 한국기독교평신도총연합회는 - 또 한가지 예를 들자면 - 다음과 같이 유신체제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 4백만기독교 신도는 무장간첩 남침, 푸에블로 피납, KAL기 피납, 월남전선 위기 등의 국제적·국내적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총궐기하여 우리 기독교 신도의 정당한 의사를 국내외에 천명한 바 있으며 이번 10월 유신도 적극 지지한다. (211)
이번에는 조용기 목사의 <삼박자 구원>의 내용을 살펴보자.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불광동 천막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할 때, 나의 심정은 착잡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서 복음을 증거하는 그곳 사람들이 영적으로 너무 황폐하고 절망의 벽에 부딪쳐 있으며 생활에 끼니를 잇지 못하는 처참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 나는 그들을 상대로 말씀을 증거하고 먹이는 가운데 중대한 자가당착에 빠졌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워온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이요 미래의 하나님일 뿐, 황폐와 가난과 저주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보여 줄 현재의 하나님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 현재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이 물음이 내 마음속에 충격적인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에게 과거의 그리스도를 소개하여 준다 해도 아무런 감격을 줄 수 없으며 그렇다고 미래의 그리스도를 전하기에는 그들의 현재가 너무 급박했습니다. ······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들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도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지금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나이까? 이 헐벗고 굶주리고 절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무엇으로 소망과 새 생명을 줄 수 있나이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오늘 이 시간 나와 저들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나는 끝없는 눈물의 기도와 통곡 가운데 생명을 내어놓고 부르짖었습니다. 많은 간구의 시간이 지나고 나자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속에 따사롭고 소망에 넘친 말씀을 심어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요한3서 제2절에 기록된 삼박자 구원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
그 후 나는 나의 모든 설교와 목회의 기초를 이 말씀의 터전 위에 두었습니다. 이 말씀에 중심하여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삼박자 구원으로 풀어나갈 때 내가 믿는 하나님은 과거와 미래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지금 살아 계셔서 나를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현재의 하나님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 때문에 오늘날 우리 교회가 세계적인 교회로 성장했고 또 계속하여 끊임없이 발전하여 나갈 것입니다. (236)
여기에서 "물질적인 축복"(237)이 도출된다. 조용기 목사가 말하는 "끈임없이 발전해 나가는 것". 이것은 박정희와 정주영이 끊임없이 말했던 말이기도 했다. 결국 그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2010년 10월 20일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직할교회 목회자 앞에서 말이다.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는 말을 믿지 마라. 목회에 실패한 이들이나 하는 변명이다. 주님 보기에 큰 교회가 아름답다. (242)
작은 교회에 환상을 가지는 것에 나 역시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 말이야 말로 뼈속까지 그가 믿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드러난다. 큰 교회가 올바른 교회라는 신념이 돋보인다. 큰 교회가 되지 않는다면 실패이다. 그의 목회에 성공과 실패는 교회의 사이즈가 결정된다. 근대를 경제로 환원했듯이 성경과 교회, 예배의 중요한 가치를 조용기는 큰 교회로 환원시켜 버린 것이다. 이 절묘한 조화들이 아닌가. 그것도 같은 시기에 말이다.
나가면서
국가와 재벌, 개신교를 말할 때 재미있는 부분이 많았지만 언급하지는 않았다. 특히 재벌이 탄생배경이 참 흥미로웠다. 왜그리 부정부패가 일어났는지도 얼핏 알만했다. 개신교 역시도 이승만, 박정희 정권때 받은 특혜도 상당했다. 여러모로 흥미로웠던 책이다.
국가와 기업, 그리고 교회를 두루 관찰한다. 내용이 학술서적이지 않아서 쉽게 이해가 갔다. 저자에 설명이 나름 친절했다고 본다. 다음에 나올 작업이 기대된다.
메모
1910년대에는 농업 식민지와 일본 공업제품의 시장으로 조선을 유지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호황기를 맞아 팽창한 일본 경제가 중국 대륙 진출을 꾀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본격 공업화에 착수하게 된다. (49)
- (일본의) 중국 진출 때문에 대한민국을 근대화 해야 되었다.
박정희는 가난을 극복하고 잘살아 보자는 구호 아래 돈과 물질에 대한 개인의 무한한 욕망을 자극하여 에리식톤 콤플렉스가 형성되도록 했으며, 이렇게 형성된 자본주의 정신은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가능케 했다. (77)
- 반론. 음... 그런데 김건우의 책에서 경제 개발은 박정희가 아니라 그 당시 팽배한 분위기였다고. 사상계 사람들도 경제계발을 추친했다. 김건우의 책 p.116~117에서 나온 것 같음.
이명박이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2위 후보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으로서 우리를 더 잘살게 해줄 수 있다고 유권자들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78)
- 동의. 이명박이 되면 부자되는지 알고 있었다.
이명박이 -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할 정도로 - 신앙심이 매우 깊은, 그것은 어려서부터 신앙심이 매우 깊은 기독교인이라면, 그리고 그 기독교가 신과 맘몬을 더불어 섬길 수 없다고 설파한다면, 이명박이 돈과 물질적 부에 대한 무한한 욕망을 갖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보인다. (89)
- 칼뱅주의, 청교도들과 다른 역설을 비교해서 설명.
이 성화된 속이자 속화된 성은 다름 아닌 한국 자본주의의 정신이다. 그것은 에리식톤 콤플렉스이다. 바로 이 정신, 이 콤플렉스가 청중들로 하여금 수십 차례 반복해서 들음에도 불구하고 들을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져 눈시울이 붉히도록 만드는 것이다. (93)
- 아비투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나 영적으로 구원받고 물질적으로 부요해지며 육체적으로 건강해진다. 이를 '조용기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이명박은 박정희와 정주영, 그리고 조용기주의로 대표되는 개신교가 융합된 인격체로서 그 누구보다도 에리식톤 콤플렉스를 철저히 체화하고 내면화함으로써 박정희 및 정주영과 더불어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끈 주역이 될 수 있었다. (93)
- 박정희(국가), 정주영(재벌), 조용기(교회) -> 이 맥락의 말들.
요컨대 각 마을과 주민들이 일정 액수의 돈으로 환원되었다. 그들의 삶은 노동으로 환원되었고 그 노동은 다시금 돈으로 환원되었다. 그들의 삶은 '노동-돈'의 연계 고리에 의해 지배되고 추동되었다. (146)
- 삶 -> 노동 -> 돈
"성장제일주의로 인해 성장 이외의 가치들은 무시되거나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된다는 점이다. 한국 교회가 수적 성장을 절대시한 결과 성장 아닌 가치들, 예컨대 정당한 치리, 의와 거룩함, 성결, 이웃 사랑과 베풂 등 기독교 본래의 가치들은 무시되거나 경시되었다. 물질적 풍요를 갈망하는 인간의 욕망이 신앙이란 이름으로 정당화되었고, 축복 지향적 신앙 형태가 ······ 풍미하여 기독교 기독신앙으로 심하게 경도되었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요컨대 교회 성장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교회 성장으로 환원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경제성장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경제성장으로 환원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230)
- 경제성장 지상주의 = 교회성장 지상주의
이러한 콘텍스트에서 텍스트는 물질적 부요를 중심으로 배열되고 독해될 수밖에 없다. 결국 중교적 구원이 물질적 축복으로 환원된다. (239)
- 근대 = 경제 = 경제성장
성경 = 삼박자 구원 = 물질적 구원.
(저자의 말은 조용기의 '삼박자 구원'은 당시 시대의 정신에서 성경을 보고 그것에 따라 배열한 신학이라는 것이다. 콘텍스트로 텍스트를 읽는 전형적인 잘못된 방식이다.)
책 맛보기
이승만 정권에 귀속된 경제권력으로는 적산불하, 외국 원조자금의 분배, 수입대체 산업화 정책, 관급공사, 시중은행의 민영화 등을 꼽을 수 있다. (57)
5.16 군사쿠데타 세력에 의한 부정축재자 처벌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정경유착의 공식적 고리"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정경유착의 고리가 이승만 정권에서처럼 단순한 분배 연합이 아니라 발전연합 또는 개발 연합이라는 사실이다. 국가와 재벌은 급속한 경제성장이라는 환원근대적 이념을 공유하면서 동맹을 체결했다. 국가-재벌 동맹자본주의가 공식적으로 출범한 것이다. (65)
요컨대 박정희 정권 초기에 국가와 재벌은 동맹을 체결하고 국가 경제의 두 주축이 되었다. 이 동맹은 불법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획득한 국가와 역시 불법적인 방법으로 자본을 축적한 재벌이 결탁한 것이다. (69)
다시 말해 돈과 물질적 재화에 대한 무한한 욕망을 신의 축복으로 정당화하고 신성화하며 이 욕망을 성의 영역에서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에리식톤 콤플렉스를 성화하는 것이다. (216)
사회가 다양한 영역과 기능으로 분화됨으로써 국가가 국가답고 기업이 기업답고 교회가 교회다워야 비로소 진정한 자본주의와 진정한 자본주의 정신이 가능해진다. 그 정신은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개인들의 합리적인 행위유형과 생활양식으로 표출될 것이다.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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