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낀 점
이 책,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추천한 책이다. 나는 이 책의 제목이 참 좋았다. 사람, 장소, 환대. 이 책의 핵심어를 책 제목으로 뽑았다. 설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의대, 법조계 등 그러한 집단 안에 속한 것과 어떤 점이 다를까? 싶었다. 이런 생각은 김두식의 <불멸의 신성가족>을 읽다가 든 생각이었다. 읽다 연줄에 대한 부분을 읽고 소속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검찰이라는 최고 엘리트 집단 안에 속한다는 느낌?!이랄까. 다른 예로 서울대 안에 속한다는 느낌은 어떨까. 언뜻 엄청난 자부심과 형언할 수 없는 소속감이지 않을까 싶다. 그것 아니라도 엘리트 집단에 소속은 안 되더라도 그 엘리트를 알고 있다는 관계에서조차도 부심을 느낀다. 직접적으로는 아니겠지만 '나 그런 사람이랑 알고 있어'를 간접적으로 표현을 듣고 해본 기억이 있다. 그러한 소속감과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와의 관계적인 부분에서의 소속감이 어떤 점에서 다른지 알고 싶었다. 판검사, 의사, 변호사를 안다는 것과 예수를 안다는 것도 어떨까. 그래서 콘스탄틴 캠벨의 <바울이 본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김현경의 <사람, 장소, 환대>를 읽었다. 캠벨의 책에서 그 힌트를 얻지 못했고, 김현경의 책은 어려워서 내가 다 소화하지 못했다. 단지 한 문단은 인용하였다.
이 책은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소설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 대한 이야기로 포문을 연다. 그림자라는 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필수 요소를 뜻한단다.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말하자면 코가 없는 것과 비슷하다. 코라고 불리는 얼굴 한가운데 돌출된 부분이 없는 사람은 냄새를 맡을 수 있느냐와는 별개로, 신체적으로 불완전하다고 여겨지며,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한 명의 사람으로 자연스럽게 제시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그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 결함이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애쓴다. 또는 결함을 가진 존재로 스스로를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애쓴다. 이러한 비가시화 전략이 성공하는 한에서 그는 성공적으로 사람을 연기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답게 보이고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다. (17)
이런 인간성을 상실한 인간은 어떻게 하는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주어진 장소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20). 이것이 바로 근대적 환상의 핵심이고, 근대는 공간을 압축하고, 거리를 말소하며, 장소를 파괴한다(21).
사람, 인간/ 장소 / 환대
이 책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사람과 인간을 다르게 정의를 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 - 도덕적 공동체 -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즉 사람임은 일종의 자격이며,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 사람과 인간의 다른 점이다. 이 두 단어는 종종 혼용되지만, 그 외연과 내포가 결코 같지 않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지, 사회적 인정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개체가 인간이라면, 그 개체는 우리와의 관계 바깥에서도 인간일 것이다. 즉 우리가 그것을 보기 전에도,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고유한 특성에 의해 이미 인간일 것이다. 반면에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엉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31)
저자는 인간과 사람을 같은 의미로 말하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의 개체를 가진 존재로 이해한다. 그러니깐 개가 있다면 마티즈, 치와와 등 여러 종류의 개가 있지만 이 개체는 개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저자는 이런 뜻에서 인간을 개체로 정의하는 듯 싶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 사람과 인간을 이렇게 구분해서 정의하는 것에 나는 조금 생각해 봐야 겠다. 어디까지나 나는 인간이 사람이 되기 위해선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고 본다. 인간의 공동체 안에서 장소를 가질 수 있는 성원권보다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기에 무조건적인 사람으로서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그렇게 하지 못한 성원권 의식이 나는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겠다.
여튼,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것은 공동체 안에 속해야 한단다. 그것이 성원권이다. 그래서 저자는 논증을 하기 위해 태아, 노예, 군인, 사형수를 말한다. 이 중에 노예를 설명하는 부분을 본다면 가장 이해가 잘 되지 싶다.
노예는 일생 동안 사회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비유하자면 태아의 상태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노예는 태아와 같다"는 투아레그의 격언이 있다. 노예는 한번도 태어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까닭에 죽었을 때도 아무런 의례를 거치지 않고, 다만 "그 장소에서 치워진다." (35)
노예는 고프먼이 분석한 '상호작용 의례' - 그 핵심은 상대방이 살마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 에서 제외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노예는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타인 앞에 현상할 수 없고, 타인은 그의 앞에 현상하지 않는다.
한편, 노예에게 온전한 이름이 없다는 것(그의 이름에는 혈통과 출신지를 죠시하는 부분 - 성 family name-이 없다)은 그가 태생적으로 소외된 존재임을 알린다. 그는 출생에서 기인하는 권리들을 주장할 수 없는데, 그러한 주장을 들어주고 인정해줄 친족 집단이 없기 떄문이다. (36-37)
노예에게는 소유할 수 있는 장소가 없다.
저자는 이후 계속해서 사람, 장소, 환대의 맥락을 세심하게 이어나간다.
... 인도의 불가촉천민에 대한 종교적 규정들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 시기 인도에서 불가촉천민은 심한 차별을 받았는데, 그 차별의 핵심은 그들을 더러운 존재로 규정하고, 공공자원의 이용이나 공공장소의 통행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것이다. ... 마을 광장을 지나갈 수 없었다. 또 공동우물이나 저수지를 사용하지 못했고, 이발소, 호텔, 상점을 이용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예들은 사회적 성원권이 무엇보다 장소에 대한 권리와 관련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데리다가 지적했듯이, 환대는 그 어원 - 주인과 손님을 동시에 의미하는 - 에서부터 장소와의 관계를 함축한다. (67-68)
저자는 환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 혹은 사회 안에 있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행위이다. 자리를 준다/인정한다는 것은 그 잘에 딸린 권리들을 준다/인정한다는 뜻이다. 또는 권리들을 주장할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환대받음에 의해 우리는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권리들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된다.
... 사회가 잠재적인 친교의 공간을 가리킨다고 할 때, 누군가를 환대한다는 것은 그를 이 공간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는 것, 그를 향한 적대를 거두어들이고 그에게 접근을 허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07)
환대에 대한 저자의 논의를 충분히 교회에서 토의해 볼만하다.
나가면서
어려운 부분도 있고 대단히 재미있는 부분도 있다. 상호의례, 명예, 모욕, 근대 등 여러 지점들이 재미있다. 더군다나 한국인이 쓴 글이여서 그런지 몰라도 중간에 체벌(129)에 대한 이야기 같이 한국인들이 이해가 잘 될 법한 말들을 해서 좋았다.
'사람, 장소, 환대'에 대한 저자의 논의는 퍽 흥미롭다. 때론 아니다 싶을 때도 있고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숙고해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 책과 더불어 조슈아 지프의 <환대와 구원>을 같이 보면 좋지 싶다. 기독교 안에서 환대는 어떻게 표현되어졌고, 그것이 구원과 연관이 될까 싶은 책 제목이다.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김현경의 책과 함께 읽어보면 좋은 통찰력이 보이지 않을까 싶다.
혐오, 차별, 폭력이라는 키워드가 계속해서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을 종종 참고해서 볼 것만 같다. 기독교인들도 이 인문학 담론에 조금이라도 발을 담가보는 게 어떤가 싶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하는 다리놓는 설교가 좀더 풍성해 질 것이다.
메모
프롤로그 끝 p. 27 메모
- 서울대와 같은 장소, 엘리트적인 장소의 소속을 기대했는데 오히려 사람됨의 이야기를 한다. 장소는 환대이고 그 환대를 통해 사람으로 인정 받는다. 환대받는 장소가 없다는 것. 그것은 사람이 아닌 물건이다.
패터슨은 노예를 권력이 없고 친족이 없고 명예가 없는 자,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socially dead person이라고 정의한다. "노예는 태아와 같다"는 격언이 노예가 처음부터 사회 바깥에 있었음을, 즉 그의 태생적인 소외를 암시하는 데 비해,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노예가 사회 바깥으로 쫓겨난 자 또는 실종라는 점을 더 강하게 환기시킨다. ... 그래서 비록 물리적인 공간으로서의 사회 안에 들어와 있더라도 노예는 다른 사람들의 눈앞에 동등한 사람으로서 현상하지 않는다. (40)
- 초기 기독교에서 예배 장소의 모습은 이를 뒤집는 것 아닌가?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IVP)에서(물론, 여기에서는 노예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위가 낮은 사람이 높은 곳으로 가 있는다.)
p. 49. 베카리아와 로크, 사형에 대한 의견 정리.
베카리아: 사람은 신성. 하나님과 계약된 존재. 어떤 계약도 그것을 건드릴 수 없다. 그렇기에 사형은 있을 수 없다.
로크: 아니다. 하나님과의 계약을 어긴 존재가 사형수다. 자연법을 어긴 것. 그것은 사람을 박탈할 권리가 우리에게 생긴다.
왜냐하면 사회학은 도덕의 기초에 '사회적인 것'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자연법의 존재에 대한 로크의 가정, 즉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도 서로에게 도덕적인 의무를 진다는 가정은 모든 인간이 창조주에게 복종의 의무를 진다는 가정에 의지하고 있다. 인간들 간의 유대와 상호 의무는 창조주와 개별 인간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학은 근본적으로 무신론적이기에 이 설명을 거꾸로 세운다. 창조주에 대한 관념은 땅에서 인간들이 맺는 유대가 하늘에 투영된 것이다. (51)
- 로크: 하나님→사람, 사회학: <사람과 사람 →신>에 투영됨. (솔직히 종교사학자들이 다 이렇게 말하긴 하는데 글쎄, 저자가 신학도 좀 공부를 해보면 어떨까 싶다. 물론, 나야 종교학보다는 신앙에 투철한 신학을 하는 사람이기에 저자에게는 무쓸모하게 보일 것이다.)
노예제 사회를 살아가는 자유인들이 명예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까닭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들과 노예의 차이가 바로 거기 있기 때문이다. 몰락하고 명예를 잃은 인간은 노예와 비슷해진다. 노예의 굴욕을 날마다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노예와 비슷해지는 것만큼 두려움은 없을 것이다. (62)
- 차별에서 오는 구별. 그것이 계급의 차이.(내가 이런 말을 왜 한 건지 모르겠다;;)
... 인도의 불가촉천민에 대한 종교적 규정들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 시기 인도에서 불가촉천민은 심한 차별을 받았는데, 그 차별의 핵심은 그들을 더러운 존재로 규정하고, 공공자원의 이용이나 공공장소의 통행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것이다. ... 마을 광장을 지나갈 수 없었다. 또 공동우물이나 저수지를 사용하지 못했고, 이발소, 호텔, 상점을 이용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예들은 사회적 성원권이 무엇보다 장소에 대한 권리와 관련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데리다가 지적했듯이, 환대는 그 어원 - 주인과 손님을 동시에 의미하는 - 에서부터 장소와의 관계를 함축한다. (67-68)
- 장소가 사람을 환대하는 곳임을 잘 보여준다. (사람과 장소, 환대가 떨레야 뗄 수 없는 사이임을 보여준다.)
두 경우 모두, 오염을 피하려는 행동은 "소중한 분류 체계와 모순과 혼란을 초래하는 대상 혹은 관념에 대한 거부반응" 이상의 무엇이다. 이 글은 오염의 메타포를 성원권에 대한 부정 또는 위협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할 것을 제안한다. 성원권의 문제는 분류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이며, 인식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학의 문제이다. (74)
-<학교는 시장이 아니다>에서 빗스한 논지 전개. (물론, 마사의 책은 혐오에 대해서 설명하며 교육으로서 해결하려고 하고, 이 책은 사람, 장소, 환대를 통해서 논지를 이어나간다.)
우선 입소의 형식적 절차들 - 사진 찍기, 지문 채취, 번호 부여, 소지품 검사, 옷 벗기, 몸무게 측정, 목욕, 소독, 머리 깎기, 제복의 지급, 규칙의 전달, 위치 배정 0 은 그 자체로서 굴욕과 박탈을 초래한다. 통과의례의 관점에서 보면, 이 절차들은 크게 옷 벗기 - 옷 입기로 구성되는데, 그 중간에는 완전히 벌거벗는 단계가 있으며, 입소자는 그 순간 강열한 박탈감을 경험하게 된다. "입소자가 동질화, 평준화되고 하나의 대상으로 변형되어 시설이라는 기계에 실릴 수 있게" 되는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이다. (118)
- 군대...?!(이 묘사는 교도소를 이야기다.)
반면에, 신분 집단은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보통이다. 신분 집단은 특수한 생활양식, 자기네끼리의 폐쇄적인 교류와 혼맥 형성, 결투를 할 자격과 같은 의례적 특권에 대한 주장 등을 통해 스스로를 사회의 나머지와 구별하고자 한다. 이러한 계층화는 순전히 관습적이다. 하지만 경제력의 안정적인 배분에 의해 이러한 계층화가 굳어지자마자 합법적인 특권으로의 길이 쉽게 열린다. (148)
- 현대의 신분.
p. 157 굴욕에 대하여
- 뭔가 통쾌한 내용들이다.
대통령은 국민을 해고할 수 없지만, 재벌 총수는 마음에 안 드는 직원을 아무 때나 내쫓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직원의 얼굴에 서류철을 던지거나 정강이를 발로 찰 수도 있다(TV 드라마에 그런 장면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163)
- TV 드라마에서 그런 장면에 종종 나온다는 문장은 뺏으면 좋았겠다. 차라리 뉴스나 기사, 시사프로그램, 통계를 가지고 와야 하지 TV에 그런 장면이 심심찮게 나온다는 것과 앞에 서술한 내용이 만연한 것과는 전혀 별개이다. 오히려 이러한 순진한 문장이 글을 신뢰성과 퀄리티를 매우 낮춘다.
뒤르켐의 예견과 달리, 능력주의 사회의 도래는 상속제도의 소멸을 가져오지 않았다. 상속의 방식 혹은 전략을 바꾸어놓았을 뿐이다. 부모들은 재산을 직접 물려주는 대신에, 자녀의 몸에 그것을 투자하고 그 몸을 물려주기로 마음 먹는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상속자이면서 동시에 투자 대상, 즉 재산 자체가 된다. ... 상속이 특정한 시점이 아니라 양육 기간 전체에 걸쳐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족은 만성적인 갈등상태에 놓인다. 부모의 상속 프로젝트에 동의하지만, 물건 취급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아이들, 재산관리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엄마, 가장이면서도 이 프로젝트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느끼는 아빠가 갈등의 세 주역이다. 해마다 늘어만 가는, 학교와 집을 떠나는 청소년의 숫자는 가족의 위기를 알리는 다양한 징후들과 함께, 이 프로젝트가 얼마나 위험하고 성공하기 어려운 것인지 말해준다. (187)
- ㅠㅠ
나는 이러한 간과 또는 무시가 사회와 전쟁을 연속성 속에서 파악하려는 시도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계약론의 전통 속에서 전쟁은 사회의 대립물로 이해된다. 사회는 전쟁을 가장자리로 밀어내고 확보한 우호의 공간이다. 그런데 형벌이 전쟁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면, 형벌이 존재하는 한 사회는 내부에 전쟁에 포함하게 될 것이며, 사실상전쟁의 연속이 될 것이다. 범죄자를 내부의 적으로 간주하는 루소의 언명은 사회를 전쟁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음을 암시하면서 사회계약론의 내적 모순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237)
- 사회가 전쟁이 없는 우호의 공간이라면서 왜 형벌을 전쟁과 같은 선상에서 보는가?(내가 쓴 말인데 어떤 뜻으로 한 말인지 잘 모르겠다...ㅜ)
서구 문화에서 사회관게의 도덕적 기초를 이루는, 사람의 신성함에 대한 관념은 싱어가 생각하는 것만큼 유대-기독교적 교의에 빚지고 있지 않다. 자살에 대한 태도가 그 증거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생명은 신에게 속하므로 개인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를 제외하면, 오늘날 자신이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자살은 절망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고,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서 자신의 존엄과 자유를 주장하는 최후의 수단이라는 시각이 더 일반적이다. (257-258)
- ?(아니, 도대체 이 일반적인 시각이라는게 어디서 통계를 가져온 건가?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를 인용하면 일반적인 시각이요!가 되는 거냐;; 길가는 사람들 붙잡아서 자살이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서 자신의 존엄과 자유를 주장하는 최후의 수단'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묻는다면 아니오 할 사람이 훨씬 많다에 내가 500원 건다. 자살이 죄악이라고 생각 안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에는 동의하겠으나 후자의 이야기는 정말 뻘글이다. 그냥 저자 본인이 이것이 더 맞는 주장이라고 말하는게 옳다.
책 맛보기
이 책의 키워드는 사람, 장소, 그리고 환대이다. 이 세 개념은 맞물려서 서로를 지탱한다.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지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환대는 자리를 주는 행위이다(1-3장). 사람과 장소를 근원적으로 연관된 개념으로 본다는 점에서 이러한 접근은 아렌트와 유사하다. 인권의 종말에 대해 논의하면서 아렌트는 장소의 박탈, 법적 인격의 박탈(그리고 그에 따른 일체의 법적 권리의 상실)을 연결시킨다. 하지만 아렌트의 관심이 주로 정치적, 법적 문제에 맞추어져 있다면, 이 책은 공동체와 주체를 구성하는 상징적이고 의례적인 층위로 시야를 확장한다. 사람은 법적 주체일 뿐 아니라, 일상의 의례를 통해 재생산되는 성스러운 대상이기도 하다.
... 현대 사회는 우리가 잘살건 못살건 배웠건 못 배웠건 모두 사람으로서 평등하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매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접이다. 사람행세를 하고 사람대접을 받는 데 물질적인 조건들은 여전히 중요하게 작용한다. (26-27)
<순수와 위험>에서 더글러스는 더러움을 자리place에 대한 관념과 연결시켰다.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73)
투명인간 취급당하는 노숙자의 뒤에는 걸인과 부랑자에 대한 낙인과 감금과 추방의 긴 역사가 있다. (109)
상호작용 의례를 행하는 것은 상대방의 인격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에서의 그의 성원권을 인정하는 의미가 있다. (116)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짊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131)
아니면 근대화란 신분적인 정체성 외에 다른 정체성을 갖지 못했던 사람들이 그를모두를 감싸고 있는 '사회'의 존재를 깨닫게 되는 과정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사회의 발견'은 근대화의 핵심적인 사건이다.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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