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낀 점
학교는 시장이 아니다! 제목을 넘 좋다. 그래서 나는 저번 설교 제목으로 '교회는 시장이 아니다'라고 정했다. 저자는 서문에 한국에는 희망이 있는 것 같다라는 뉘앙스를 보이는데 글쎄다. 예전 오바마도 한국에서 보이는 공부를 흑인들도 본받아야 한다고 본 거 같은데 이 나라의 사정을 외부인들은 잘 모른다 싶다. 오히려 마사 누스바움이 걱정하는 형태가 이 나라 한국에서 가장 적실하게 등장한다. 저자는 미국의 학교들이 시장의 효율성으로 운영되어 가고 있고 그런 곳에서는 교육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장이 된 학교는 민주주의를 망치는 주범이 된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 마사 누스바움은 비판적 능력과 인문학(저자는 주로 예술과 문학에서 상대방을 공감하는 훈련 또는 놀이로 인문학을 말한다)을 겸비하는 세계시민을 교육하자고 주장한다.
시장화되는 학교
저자는 인도의 학교의 사례를 가져온다. 일단 그 학교는 이렇다.
최고의 경쟁률을 자랑하는 곳은 바로 인도 기술 경영 대학(IIT)으로, 최근 현명히 도입된, 필수 인문학 일반 교육 수업들을 논외로 하면, 오직 기술 교육만이 제공되고 있다. 내가 일하는 대학 소속인 인도 출신의 훌륭한 연구 과학자는(IIT델리에서 교육받았는데) 학생들이 오직 직업 준비 기술이라는 협소한 영역에만 초점을 맞출 뿐, 독립적 연구 기술들을 배울 수 없다는 점에서, ITT에서의 경험 전체를 일종의 '반교육(de-education)'으로 묘사한다. 더욱이 그의 강조에 따르면 이러한 협소성은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다. IIT 입학 자체가 전국적 경쟁을 수반하는 시험으로 결정되는 까닭에, 전국의 타운들에서 치러지는 경쟁에서 승리한 학생들이 선발되게 된다. 이들 중 대부분은 성장기 내내 좋은 직업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교육의 주요 목표라는 생각을 주입받게 된다. 사람은 자신을 적극적이며 사려 깊은 시민이 되도록 하는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은 '그들의 인생길에 단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생각이다. (213)
인도는 저 학교만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대다수 학교가 그렇다. 연말이나 연초쯤 되면 학교 앞에 달린 플랜카드를 보라. 어디어디 대학 합격. 그 플랜카드야말로 학교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우리의 학교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곳이다. 교육이란 문제를 푸는 것이고 좋은 교육자는 문제 더 잘 풀어주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학원이란 학교랑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학교의 정체성이 흔들린다.
마사 누스바움은 대학에서도 이러한 방향이 포착된다고 한다.
한편 경제 성장에 관한 압력은 수많은 유럽의 정치 지도자들로 하여금 대학 교육(교수와 연구) 전체를 성장 중심의 방향으로 재조정하게 하는 한편, 각 학과와 연구자가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질문하게 했다. 예컨대 영국의 경우는 이러하다. 대처 시대 이래, 영국 내 인문학 학과들에는, 자신들의 연구·교육이 어떻게 이윤창출에 기여하는지 표명함으로써 모든 대학 기구의 자금 출처인 정부에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정당화해야 하는 일이 일종의 관습이 되어왔다. 만일 그들이 이를 표명할 수 없다면 정부 지원은 삭감되고, 교직원과 학생 정원 역시 감소될 것이다. (208)
대학 역시도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측량대로 연구비가 지원된다. 가히 경제가 모든 부분은 잡아먹는 하마가 되어가고 있다. 시장적인 측면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이를 우습게 여기는 것 역시도 문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경제) 외에는 다른 척도는 불필요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 문제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을 암에 걸린 것 같다고 말한다(23).
혐오는 왜 일어날까? (p. 65-70 요약)
이 책에서 제일 재미있는 챕터는 3장이었다. 3장은 '시민 교육: 도덕 · 비도덕적 감정'이다. 여기에서 갓난 아기때를 말하면 혐오를 설명하는게 참 흥미로웠다. 일단 먼저 '나르시즘'부터 보자.
어린아이는 자신이 만들지 않았고 통제하지도 않는 어떤 세계에 무방비 상태로 태어난다. 갓난아이의 가장 이른 경험에는, 세계 전체가 자신의 필요에 대한 충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한 (마치 자궁 안에서처럼) 지복 속의 완전성 그리고 욕망된 순간에 욕망되는 것들이 도착하지 않을 때의 (어린아이는 그것이 확실히 자신에게 도착되도록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제 무능력함에 대한 고통스러운 자각 사이의 동요가 있다. 인간은 동물의 왕국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정한 육체적 무능력의 임자인 것이다. 그리고 그 무능력은 굉장히 높은 수준의 세련된 인지 능력과 결합되어 있다(이를테면 오늘날 우리는 일주일 된 어린아이조차 제 엄마의 모유 냄새와 다른 엄마의 모유 냄새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 '내적 투쟁'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면 이러한 기이하고 독특한 이야기에 대한 사색이 필요하다. 즉 능력과 무능력이 기이하게 결합되어 있는 인간이라는 사태에 대한, 무능력·도덕성·유한성에 대해 우리 인간이 맺는 문제적 관계에 대한, 그 어떤 지성적인 존재라도 수용하기 고통스러운 조건들을 초월하고자 하는 우리의 끊임없는 욕망에 대한 사색이 필요하다. (65-66)
갓난아기는 무엇도 해낼 수 있는 힘이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러나 고도의 지성은 가지고 있다. 그러니 얼마나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답답해 할까. 이러한 내적 갈등을 느끼면서 갓난아기는 자란다.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옆에 돌보는 사람이 있다. 돌봐 주는 사람은 당연히 갓난아기에게 주의를 많이 준다. 갓난아기가 하고싶은 대로 가만히 두지 않는다. 그런데 자라면서 자신을 돌봐주는 이 사람이 사실은 전능한 사람도 아니며 오히려 무능력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불안감과 수치심을 느낀다.
어린아이는 타인을 그저 도구로 느낀다. 필요한 것을 주고나 주지 않는 도구일 뿐이다. 이를 통제하기 위해 자기의 부모들을 노예로 만들고 싶어한다. "<에밀>에서 장 자크 루소는, 제 부모를 노예로 만들고 싶어하는 어린아이의 욕망에서 계급 질서를 갖춘 세게의 시작이 발견된다고 말한다."(66)
[물론] 루소는 아이들이 본성상 악마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사실 그는 사랑과 컴패션을 향한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본능을 강조했다). 하지만 루소는, 아이들의 나르시시즘과 지배 성향이 보다 생산적인 방향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그들의 약함과 필요 자체가 윤리적 타락과 잔혹한 행동을 야기할 수 있는 모종의 역학을 이끌어낸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67)
아이는 자신의 무능력함에 수치심을 느낀다. 그 수치심은 다른 감정으로 연결되는데 그것은 바로 배설물에 대한 혐오감이다. 저자는 인간의 혐오가 선천적으로 인간에게 내재되어있기도 하지만 후천적인 배움으로도 가능한 감정이라고 한다. 더 자란 아이가 이제 배변 훈련을 할 때 이러한 감정이 생겨난다. 문제는 이 수치심과 배설물에 대한 혐오감이 연관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실험심리학자들의 결론이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소개한다.
실험심리학자들의 결론은 이러하다. 혐오감과 함께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동물성, 소멸할 운명, 그리하여 중요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을 증거하는 것들(즉 똥, 다른 종류의 육체적 배설물, 시체)을 오염 물질로서 거부하게 된다. 혐오감에 대해 연구하는 실험물리학자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배설물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과정에서 우리는 배설물을 가지고 있는 사태, 우리 자신이 배설물이 되고 마는 (그리하여 동물적이고 죽을 운명의 우리 자신이 되고 마는) 사태로부터 발생되는 불안감을 해결한다. (67-68)
즉 자신의 무능력함을 배설물과 같이 혐오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혐오스러운 것을 피하는 건 유용할 때도 있다. 썩은 우유의 냄새를 피하게 만드는 것인 그 예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 이 혐오감을 다른 무언가에게 씌울 때다. "어느 개인이 제 동물성으로부터 스스로를 완전히 거리 두는 효과적인 방법은, 동물성을 나타내는 특정 성질들(나쁜 냄새, 질척질척함, 끈적끈적함)을 특정 집단의 사람들에게 투사하는 것, 그러한 이들을 오염의 원인 제공자, 불결한 이들로 취급하는 것이다. 즉 그들을 하나의 하위계급으로, 실제로는 불안감을 느끼기 마련인 인간과 동물성이라는 공포스럽고 저주받은 성질 사이의 경계 지대 도는 완충 지대로 만들면서 말이다."(68-69)
이러한 방식으로 혐오가 작동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어느 인종의 색깔이 검정색이기에 그것이 혐오되는 배설물에 덧씌어 버린다. 동양인은 키가 작고 마늘 냄새가 나기에 혐오스러운 것으로 투사하는 것일까? 똥과 시체의 혐오물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같은 장소에 두지 않고 피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흑인과 동양인들 등 혐오감이 투영된 사람들과 신체접촉을 피한 것이다.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은 아마도 이러한 심리적 기제가 작동한 것일까?
이러한 진화심리학적인 설명은 참 재미있다. 실험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해석이 들어간 부분이 많다고 본다. 어린 아이가 완전한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까? 진화심리학의 이러한 설명이 나름의 설득력은 가지는 것은 맞지만 과학적 증거와 같이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같다. 해석이다. 정황에 따른 그럴 듯한 해석이다. 예전에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은 적이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대목은 '왜 어머니는 아들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그렇지 않은데 어머니의 사랑은 제한이 없는 한 몸 같이 사랑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10달동안 한 몸에서 같이 살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이와 어머니는 한 몸이었다. 그것이 자기의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이유라고 했다. 나는 이 대목 역시도 그럴 듯한 해석으로 본다.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관찰과 실험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은 과학적인 방법으로서 알 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기에 나는 기독교적 사유 역시도 무시받지 않을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설명하는 인간의 원죄에 대한 해석은 어떤가? 진화심리학도 정황에 따른 해석이다(물론, 실험은 했다고는 하지만). 기독교적 해석도 역시 그럴득한 설득력을 보지이 않는가!
나가면서
읽는데 참 지루했다. 왜인지 모르게 3장 이후로는 지루해서 진도가 잘 나가질 않았다. 아마도 대한민국의 현실 이야기보단 해외의 이야기를 자주 다뤄서 그런 건줄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의미있는 책이었다. 이 책은 그렇게 어렵지 않으니 한 번쯤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왜 혐오가 남발하고, 학교는 이 모양 이 꼴일까 고민해 본적 있는 분들, 민주주의, 세계 시민 등 이러한 키워드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바라건대 다음 책은 이러한 류의 한국판 책을 읽어보고 싶다. 찾게 된다면 읽고 리뷰하리다!
메모
킨들러는 톰슨이 강조하는 것처럼, 그러한 이상적인 남자가 되고자 함이란 실제로는 통제하지 못하는 세계를 마치 통제하는 것인 양 가장하는 일을 수반한다. 이러한 거짓 가면은 사실상 삶 그 자체에 의해서 나날이 벗겨진다. 그 젊은 '진짜 남자'는 허기·피로·갈망을 그리고 종종 병 또는 공포를 느낄 테니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화에 이끌려 살아가는 그 어떤 사람의 심리에도 수치심은 잠류하기 마련이다. 나는 '진짜 남자'가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내가 나의 환경을, 심지어 내 몸 하나조차 통제하지 못함을 무수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인간의 나약함에 응해 나타나는 보편적 반응이라면, 그 감정은 상호 필요와 상호 의존의 이상과 더불어 성장한 이보다는, 완벽한 통제의 신화와 더불어 성장한 이에게서 훨씬 더 강렬하게 나타날 것이다. 다시 강조하건대 그렇다면 우리는, 아이들이 통제 또는 강함[비허약함]을 열망하지 않는 일이, 평범한 운명의 삶을 초월하는 무엇으로 제 삶의 가능성을 규정하지 않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하게 된다. 또 (아이들이) 여러 다양한 사회적 정황 속에서 어떻게 평범한 인간의 나약함이 생생히 체험되는지를 이해하고 배우는 일이, 어떻게 사회정치 제도의 성격 자체가 그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나약함에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하게 된다. (78-79)
- 웰빙과 같이 '건강이 완전하다'라는 것이 이상이 될 때 반대편에 있는 약자(장애인, 여성)가 배제된다. 그런 것이 안리ㅏ 우리 모두는 '연약해'를 배워야(익혀야) 한다.
이 연구 결과는 킨들런과 톰슨의 임상 관찰 결과와 포개진다. 지배[통제]에 미친 듯 집착하는 젊은 남성은 여성을 조작 대상이 되어야 하는 단순 사물로 생각하게 되었고, 여성을 '사물화'하는 이러한 능력은(이는 오늘날 미디어와 인터넷 문화의 많은 요소들로 말미암아 독려되고 있다) 지배에 대한 그들의 환상은 더욱 키웠다. (85)
- 지배욕구-나르시시즘-유아기의 자기중심적
"아줌마 말씀대로라면, 알코올을 끊지 못하는 모든 사람은 주류 판매점에 가는 사람들이죠. 그러나 그것이 곧 '주류 판매점에 가는 모든 사람은 알코올을 끊지 못한는 사람들이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에요." (130)
- 음... '매일' 주류 판매점에 가는 사람은 알콜을 끊지 못한 사람일 확률이 높긴 하다.
콜리니는 연구의 위엄을 떨어뜨리는 그 어휘들, 그러니까 연구를 일종의 거리 행상으로 묘사하는 그 말들에 대한 아무런 저항의 목소리가 없다는 사실을 우려한다. "아마도 우리의 귀에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 도대체가 학문의 질적 수준이라고 하는 것이 '외부 연구 활용자'의 수나 '효과지표들'을 통해 부분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고 제안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 말이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인문학 분야의 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가장 풍요롭고 가장 다채로운 인간 활동을 기록한 기록물들과의 만남의 성과"라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자신들의 연구는 가치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만일 이러한 저항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영국 내 인문학은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세속화된 버전의, 더욱더 시장 지향적인 '생산품들'을 위한 가정 방문 외판원이 되는 데" 바치게 될 것이다. (211)
- 교회의 현실을 생각해 본다. (우리도 가정 방문 외판원이 된 것이 아닌가?)
시험이 학교 전체의 미래를 결정하는 경우, 시험에 의해 그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는 형태의 학생과 선생 간의 대화는 억압되어야 하는 무엇이 될 공산이 크다. 인도처럼 국가가 시장에서의 보다 높은 점유율을 열망하든, 미국처럼 국가가 고용을 보호하려고 애쓰든, 상상력과 비판적 능력들은 쓸모 하나 없는 장비처럼 보일 것이고, 심지어 그러한 능력에 대해 경멸감을 내비치는 살마들은 점점 더 늘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커리큘럼상의 인문학적 구성요소들은 사라지고 있고 암기식 학습의 교수법이 실권을 행사하고 있다. (217)
- 한국에선 시험에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 상상력과 비판적 능력 또는 인간됨을 배우는 게 시험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
만일 내가 생각하듯 진정한 문명의 충돌이 개인의 영혼 안의 충돌이라면(탐욕 · 나르시시즘이 존경 · 사랑과 대항해 싸우듯) 현대 사회는 폭력과 인간 타락을 이끄는 힘은 살려내는 반면, 평등과 존경의 문화를 이끄는 힘을 살려내지는 못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인문학과 예술의 핵심적 중요성을 주장하지 못한다면, 그것들은 돈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 세계에서 불현듯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인문학과 예술은 단순히 돈 만들기보다 훨씬 더 고귀한 일을 수행할 따름이다. 즉 그것들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세계를, (타인으로부터) 존경과 (깊은) 공감을 받을 만한 자신들만의 생각과 감정을 지닌 채, 타인을 전인적 인격체로 인식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을, 이성적이며 공감에 바탕한 논쟁을 위해 공포와 의심을 극복할 능력이 있는 나라들을 창조한다. (230)
- 어쩌면 교회 역시도 이 논거를 차용할 수 있지 않을까?
경제 성장에의 기여가 아니라 민주적 시민 정신을 갖춘 성숙한 인간의 형성을 목표로 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입장이다. ... 슬그머니 한쪽으로 치워지고 경제 성장 본위의 교육이 고등 교육의 현장을 지배하게 된 (또는 지배하기 시작한) 전 세계적 현실이다. (옮긴이의 글, 235-236)
- 교회도 시장이 아니다.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마사의 말처럼 경제성장) 곳이 아니란 말이다!
보다 다원적이고 보다 상호 존중적이며 보다 보편적 복지가 실현되고 ... 저자는 답변한다. (241)
- 보편적 복지에 대한 이야기는 본문에 있었나?
책 맛보기
국가 이익에 목마른 상태로 부주의하게도 국가들과 그 교육 시스템들은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 있게 하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내팽개치고 있다. 만일 이러한 추세가 지속된다면, 전 세계 국가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전통을 비판할 수 있으며, 타인의 고통과 성취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는 온전한 시민이 아니라, 곧 유용한 기계일 뿐인 세대를 생산하고 말 것이다. 세계의 민주주의 체제들의 미래는 오늘날 극도의 위기에 빠져 있는 것이다. (24)
민주주의란 존경과 관심을 기초로 세워지는 것이며, 존경과 관심은 다른 사람들을 단순히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인격체로서 인식할 줄 아는 능력에 기초해서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29)
번영하는 경제 역시 시민 정신에 요청되는 동일한 기술을 필요로 하며, 내가 '이익[이윤]을 위한 교육' 또는 (보다 포괄적 의미로 말해본다면) '경제 성장을 위한 교육'이라 부르게 될 교육의 주창자들은, 그들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사실상] '빈곤한 개념'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민주 제도의 안정성과 관련된 주장에 종속되고 그것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튼튼한 경제란 인간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는 민주적이지 않은, 경제 번영국에서 살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35-36)
학교는 성장하는 정신과 가슴의 주인인 아이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나르시시즘을 극복하고, 타인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키는 일들 중 많은 부분은 가정이 담당해야 한다. 또한 또래 집단 내 고나계 역시 강력한 역할을 수행한다. ... 학교는 또래 문화 또한 만들어낸다. 자체의 커리큘럼과 페다고지를 통해 학교가 제공하는 것은 자라나는 아이의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86)
논리가 관심의 중심이 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쉽게 발언자의 명성이나 문화적 신망에 휘둘리거나 동료 문화가 그것을 추종하는 현실에 휘둘린다. (96)
그러나 강한 책임감을 갖춘 시민 정신에는 이보다 더 많은 것이 요청된다. 즉 역사적 증거에 대한 평가 능력이, 경제적 원리에 대한 비판적 사유 능력이, 이 원리의 비판적 활용 능력이, 사회 정의론에 대한 평가 능력이, 외국어 활용 능력이, 세계 주요 종교들의 문제에 대한 이해 능력이. (156)
시민들은 사실적 지식과 논리적 지식, 이 둘만으로는 자신을 주위의 복잡한 세계에 연결시킬 수 없다. 이 두 가지에 밀접히 연관된 것으로서 시민들에게 요청되는 세 번째 능력은 바로 서사적 상상력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이 다른 이의 입장에 있다면 사태가 어떠할지 생각할 줄 아는 능력, 그 사람의 이야기를 지적으로 읽을 수 있는 능력, 그러한 위치에 처한 이라면 가질지 모르는 감정·소망·욕구를 이해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공감 능력의 함양은, 서구와 비서구 국가 모두에서 민주주의 교육애 관한 현대 사상의 핵심 부분이 되어왔다.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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