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낀 점
중고등부 사역이 결정되면서 이 책을 샀다. 당시에 학교에 대해서 알고 싶었고 학교폭력에 대해서 만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애들이랑 몇 달 간 이야기하고 지내면서 학교폭력은 그다지 만연한 것 같지는 않았다. 적어서 내가 사역하고 있는 아이들은 말이다. 아마 이런 문제는 지역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학교폭력에 대해서 나에게 많은 부분을 가르쳐 주었다.
학교폭력? 그건, 쎈척이다.
학교폭력에서 선생님에게까지 폭력을 저지르는 아이들이 있다. 예전 중학생 때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대구의 어떤 학생이 선생님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자신의 대안학교에 오게 되었다는 설교를 들었다. 그런데 같은 교회를 다니는 형이 자신의 학교에서 선생님을 때리고 전학간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 그 사람이 같은 사람일 확률이 조금 있지 않을까 싶다. 여튼, 처음에 선생님께 폭력을 휘두르는 아이들을 처음에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아니면, 괴장히 기본적인 예의가 없거나 그런 아이가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전해준다. 한 번 보자.
"뭘 누구에게 자신의 힘을 보여 주는 거죠. 음······ 이를테면 이런 거죠. '나는 선생님도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너네는 내 말 잘 들어' 또는 '부럽지? 너네가 못 하는 거 내가 다 해 줄게. 난 영웅이니까' 이런 심리가 센 척하는 아이들의 내면에 공통적으로 자리하고 있어요. 관객이 없다면 굳이 힘들여 가며 센 척할 필요가 없는 거죠. 아이들이 선생님을 놀리는 건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에요. 센 척하기 위한 수단인 거죠. 교사와 아이들 사이의 힘겨루기는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에요. 교사나 아이들이나 그 힘겨루기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거예요. 교사는 더 고압적인 자세로 나가기 십상이고 아이들은 그에 질세라 센 척하며 막 나가기 일쑤죠. 저도 그랬고 어쩌면 많은 교사들이 그래 왔거나 그러고 있을 거예요. 교사와 아이들 사이의 힘겨루기는 상호작용하면서 점점 과격해지는데 그런 아이들의 심리가 어떨 거라고 생각하세요?" (142-143)
학실히 주변의 시선이 중요한 것 같다. 작년 나는 고등학교 매점에서 알바를 했다. 매점 주인 아주머니와 어느 학생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 발단은 학생이 매점 물건을 종종 훔쳐 갔다. 그래서 CCTV로 증거를 잡았고 매점 아주머니는 아이를 불러서 차근이 이야기를 하며 일을 크게 만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뒤 학생의 태도가 문제였다. 아무런 죄송하다는 태도도 없고 오히려 당당하게 어떤 아이를 괴롭히며 매점을 들락날락 했다. 그 모습에 화가 많이 난 아주머니는 결국 굉장히 버릇 없는 아이의 태도에 열 받아 버려서 큰 소리로 싸우기 시작했다. 매점에 훔친 아이와 그 친구만 있을 때 일방적으로 훔친 아이는 당황하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매점 아주머니의 소리가 격해지면서 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니 밖에 있던 사람들이 조금 몰려서 그 장면을 보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문제는 여기서 더 커진 것 같다. 그 시선을 받은 아이는 갑자기 욕을 하며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그 시선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자기도 모르는 방어본능이 일어난 것 같다. 그래서 아주머니에게 달려드는 제스쳐를 취했고 나는 막았다. 그리고 뒤에 시선들을 보내고 결국 아이도 보내서 대충 일단락을 시키긴 했었다.
특히나 중고등학생 때는 남의 시선에 눈치를 많이 보는 때이다. 나도 그랬다. 우리 중고등부 학생들도 그렇다. 청소년때는 예민해서 그런건가 싶기도 하다. 물론, 모든 선생에게 보여지는 폭력이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젊은 수학선생님께서 오셨는데 그분에게 우린 조금 신경질적으로 대했다. 수학시간에. 물론, 폭력적인 이유는 아니었고 말투나 이런 것들이 짜증나게 해서? 어쩌면 위에서 말한 기싸움이었던 거 같기도 하다. 그 교사에 대한 인식이 반 아이들에게 만만하게 형성되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런 교실의 시선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방법은 내러티브다!
내러티브는 신학공부할 때 배운다. 이때 내러티브는 내 용어로 바꾸자면 누구도 의문을 가지지 않는 팽배한 분위기로 나느 말한다. 어떻게 보면 세계관이라고 볼 수 있고 믿음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사회 전체로 본다면 우리 사회가 의문을 가지지 않고 믿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팽배한 분위기가 무엇인지 살펴본다. 그것이 과학지상주의일 수도(과학이 진리다. 그러니 모든 과학적 결과만이 믿을 만한 것이다. 예를 들어 '그거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는 말이면 우리는 다 받아드린다) , 시장주의일 수도(모든 것을 시장화시킨다. 수량화, 줄세우기, 소비자가 왕이라는 생각. 모든 직종이 서비스업이 되는 그런 실정이랄까. 그것이 아니어야 하는 영역에서 그런 시장중심적인 사고 방식. 예로 교회, 학교, 병원들이 그렇다. 물론, 시장적인 측면을 잘 사용하면 되지만 시장적인 측면이 주인이 될 때 문제는 발생한다.) 등등 그러한 것들이 있다. 이것은 사회전체로 본 것이고 여기에서 저항적 내러티브를 제공하는 것이 성경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브루그만이 이야기한 것이고 하우어워스도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이런 내러티브가 생각났다. 실제로 이 책은 <변절자>, <잃어버린 이야기를 찾아서>, <프레임 쉬프트>는 거기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 책의 <변절자>편은 특히나 거기에 대한 단초를 제공해 준다. <변절자>의 주인공인 현석 선생님은 일반 학교에서 아이들과 허물없는 관계를 지닌 분이셨다. 보기 드문 선생님이셨다. 그의 교육관은 이랬다.
현석은 교사들 눈 밖에 난 드센 학생들에 대해 특별히 애정을 쏟았다. 현석이 보기에 그 아이들은 경쟁에서 밀려난 약자이며, 두발이니 복장이니 해 가며 순종적인 아이들을 길러 내기 위한 학교 규칙에 저항하는 자유인들이었다. 학교는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들을 좋아하지만 현석은 이렇게 부당한 제도에 반항하는 아이들에게 더 마음이 갔다. 그 아이들을 감싸 주고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이 교사로서의 임무라 여겼다. (74)
현석은 아이들에게 열심이었다. 수업을 준비하느라 밤을 새운 적도 많았고, 아이들과의 상담이나 학급 단합대회 때문에 늦게까지 학교에 남는 것을 기꺼워했다. 가출한 학생을 찾는다고 수업이 없을 때마다 동네를 돌아다녔고, 가출 학생을 잘 안다는 동네 백수 청년에게 술을 사 주며 정보를 캐기도 했다. (74-75)
이런 교육관을 가진 분이 학교를 옮기면서 문제가 시작된다. 그가 옮긴 학교는 공단지역 학교였다. 그 지역은 힘든 곳이었다. 왠만한 비리는 그냥 넘어가는 분위기, 텃세가 심한 곳이다. 더구나 "부모들은 가난에 지쳐 자식에게 화풀이를 하거나 아이를 버리고 도망가기도 했다. 아이들은 학교에 와서 경쟁하듯이 욕을 하며 교사에게 반항했고, 물건을 훔치고 본드를 불었다."(77) 이런 곳이었다. 현석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현석은 더 이상 아이들의 삶 속으로 파고들 수가 없었다. 이해도 되지 않았고, 아이들 역시 받아주지 않았다. '진짜 좋은 선생님'으로 인정받았던 현석은 자신의 진심이 교실 바닥에서 쓰레기가 되어 뒹구는 것을 경험했다. 착한 노력은 배신당했고, 아이들은 끊임없이 사고를 쳤다. 매일이 실패의 연속이었다. 자신감과 함께 여유가 사라졌고 현석은 스스로를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자신이 그동안 무시했던 엄격한 선배 교사들의 방법을 훔쳐보았고, 현석에게 거짓말을 늘어놓던 아이가 학생부에 불려 와서는 순한 양이 되어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며 분노와 함께 부끄러움을 느꼈다. 현석은 변화고 있었지만 아직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는 못했다. 그것은 현석의 오래된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3년이 지나갔다. (77-78)
현석은 흔들린다. 사람이 진심으로 대하면 상대도 진심으로 대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고 그 신념으로 교사를 해왔고 보람도 느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공단지역 학교에서 완전히 깨진 것이다. 믿음은 저버렸고, 신념은 무참히 짓밟혔다. 길수라는 아이를 만나면서 교사 현석은 더 철저하게 깨어지고 만다. 길수와 현석의 지위경쟁의 시작이 시작되었다.
지위경쟁
길수라는 아이는 선생들에게 실없는 말을 해가며 교실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아이다. 실없는 소리는 교사가 만만한 사람인지 무서운 사람인지 구별하려는 속셈인 것 같다. 자신의 말을 받아주면 만만한 교사로 지위경쟁 게임이 시작된다. 현석은 아까 전에 말했듯이 학생들과 허물없이 지내려는 교사였다. 그러니 길수같은 실없는 말을 하더라도 받아준다. 그런 가운데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
현석은 자신을 좀 희생하더라도 좋은 교사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결심하고 굳이 길술르 깨우기로 한다.
"길수야, 일어나."
미동이 없다.
"길수, 일어나라니까! 얘들아, 쟤 좀 깨워 봐라."
애들은 쭈뼛거리며 길수를 건드려 본다.
"아이 씨X, 뭐야!"
길수는 주변 아이들에게 무섭게 욕을 한다. 현석은 갑자기 욕을 내밷는 길수가 당황스럽고 화가 났지만, 일단 깨우기로 결심한 이상 상황을 이어가야 한다.
"길수야, 수업 시간이야. 일어나야지?"
현석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말을 건넨다. 부드럽고, 재치 있게 그 아이를 다뤄 보기로 한다.
"아, 씨X, X나 짜증 나. 왜 깨우고 지X이야."
이건 도가 지나치다.
"뭐? 너 지금 뭐라 그랬어?"
"선생님한테 한 거 아닌데요?"
길수는 현석을 똑바로 쳐다보며 인상을 잔뜩 쓴다. 이건 도발이다. 교실은 고요해졌다. 두 명의 배우가 대결을 펼치는 연극이 시작됐고 다른 관객들은 숨죽이며 이 연극의 결말을 지켜보고 있다. (87)
지위경쟁 게임은 더더욱 악화되어 갔다.
길수의 도발은 다음 시간에도 게속되었다. ...
...
우려했던 대로 길수의 고의적 수업 방해는 계속되었다. 여러 번의 상담이 이어졌지만 길수가 교무실로 내려오라는 지시를 완강히 거부하면 도무지 방법이 없어 현석은 점차 상담을 포기하게 되었다. 게다가 영혁이라는 아이도 길수의 놀이에 합세했다. ...
그런 상황이 한 달 정도 반복되자, 길수와 영혁은 이제 대놓고 현석을 무시했다. 앞에 선생님이 있건 말건 소리를 크게 지르며 마음대로 교실을 활보했다. 앉으라는 소리에 인상을 찡그리며 욕설을 뱉기도 했다. 현석과 두 아이와의 전쟁은 그날도 계속되고 있었다.
"앉아."
"왜요?"
"앉아."
"아, 왜요오?"
유들거리는 길수의 말에 아이들이 웃기 시작한다.
"아, 왜요래. 존X 웃겨."
영혁이 맞장구를 치자 아이들은 이제 마음 놓고 웃고 떠든다. 교실은 통제불능이다. 현석은 엉망인 교실 한가운데서 모든 아이들이 자기를 비웃고 있는 듯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이미 그냥 넘어갈 상황이 아니다.
"앉으라고, 이 새끼야!"
"왜 욕해요?"
쿠당탕!
참다못한 현석이 교탁 옆에 있던 의지를 집어 던졌다. 교실 바닥에 부딪힌 의자 한쪽 다리가 뒤틀리며 튕겨 나가 벽에 부딪혔다. 순간저긍로 벌어진 일에 아이들은 그때서야 겁을 먹고 조용해진다. 현석은 아직 분노가 가시지 않은 채 잡아먹을 듯이 길수를 노려본다. (89-94)
더 열받았던 것은 무서운 선생들에겐 개기고, 만만한 선생들에겐 대놓고 선생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동료교사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러더니 동료교사는 지위경쟁에서 학생들에게 진 것이라 말한다. 동료교사의 말이다.
"샘, 그거 애들하고 지위경쟁에서 선생님이 진 거네."
"예? 지위경쟁······이요?"
"응, 사회 어디서나 나타나는 현상인데, 사람이 처음 만나면 내가 저 사람보다 위인지 아래인지를 정한다는 거야, 자기도 모르게. 예를 들어 친구들 사이에도 보면 어디서 볼까, 뭐 먹을까 이런 걸 결정하는 분위기를 리드하는 친구가 있잖아? 그럼 그 친구들 사이에선 이미 지위 경쟁이 끝난 거야. 누가 위인지 아래인지가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는 거지. 근데 다들 아래로 생각했던 애가 어느 날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면서 막 자기 생각대로 하자면서 분위기를 리드하려고 해. 그럼 지위경쟁이 벌어지는 거지. 직장에서 사장하고 말단 직원 같으면 지위가 달라도 너무 다르니까 그런 경우엔 경쟁이라고 할 만한 게 없어. 그냥 저절로 고개 숙이는 거지." (95)
이 이야기를 듣고 난 뒤 현석은 변하기 시작한다.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싸움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눈을 부라리며 학교를 누비고 다녔다. 학생들의 복장이나 태도가 안 좋거나, 말투나 눈빛에서 자신을 조금이라도 깔보는 듯한 느낌이 들면 현석은 바로 불러 세워 지적했고, 지시에 불응한 아이에게는 고함을 지르고 으르렁대며 물어뜯을 듯 위협했다. 아이들은 판이하게 달라진 현석의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하며 겁을 먹기 시작했다."(97)
결국 일이 터졌다. 어느 날처럼 길수는 계속 수업방해를 했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현석은 길수의 뺨을 후려쳤다. 결국 현석이 보여 준 폭력의 권위에 아이들은 굴복한다. 길수 역시도 맞고나니 대놓고 반항하지 않는다. 현석은 이 폭력으로 인해 승리를 얻은 듯했다. 그러나 그 게임의 승자는 없었다. 현석은 날로 지쳐만 가고 있었고, "기가 센 아이들을 누르기 위해 거친 말투와 행동을 쓰기 시작했고, 폭력적인 아이들의 문화를 닮아갔다. 아이들에게 '좋은 교사'라는 말을 듣는 것이 자랑이런 현석은 계속된 실패 속에서 드디어 완전히 방향을 잃어버렸다. 현석은 이제 더 이상 좋은 교사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폭력적인 교사로 계속 살 수도 없었다."(108)
이야기
그러던 차에 현석은 이 선생이라는 사람이 주축이 된 평화교육이란 곳에 가게 된다. 학교폭력 예방 모임이었다. 그곳에서 현석은 자신의 뼈아픈 이야기를 털어놓고 이 선생과 허물없이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요즘말로는 현석은 이 선생에게 팩폭을 당한다. 그러면서 이 선생인 이렇게 이야기한다. 바로 여기에 내러티브의 단초가 있다.
"현석 샘, 이 모든 게 하나의 이야기라면 어떨까요? 짧은 소설 말이에요. 현석 샘이 교직 사회에 서서히 젖어 든느 자신이 불안해서 굳이 힘든 지역으로 옮겨가고, 고립되고, 아이들한테 거부당하고, 결국 센 척하는 아이의 희생양이 되어 나락으로 떨어지는 한편의 비극말이죠. 이 이야기의 결말은 어떨까요?"
"네? 그게 뜬금없이 무슨······."
현석은 흔들리면서도, 어렴풋이 이 선생의 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저는 학급이 하나의 이야기를 가진다고 봐요. 하나의 학교도 하나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구요. 사실 한 사람의 인생도 긴 이야기로 볼 수 있잖아요. 아이들은 늘 자신들의 결말이 실패일 거라 생각해요. '샘, 우리 반 개판이에요. 우리 반은 안 돼요.' 애들은 낄낄거리면서 자신들이 실패할 거라 주문을 외워요. 아마 현석 샘 학교 아이들은 더하겠죠. 하지만 비슷해요. 저는 교사가 아이들의 이야기를 바꿔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폭력과 실패로 가득한 이야기가 아니라, 평화로운, 적어도 평화를 위해 우리가 이만큼 노력했어, 라는 이야기로요. 그러자면 교사는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이 있어야 해요."
...
"어차피 우린 안 될 거라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단단한 것 같아도 사실 빈틈이 많아요. 교사가 그 빈틈을 평화의 이야기로 채워 넣어 아이들의 삶을 흔들어 주는 겁니다. 학급 평화를 위한 목표를 세우고 규칙을 만들고, 아이들 사이의 관계를 관찰하고 분석해서 교사의 뜻에 함께할 수 있는 그룹을 찾구요. 처음에는 학급을, 그리고 학년을, 가능하다면 학교를 바꿔 보는 거예요. 그러자면 현석 샘과 함께할 수 있는 동료 교사도 찾아야겠죠." (113-114)
내러티브를 바꾸는 것. 바로 성경의 이야기가 그랬고 우리는 그 다리를 잇는 설교자들이다. 학급이라는 인정욕구와 폭력, 상실이 가득하고 사랑을 잃어버린 교실에서 그 이야기를 바꿔야 된다. 소망. 무엇을 바라보고 꿈꾸게 하는가. 예언자들의 상상력이 바로 이러한 맥락이다. 지금 세상은 누군가가 꿈꿨던 세상이고 기독교는 하나님의 꿈을 말하고 보이는 집단이다. 기독교의 이야기가 바로 세상의 변화시킨다. 그것은 공적영역에서도 만날 것이다.
아무튼, 평소 내러티브를 생각하고 있다가 이 책에서도 그 이야기를 하니깐 참 반가웠다. 학교폭력에 대해서 집중하지만 어쩌면 사회 안의 폭력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 책이 된다. 그 이야기가 <잃어버린 이야기를 찾아서> 조금 나온다("서연은 그런 근수 역시 우리 사회의 잔인한 폭력 구조에 놓여 악을 습득한 희생자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32).
이야기에 대한 단초를 놓고 그 다음 이야기가 <잃어버린 이야기를 찾아서>라니. 구성이 참 알맞다. 그리고 그 뒤에 챕터는 <프레임 쉬프트>이다. 참 구성을 잘 했다고 본다.
나가면서
여섯 교사가 학교폭력을 겪으면서 쓴 수필과 같은 책이다. 성공사례만 엮은 줄 알았는데 첫 <다섯 개의 시선>부터 폭력에 대해서 마무리 되지 않은 일을 보여주어 조금은 당황했다. 생각해보니깐 참 좋은 엮음이었다. 나는 하나의 드라마를 기대한 것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교사를 통하여 매듭짓고 해결되는 그런 기승전결이 있는 드라마 말이다. 이 책은 그런 드라마가 아니다. 학교폭력에 대한 현실을 그려준다. 그리고 그 학교폭력이 무엇인지 드러내주며 어떻게 해야하는지 방법을 탐구하는 교사들의 몸부림이 담겨 있다. 그래서 참 좋았다. 수고하시는 선생님들께 참 감사드린다!
책 맛보기
그렇지만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는 단죄하고 처벌만 내렸을 뿐, 폭력으로 일그러진 우리의 삶까지 어루만지지는 못했다. 나는 명지, 유미가 겪고 있는 오해의 진실이 드러나고, 그것을 통해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학폭위가 열리는 자리는 심판대였을 뿐이지 교육이 이루어지는 자리는 아니었다. (67)
"맞아요. 그런 공감이 있었으니 진실 규명에 다가설 수 있던 것 아니겠어요? 마찬가지로 유미, 명지, 은비에게도 공통된 진실이 있었을 것예요. 그런데 자기 입장에 유리하게,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 믿게 된 거죠. 자기 상처만 아파하다 보니 다른 사람의 아픔은 느끼지 못했던 거예요."
...
"이 선생님 말처럼 자기 고통에서 벗어나 상대의 아픔을 볼 수 있는 용기를 가졌을 때, 갈등과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그 고통의 감옥을 깨지 않는 한 진실은 아무도 모른 채 묻히겠죠." (69)
어른들이 보기에 그런 무의미하고 폭력적이고 하찮은 행동이 아이들 세계에서는 타인의 인정을 얻어 내는 코드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죠. (111)
"... 말을 해서 받게 될 상처보다는 말을 안 해서 유령이나 괴물 취급받는 쪽을 선택한 건데, 그 심정이 오죽했겠어?" (279)
"말을 하는 목적은 생각이나 마음을 주고받는 건데, 요즘 학생들은 재미있으라고 말하고, 세게 보이려고 말하고, 상대를 괴롭히기 위해 말하는 놈들이 대부분이야." (282)
"그렇지. 송충이는 솔잎만 먹도록 한 데에는 우리 같은 사람들도 한몫 거든 셈이니 부끄러워 해야지. 교육은 희망을 노래하는 거라고 신영복 선생이 말씀하셨는데 교육이 계급을 재생산하는 통로가 되어도 그걸 막아 내지 못했고 나 또한 거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292)
그 노랫말처럼 모든 아이들에게 반드시 권리, 평화, 화목, 우정을 가르쳐야지 다짐하면서 김 선생은 두 주목을 불끈 쥐었다. (294-295)
'상우-'강과 악'으로 세상을 보던 아이에서 '선과 악'으로 세상을 보는 아이로.'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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