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낀 점
이 책은 청어람아카데미의 책모임에서 책읽기 목록에 있었다. 그때 처음 이 책을 봤다. 책 제목이 참 인상깊었다.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이라니. 요한계시록에서 어린양의 행진을 설교할 때 이 책의 제목을 사용해 볼까? 약간 새는 말이지만 책 제목에서 설교 제목으로 쓸 만한 것들을 많이 본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 <예수, 고통의 중심에 서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 -> <아픔이 길이 되기까지>, <학교는 시장이 아니다> -> <교회는 시장이 아니다> 등등이 있다. 아픔이 길이 되기까지는 아직 설교 제목으로 써본 적은 없는데 언젠가 한 번 저 제목을 주제로 본문을 만나는 날이 있을 것 같다.
강상중은 누구인가?
저자는 엄청난 스펙을 소유한 사람이다. 일단 재일 한국인 2세로 태어났는데 여느 재일 한국인처럼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해선 가네시로 카즈키의 책 <GO>에서 처음으로 그런 정체성의 혼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책의 주인공은 순신이었지 싶다. 가네시로 카즈키의 책에선 순신이란 캐릭터가 주인공으로든 영향력있는 조연이든 자주 등장한다. 저자 자신이 재일한국인이었기에 그런 정체성에 큰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유튜브에서 영화 요약한 걸종종 보는데 영화 <박치기>도 그런 내용이었다. https://popupcinema.kr/post/4ym4SlRIx
재일한국인이여서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사람이 된다. 그래서 김기춘은 이런 사람들을 고문해서 빨갱이로 만들어 자신들의 정권유지에 힘을 썼다. 영화 <자백>을 보라. 지금까지 몸과 정신이 망가진 재일한국인을 보고 있노라면 치가 떨리고 그런 인간이 박근혜 정권때 실세로 등장했을 때 얼마나 끔찍했을까. 이들은 왜 재일한국인들을 희생양 삼았을까? 그건 뒤탈이 없기 때문이다. 누가 그들을 신경쓰나.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닐 수 있는데. 마치 유영철이 아무도 찾지 않는 여성들을 범행대상으로 삼은 것과 비슷한 것이다.
저자 역시도 그런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는데 1972년 한국을 방문한 이후로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했단다. "나는 해방되었다"고 외칠 만큼 기분이 좋았나 보다. 그래서 그는 일본이름을 버리고 한국 이름인 "강상중"을 본명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는 재일 한국인이여서 사회 진출이 어려워 대학원에서 유예기간을 갖는 중에 은사의 권고로 독일 유학을 떠났다. 독일 대학에서 베버와 푸코, 사이드를 파고들며 정치학과 정치사상사를 전공했다. 그뒤 놀라운 건 재일 한국인 최초로 도쿄대학 정교수가 되었다. 일본 최고의 대한인 동경대에서 재일 한국인이 정교수가 되다니! 이후 일본의 근대화 과정과 전후 일본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으로 일본 사회에서 비판적 지식인으로 자리 매김을 한다. 여기까지 책 저자 소개란에 쓰인 내용을 옮긴 것이다.
악은 자유가 있는 곳에?
저자는 가와사키시 중학교 1학년 남학생 살해사건을 이야기한다. 이런 잔혹한 범죄에 사람들은 그를 귀축(사람이 기르는 가축, 그러니깐 인간이 아니라 짐승)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를 사형을 시켜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데 저자는 "그가 '인간'이 아니라면, 그가 '인간'으로서 재판을 받는 것은 모순이라고밖에 할 수 없"(21)다고 한다. 그렇다. 개나 짐승들은 재판을 받지 않고 그냥 도축을 시키면 된다. 사람을 죽인 짐승은 재판받지 않는다. 그가 인간이 아니라면 재판없이 그냥 죽이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그가 우리는 인간이라는 것을 은연 중 인정하는 것인가?
이렇게 잔혹한 범죄자를 짐승으로 보는 '귀축론'에 반대하는 입장으로는 '자유의지론'이 있다. "'소년은 이미 성인과 동등한 수준의 책임 능력을 지녔으므로 이런 끔찍한 일을 자기의지로 저지른 것이고, 따라서 이 중대한 죄는 스스로 갚아야 한다'라는 사고방식"(21)이다. 그러니깐,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고, 그래서 악행을 저지른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악은 인간의 자유가 있는 곳에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다음 이론으로는 '환경론'이 있다. 그가 이렇게 되기까지의 환경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범죄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같아서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이런 잔혹한 범죄를 통해 사람들은 악을 증오한다. 이 감정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인간적으로'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음을"(22-23) 말해준다. 범죄가 무의식적으로 사회적 연대감을 불러일으키지만 동시에 범죄는 우리 가운데 있는 악과 나아가 그 악을 바라보는 방식을 비춰내는 거울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너무나 잔혹한 범죄이면서 이상한 범죄들도 있다. 동기를 알 수 없는 범죄를 본다면 "인간이 자유로운 한 우리 안에 악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고려"(31)해 보아야 한다. 저자는 어쩌면 인간은 알 수 없는 존재이기에 인간의 존엄이 있는 것은 아닌가 묻는다. 선과 악의 명확한 경계가 우습듯이 "그런 경계선을 뚧고 삐죽이 튀어나오는듯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악은 더 이상 그런 '상식'으로는 헤쳐 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던가?"(32)라 묻는다.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한다는 것에서 인간은 이런 거다 명확히 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선도 악도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와 같은 일들을 겪으면 우리는 혼란함에 빠진다. 나 역시 인간은 정말 알 수 없는 존재라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그리고 저자의 이 말 역시도 동의한다.
그렇다면 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그 사람이 인간성, 즉 인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가 드러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32)
인간이란 무엇인가? 심리철학 책을 다룰 때 핵심 주제이지만 이 주제를 악과 관련하여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에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저자는 인간을 수수께끼라고 그래서 인간의 존엄이 있다고 생각한다.
텅 빔, 공허함을 메우고,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저자는 인간 안에 악의 뿌리가 있다고 말한다. '샤덴프로이데'라는 말을 하는데 이 말은 '타인의 불행은 꿀맛'이라는 의미다. 말로 표현하면 '꼴좋다!'이다. "나를 괴롭히던 놈들이 궁지에 몰렸을 때, 지겹도록 잘난 척하던 인간이 몰락했을 때, 나를 매정하게 차버린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불쌍하게 차였을 때, 혹은 반대로 자신을 버리고 부잣집에 시집간 여자가 남편의 사업 실패로 한 푼도 없는 신세가 되었을 때 등등. '꼴좋다!'는 마음속 쾌재가 지상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들려오"는(35) 듯하다고 말한다. 이 기저가 바로 악의 뿌리가 우리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살인을 위한 살인, 즉 이해할 수 없는 악은 자신의 존재 그 자체가 공허하고 불안한 상태에서 나오는 것은 아닌가 묻는다(32). 너무나 불안하기에 견디기 어렵고, 너무나 공허하기에 메워줄 무언가가 바로 악이라는 것이다. 악이 불아늘 잡아주며 공허를 채워준단다.
나카무라 후미노리의 소설 <악의의 수기>는 '사람은 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가'를 주제로 쓴 책이다. 남자 주인공은 허무함 끝에 자신의 친구를 죽인다. 살인은 한 후 자신의 허무함이 사라졌다는 고백을 한다. 또, 고베 연속아동살상사건의 범인 '소년 A' 역시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나고야대학의 여학생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정체성 자체가 손에 잡히지 않는 듯한, 텅 빈 감촉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39) 특히 여학생은 살인을 저지른 이후에 "드디어 해냈다"고 트위터에 글을 썼다. 마치, <악의의 수기> 주인공처럼 말이다. 성취감을 느끼지만 한순간 매워졌던 공허는 다시 더 공허해진다. 이 공허함은 또 다시 살인이 아니고서는 채우기 어려워진다.
저자는 계속해서 이 공허함에 대해서 강조한다. 나치의 학살도, IS같은 근본주의도 옳고 그른 것이 소멸한 즉, 차이가 소멸한(나의 표현이다) 세상에서 보람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니 이 허무함을 메울 근본주의같은 것들이 끌리는 것이다. 그들은 믿을 수 있는 무언가를 주고, 실감, 보람, 기댈만한 것들을 제공한다. 의미를 제공해 준다.
악이란 이렇게 선악의 기준이 모호해진 '무엇이든 괜찮은' 세상을 가장 좋아합니다. 악은 공허한 존재에 슬쩍 숨어 들어가 그 몸을 빼앗아버립니다. 또 개개인이 가진 신체성, 살아 있다는 실감을 앗아갑니다. 이런 허무함이 번져가는 가운데 세상을 부숴버리고 싶다거나 남에게 상처를 주고 싶다는 파괴 행동이 자라나는 것이지요. (54)
저자는 계속해서 분석을 하는데 하나 참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부분이 있다. 우리는 법이던가 도덕을 어길 때 마음 속에 생기는 불편함이 있다. 하지만 이 불편함이 마음에 텅 빈 사람에게 어떻게 느껴질까? 살아있다는 것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더 큰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서 법과 도덕, 그리고 해서는 안 될 짓을 한다. 그럴 때 더욱 자신이 살아있는 것 같고 공허함이 메워지는 것 같으니깐. 저자는 이를 "사회의 규칙을 어기면 보통 죄악감이나 죄책감이 들겠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그 규칙을 어기고 싶었으며 그랬을 때 오는 쾌감이나 성취감을 원했을 것입니다"(42) 라고 한다.
악의 시대를 건너는 힘은?
저자는 4장에 사랑을 말한다. 과연 그 사랑은 무엇일까?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말한다.
단 한 명의 소녀조차 구할 수 없는 세상은 믿지 않는다는 이반을 욥과 같은 말로 침묵시킬 수는 없겠지요. 경건한 기독교 신자인 알료샤라도 이반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못합니다. 물론 신도 침묵한 채입니다. 대답할 수 없기에 바로 악이 만연하는 것입니다. 악이란 세계와 자기 자신을 향한 혐오가 바깥으로 전가되었을 때 생기는 폭력이나 파괴 행위입니다. 이는 타자뿐만이 아니라 스스로도 파괴해갑니다. (153)
저자가 보기에 "도스토옙스키가 주제로 삼은 것은 인간과 세계가 단절되었을 때 생기는 꺼림칙한 악의 연쇄라고"(153) 생각한다. 인간과 세계가 단절되 세상에선 "중동에서는 폭력과 폭력, 증오와 증오가 끊임없이 충돌하고, 유럽에서는 무슬림을 배척하자는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늘고, 일본에서는 혐오 발언이 가득하며 또 한국과 중국에서는 반일 감정이 높아만 간"(153)다.
그러니 저자는 나이브하지만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세계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159)다. "세계가 아무리 악해다 하더라도 세계와 자기 자신을 선하다 여길 수 있는 능력, 이것이 사랑하는 능력"(159)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해있다고 받아드릴 때 책임을 느낀다. 책임이란 타자에게 응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타자가 요청하면 거기에 응답한다, 세상과 자기 안에 있는 그 모든 악과 타락을 대면하고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기적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159)다. 마더 테레사나 예수는 기적을 실현했는데 그 기적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이유는 자기가 세상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자본주의(상세히 설명을 하는데 단지 자본주의=나쁜 것으로 말하지는 않는다)를 통해 악이 배양을 하는데 이 악의 시대를 건너기 위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악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지구를 뒤덮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당분간 - 얼마나 길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 존속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의 연쇄를 인간적인 연쇄로 바꿔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속한 '세간'(카리안 주 - 1. 세상 일반 2. 영원하지 않는 것들이 서로 모여 있는 우주 공간)과 얽힌 가운ㄴ데 살아가는 것을 저는 소중하게 여기려 합니다. 악의 연쇄가 언젠가 인간적인 연쇄로 변해가는 것을 꿈꾸며. 이는 구체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사회를 회복하는 일로 이어질 터입니다. 그때야말로 내가 나라는 것과 이 세상 사이에 생긴 골에 다리를 놓게 되겠지요. 이 다리가 있다면 악이 깃드는 장소는 사라질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또 스스로가 이 세상과 사회의 일부라 여기며 타자를 사랑하는 법을 아는 사람은 '핑키'나 '소녀A'처럼 '악'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요. (167-168)
불안과 텅 빈 마음에서 악이 있다고 저자는 계속해서 말한다. 그 공허를 메우는 것은 살인이 아니다. 살인은 공허를 더욱 벌릴 뿐이다. 내가 이 세상에 속해 있다는 것. 그리고 너 역시도 이 세상에 속해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는 것. 그렇게 텅 빈 골짜기에 다리가 놓이는 것은 바로 서로 사랑할 때 일어난다. 저자는 어쩌면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길다란 에세이를 통해 말하는 것인줄 모르겠다.
나가면서
얇은 에세이 책이다. 그렇게 두껍지 않다. 이 책을 미로슬라브 볼프가 새문안 교회에 왔을 때 교회 주변 카페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막 정리가 안 되었는데 지금 다시금 보니 더 새롭다. 완전히 이해는 잘 안 되었지만 다시 보니 전보단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물론, 나는 악의 시대를 넘너는 힘을 기독교적인 사유로, 신앙적인 언어로 표현하겠지.
악에 대한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인간을 어떻게 받아드리고 있는지 보여준다는 저자의 말이 참 인상깊다!
책 맛보기
민주화를 달성하고 군사정권의 숨통을 끊으며 새로 태어난 한국은 한때 지나침이나 모자람이 없는 그저 '보통 사람'이 주인공인 선진 사회로 변모해가는 듯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구제할 길 없이 치우친 '집중'과 현기증이 날 정도의 격차를 동반한 '과잉'이라는 악의 힘에 사회 전체가 병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이 부여한 인간의 신체적인 욕구를 초월한 과잉 욕망은 그 자체로 이미 질병이며 악이다. (6)
무엇이든 괜찮은 세상이라면 옳은 것과 틀린 것, 진실과 거짓, 아름다운과 추함, 성과 속이 같아질 것입니다. 그 결과 모든 일에 아무런 실감이나 보람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텅 빈 곳에서야말로 원리주의가 활개를 치지요. '실감을 느끼고 싶다', '믿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다', '기댈 만한 의미를 찾고 싶다'는 욕구가 사람을 원리주의를 향해 질주하게끔 하는 것 같습니다. (52-53)
온몸을 건 아들의 물음에 저는 그저 대답을 뒤로 미루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 대답을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용서에서 구하고, 기독교계 대학의 총장으로 취임해 남은 인생을 아들 같은 젊은이들과 마음을 교류하는 일에 바쳐야겠다는 생각으로 대학 개혁에 전념했지만 결국 대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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