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8장 26-40절
오늘 본문도 빌립이 나옵니다. 빌립은 계속해서 경계를 허무는 일들을 벌입니다. 얼마 전까지는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번에는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이때도 역시 예루살렘을 벗어난 곳에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구약에선 ‘구스’로 알려져 있는 이 나라는 당시로 보면 땅끝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에디오피아는 당시 이집트 남쪽에 있는 나일강과 맞대어 있던 나라였습니다.
이제 에디오피아 사람에게 조금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아프리카 중상부에 위치하기에 흑인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나라에서 굉장한 고위급이였나 봅니다. 한 나라의 국고를 맡은 관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재무장관쯤 되지 않나 싶습니다. 당시에 왕실 관리인들은 내시들이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디오피아 사람이 내시라는 것이 본문에도 확실히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데 27절에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도 아닌데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유대인일 확률은 극히 드뭅니다. 사실상 불가능이라고 봐도 됩니다. 이방인인데다가 그는 내시였습니다. 아시다 시피 내시는 거세를 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할례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고, 신명기 23장 1절에 거세를 한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명시해놨습니다. 요즘 말로 아싸 중에 아싸입니다. 유대교 체제 안에서는 저기 끝에 있는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갔던 겁니다. 아마도 이 에디오피아 사람은 자기가 인정받지 못 하지만 유대교에 굉장한 매력을 느꼈나 봅니다. 당시 다른 나라들이 섬겼던 신들과 그 관습들과 비교해봤을 때 유대교가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수 있습니다. 그는 유대교로 개종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왜냐하면 두루마기를 개인 소유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주 값비싼 두루마기인데 여간 마음이 아니라면 개인이 구입하고 지니긴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지금 내시는 빌립을 만나게 됩니다. 내시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소리 내어 읽고 있을 때였습니다. 성령님께서 빌립에게 수레로 가까이 가라 하십니다. 가까이 가니 내시가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는게 들립니다. 빌립은 묻습니다. 당신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 무슨 뜻인줄 아느냐고. 내시는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어 알 수 없다고 말하며 빌립에게 수레에 올라와서 앉으라 합니다. 내시는 아마도 빌립이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줄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나 봅니다.
그가 궁금했던 내용은 이사야 53장 7절 이하의 내용들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단순히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을 미리 알고 이렇게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는 유배를 간 이스라엘의 앞날들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에게 빛이 되지 못하고 있고, 자신들 역시도 빛 가운데 걷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약속과 목적에 대해 깊이 묵상한 것입니다. 기도하며 묵상하는 이사야의 마음에는 하나의 그림이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임무를 완성하고, 세상 나라들과 하나님의 백성이 주는 수치와 멸시를 자신의 몸으로 감당하고, 이 세상의 사악함에 짓눌려 죽는 종의 모습을 말입니다. 이사야 54장에 나오는 새 언약과 55장에 나오는 새 창조의 약속이 누구를 통해 어떻게 성취되는지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56장에 나오는 외국인들과 내시들에게까지 내리는 축복이 누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지 역시도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바로, 빌립이 전한 복음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고난 받는 종이시기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이 이제 이루어졌다는 말이었습니다.
내시는 복음을 듣자 세례를 받고자 합니다. 내시가 길을 가다가 바로 세례를 받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니 그는 마음이 뜨거워졌나 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가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에게도 닿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이자 내시인 그 역시도 이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내시가 세례를 받기로 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이야기가 자신이 살아갈 이야기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사마리아 땅도, 이방 나라 에디오피아 사람, 더 심하게는 내시도 유대교의 체계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그 경계가 허물어졌습니다. 마치 사도행전 8장의 이야기는 앞으로 나올 사울의 회심과 고넬료의 이야기의 인트로 같습니다. 뒤에 일어날 본격적 일들의 맛보기랄까요.
오늘 복음의 역사를 봅니다. 교회는 내시처럼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곧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내시처럼 하나님의 이야기를 살아가겠다는 표시입니다. 오늘 세속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비틀어 교회와 교인들에게 다른 이야기로 살아가게 합니다. 몇 년 전 봤던 한 기사의 내용이 떠오릅니다. 요즘은 잘 보도되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 기자들이 국회의원들 문자보는 것을 사진 찍는 게 많았습니다. 그 중 각종 청탁 내용들이 나왔는데 제 눈길을 끈 것도 한 청탁 내용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모 국회의원에게 지인은 청탁하는데 지인의 스펙을 쭈욱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스펙 중에 ‘어느 교회도 열심히 다닌다’고 써놨습니다. 아, 교회도 스펙이 되는 시대구나. 싶었습니다. 세상의 이야기와 전투를 벌여 승리해야 할 교회가 되려 세상의 이야기에 침투 당해 세상의 이야기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나 스스로 다시 돌아봅니다. 나는 하나님을 도구화한 적은 없는지. 교회를 이용하려고 한 적은 없는지. 내 욕망을 실현시키는 도구로 본 적은 없는지 돌아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내시처럼 하나님의 이야기를 받아드리고 하나님의 이야기를 살아내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수련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주제가 하나님 나라인데 이번 수련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가 우리 삶 속에 강력하게 침투하여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살아내 보이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주여, 힘차게 외치고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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