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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사도행전

[설교문] 사도행전 3장 1-10절(행 3:1-10, 행 3:1~10)

by 카리안zz 2020.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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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 소설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완전한 허구의 이야기는 아니고, 시각장애인이신 안요한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녹음하여 그 녹음을 토대로 이청준 작가가 글을 썼던 책이 바로 낮은 데로 임하소서입니다. 이 책에는 장애인이 되었고 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녹아 있습니다. 특히나 기억에 남는 대목은 안요한 목사님의 동료가 분개를 하는 장면입니다. 자신의 장애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그 말을 듣고는 분노 하였습니다. 결국, 그의 분노는 울음 섞인 절규가 되며 언제까지 이 비참한 육신의 짐을 지고 살아야 되는지, 한탄하는 소리가 여전히 기억에 남습니다. 장애를 가진 분들의 고통을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그 고통의 소리를 어느 정도 느낄 수는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장애를 가진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평생을 걸어본 적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무려 40년의 세월이었습니다. 평생을 장애와 함께 살아온 이 사람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서두에서 말씀드린 안요한 목사님의 동료처럼 분개와 절규가 가득 했었을까요. 분명 그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유대인이기에 순응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병이 부모나 조상의 죄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모세오경에서 잘못을 저지르면 삼사대까지 벌을 받는다는 가르침을 그들은 그렇게 이해했던 것입니다. 속으로 타는 응분과 분노, 원망, 좌절, 순응 등 온갖 마음을 가지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이 계신다는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함에 큰 좌절을 느꼈을 겁니다. 그것도 성전 문 앞에서 구걸을 하고, 온전한 다리로 성전 안을 들어가는 이들을 보고 있었기에 그의 눈빛은 참으로 쓸쓸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다른 날과 똑같이 성전 문 앞에 앉아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어그러지고 혼돈 가운데 있는 자신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이 돈이었습니다. 은과 금이지요. 앞에 두 사람이 지나갑니다. 늘 하듯 구걸을 했습니다. 그 구걸에 두 사람이 자신을 주목하여 바라봅니다. 그리곤 자신들을 보라고 말합니다. 순간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기대를 합니다. 그는 어떤 기대를 했을까요. 잘하면 한 몫 잡아서 며칠간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하는 기대였을까요. 그런데 그 뒤에 들려오는 말에 그의 그 기대는 깨지게 됩니다. 자신에게 은과 금이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은도 금도 없었으면서 왜 나에게 말을 걸었지 충분히 반문했을 텐데 어쩌면 그 뒤에 들려오는 말, 내게 있는 이것을 준다는 말에 또 한 번 기대를 걸어봅니다. 은과 금이 아니라면 황제가 박힌 동전을 준다는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는 며칠 간 기뻐할 수 있는 큰 기쁨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상상이라도 했을까요? 며칠 간이 아니라 평생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을 얻을 거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들이 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그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합니다. 분명 그 이름은 대제사장의 이름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대제사장은커녕 얼마 전에 십자가에서 죽었던 사람의 이름이었습니다. 성전 문 앞에 앉아 있던 이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들어봤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법 유명했으니 까요. 그런 사람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니깐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평생 걷는다는 게 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했으니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까요.

그러나 이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베드로가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에 힘을 얻습니다. 그가 치유되었고 회복되었습니다. 그가 얻었던 것은 잠시 잠깐의 기쁨이 아니라 참 기쁨이요, 위에서 오는 기쁨이었습니다. 얼마나 기뻤던지 그가 가장 하고 싶었던 행동을 합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나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나도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것을 보입니다. 그는 걸었고 뛰었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의 평생의 억눌림과 뒤틀려짐이 회복되는 그 순간이었습니다. 이사야서 35:6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라는 말씀처럼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이 놀라운 일은 성전 안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전 문 밖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움직이십니다. 성전 제도에 갇히지 않으시고 세상 속으로 뚫고 들어가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이름은 땅 끝까지 전파될 것입니다. , 이 은과 금의 문제가 뒤따르기도 할 것입니다.

 

중세 시대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대신학자가 교황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때 교황은 엄청난 돈을 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이제 교회가 은과 금이 없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자랑스레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던 아퀴나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이제 일어나 걸으라도 말할 수 없어졌습니다라고요.

우리 시대 교회를 생각해 봅니다. 다 맞다고는 할 수 없지만 미디어를 통해 드러나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최근에 유행하였고 방송이 끝난 <sky캐슬>에서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드라마는 대한민국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잘 드러냈다고 봅니다. 이 욕망의 중심에 대한민국 0.1%가 모여 사는 <스카이 캐슬>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사는 한 여인의 시어머니, 3대째 의사를 배출하는게 꿈인 시어머니가 공공연하게 권사님으로 불려지고 우리에게 익숙한 집사님, 권사님이란 용어가 이런 드라마에서 들려지는 것일까요. , 욕망의 정점에서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았지만 자살했던 한 여인의 무덤에는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미디어에는 은과 금을 가진 사람들을 표현할 때 교회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표현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진정 예수님의 이름에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것일까요. 이건희의 이름에 능력이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에 능력이 있다는 것보다 믿기 쉬운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초라해 보이는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데 금수저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그냥 정적들을 다 쓸어버리고 우뚝 솟았으면 어땠을까. 세상이 우러러보고 예수 믿는다고 하면 있어보이게 사람들이 생각하게끔 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던 적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계시록에서 보는 것처럼 좋은 것을 다 붙인 우상에 불과합니다. 은과 금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은과 금으로는 이 세상을 회복시킬 수 없습니다. 회복시킬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주의 말씀은 영원하다 했습니다. 로마의 황제도 또 역사상 위대해 보였던 이들도 말랐고 시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예수님의 이름은 계속되었습니다. 그 계속됨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졌습니다. , 우리 시대의 은과 금도 사라질 것들입니다. 이제 우리도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었던 것처럼 그와 같이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 일어나 걸으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외치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이제 기도하겠습니다. 오늘 개인의 영성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예수의 이름을 붙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은과 금이 우리를 유혹하나, 은과 금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나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다 같이 주여 힘차게 외치고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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