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에서 6장까지는 유다와 에브라임이 함께 다루어졌지만 7장부터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4에서 6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은 진리, 인애, 하나님 아는 지식은 없고 넘쳐나는 제사와 풍요에 대한 기원, 바알 숭배를 일삼는 현실, 그리고 사람을 죽이고 괴롭히는 피로 가득 찬 폭력이었습니다. 이 내용은 7장 이후로도 계속 이어집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이 실상이 고멜의 음란함의 실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2절
7장 1절부터 그 심각성을 말합니다. 마치 의사가 환자를 수술하려고 몸을 들여다 보는데 몸 전신에 암이 전이되어 있는 그런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두사람이 어지럽히고 있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1절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1절: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그들은 거짓을 행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둑질하고 밖으로 떼 지어 노략질하며
도둑질과 노략질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안팎으로 그러한 행위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북이스라엘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는 상황입니다. 치안이 무너졌다고 보면 됩니다. 이렇게 되면 힘없고 약한 사람이 가장 큰 피해를 입습니다. 재난이나 국가적 폭력에는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를 지금도 입어왔습니다. 우리나라도 독재시대때 그런 폭력이 넘실거리던 때였습니다. 제가 그 시절을 살아보진 않았지만 국가자체에서 통금은 물론이고 삼청교육대라는 곳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말 한 번 잘못 놀리면 거기에 들어가 목숨을 잃던가 정신을 잃던가 몸이 많이 상하던가 그렇게 되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대통령 욕 한번 잘못하면 그때는 잘못되면 심각해질 수도 있었던 때였다고 합니다. 또, 간첩 조작을 해서 만들었는데 그 때 간첩조작 대상으로 재일한국인들이 자주 물망에 올랐습니다.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어느 곳의 정체성을 가지지 않았기에 가장 버림받기 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본정부가 당연히 지켜주지도 않으니 재일한국인들을 책임져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한국 본토와도 연관이 없기에 어디 빽도 당연히 없었을 사람들이죠. 그러니 국가는 그들을 대상으로 간첩누명을 씌워서 죽이기도 하고 고문하고 감옥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어떤 한 가정은 그 충격으로 부모님들이 다 자살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또, 몇 십년 전에 일어났던 연쇄살인 사건이 있습니다. 유영철은 참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데 그 대상이 윤락녀들이었습니다. 윤락녀들을 되게 많이 죽였지만 유영철은 바로 잡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들 중에 가출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가정에서 돌봐주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겐 연락이 안 와도 찾아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유영철은 그걸 노렸던 거죠.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이런 폭력에 일반 사람들보다 더욱 노출이 됩니다.
그러니 ‘정의’란 말이 더욱 생각나겠죠. 예레미야가 진라와 정의를 행하는 사람을 한 명도 찾을 수 없다고 고발한 것이나(렘 5:1) 이사야서 59:14-15에 “정의가 뒤로 물리침이 되고 공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나타나지 못하는도다. 성실이 없어지므로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하는도다”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은 하나님께서는 모두 기억하고 계신다고 2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걸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걸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자 하나님의 부름대로 이끌려와던 이스라엘이 이제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에 없으니 폭력적인 세상이 도래했습니다.
3-7절
3절에서 7절까지는 북이스라엘의 상황을 알려줍니다. 개역개정보다는 새번역성경이 좀더 상황을 잘 알 수 있습니다. 3절을 제가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3절: 왕을 갈아치울 자들이 악한 음모를 품고서도 겉으로는 왕을 기쁘게 하며, 온갖 기만으로 대신들을 속여 줄겁게 한다.
왕을 갈아치우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북이스라엘은 빈번하게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주전 747년 여로보암 2세가 죽은 후, 15년가량 다섯 명의 왕이 즉위했습니다. 그 가운데 네 명의 왕은 쿠데타 세력에 의해 죽었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키는 이들은 악과 거짓으로 왕과 지도자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왕과 권력자들에게 아첨과 아부를 일삼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지요.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며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뭐가 되어도 빌붙습니다. 마치 친일파같은 사람들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일본에게 붙었다가, 미국에게 붙었다가, 정부에게 붙었다하는 자들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 오직 탐욕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정의가 공의가 실종되면 어떤 짓을 해서라도 이득을 취하려고 합니다. 아무리 앞에서 욕하는 것 같아도 뒤에서는 부러워하거든요. 가진 것을, 부유함을 부러워합니다. 올바른 일로 독립운동하고 삼대가 가난한 것보다 부정하고 탐욕을 향해 빌붙어 친일을 하여 부유해지는 걸 선택하는 세상. 그런 세상이 바로 정의와 공의가 무너진 세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자들을 4절에서는 간음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을 화덕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화덕은 빵을 굽는 기구입니다. 화덕은 빵을 발효시킬 때는 잠잠합니다. 하지만 이제 발효가 끝나고 빵을 구으려고 할 때 금방 불이 올라버립니다. 그러니 지금 반역하는 자들의 마음 상태를 화덕과 연관시켜 말하는 겁니다. 일시적으로 왕과 지도자에게 아부하며 기쁘게 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반역을 모의하는 게 화덕과 같습니다.
그렇게 속은 지도자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아서 그런지 몰라도 5절에 잔치를 엽니다. 아첨에 의해 자신의 권력을 즐깁니다. 결국 화덕의 불이 뜨겁게 태우듯이 왕과 지도자, 반역자들도 모두 뜨겁게 타버립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권력은 자신들의 힘과 지혜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상황은 세속화되고 있으며 자신 스스로 힘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예언자들이 파고듭니다. 책망과 심판을 전하지만 그럼에도 세속화는 멈추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두는 것. 그것을 호세아서는 끊임없이 간음이라고 합니다. 주일날 교회당에서는 하나님, 하나님 말은 하지만 사회, 교육, 정치 등 다른 영역에서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힘을 추구하는 것 그게 바로 간음이라고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8-12절
1절에서 7절까지는 북이스라엘 내부의 정치적 상황을 나타냅니다. 8절부터는 북이스라엘의 외부상황을 나타냅니다. 8절에서도 여전히 빵이 나옵니다. 8절의 뒤집지 않은 전병이 그 표현입니다. 바로 앞 단락에서 화덕으로 비유가 이어졌다면 이제는 그 화덕 안에 있는 빵으로 비유를 말합니다. 뒤집지 않은 전병은 우리로 치면 뒤집지 않은 무침개정도 될까 싶습니다. 빵도 뒤집어 주지 않으면 타버립니다. 타버린 빵은 먹을 수 없죠. 뒤집지 않은 부짐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쪽이 타버립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른 나라들과 구별되는 민족입니다. 그들이 뒤집지 않는다면 타버린 빵처럼 아무런 쓸모없는 존재가 되버립니다.
근데 북이스라엘이 이방민족을 따라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을 따라하면 그들처럼 힘이 생길 줄 알고 그랬던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치 ‘백발이 그에게 뿌려진다’는 호세아서의 표현이 적실합니다. 나이가 들고 쇠약해져 가는데도 그걸 모르고 언제나 20대인 것처럼, 힘있는 청춘인 것처럼 이방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열방을 따라하면 열방이 도와주고 힘을 줄줄 알았는데 실상은 반대였습니다. 힘을 빼앗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에게서 힘을 얻지 열방으로부터 힘을 얻지 않습니다. 국내 정치뿐만이 아니라 국외정치까지 완전한 세속화가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10절에 북이스라엘은 교만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부유하게 만드는 건 이방 세력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강하고 힘쎄 보이니까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은 많아졌지만 그들의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종교생활은 열심히 했지만 그들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힘과 안정과 부유함을 욕망했고 그걸 이방민족과 이방 신들이 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11절이 바로 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어려운 상황에서 애굽의 강함, 앗수르의 강함에 부르짖고 갔습니다. 북이스라엘이 강함에 끌린 이유는 물론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늘 불안했습니다. 위 아래 양 옆에서 적들이 쳐들어 옵니다. 불안하죠. 자연스레 힘있는 나라를 보면 마음이 가게 됩니다. 평생 가난하게 지낸 사람이 부유함을 어떻게 볼까요? 호세아서의 배경에서는 나라의 정세가 더욱 불안했습니다. 므나헴 시대에 앗수르 왕 불이 쳐들어왔습니다. 은 천 달라트를 주고서야 무마할 수 있었죠. 베가 때는 아람의 르신과 동맹을 맺었고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에게 침략을 받았습니다. 동맹은 아무런 힘도 못 발휘했고, 하솔, 길르앗, 갈릴리, 납달리 땅들을 빼앗겼습니다. 또,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 갔습니다. 마지막 왕이던 호세아 시대 역시 앗수르 왕 살만에셀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 공격으로 막대한 조공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걸 타파하기 위해 애굽 왕 소에게 사신을 보내었던 겁니다. 하지만 되려 애굽에 힘을 빌리려 했던 것이 앗수르의 화를 돋구게 되었습니다. 결국 호세아 9년 앗수르 왕 사르곤 2세에게 북왕국은 전멸당합니다.
이렇게 보면 이러한 상황에서 사실 힘에 집착하는 게 당연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예언자들의 소리는 전혀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기도 할 겁니다. 삶이 살벌하고 치열한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연스레 힘 있어 보이는 자들을 따라하고 그들의 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이 교만으로, 어리석음올 나타난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권세는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12절에서는 새 잡는 사냥꾼으로 비유하십니다. 어리석은 비둘기를 사냥하는 사냥꾼입니다. 이 징계는 훈육과 바로잡기 위해서입니다. 레위기 26장 18-19에서 제시한 근거가 있습니다. 다 같이 레위기 26장 18-19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레위기 26장 18-19절입니다.
18절: 또 만일 너희가 그렇게까지 되어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일곱 배나 더 징벌하리라
19절: 내가 너희의 세력으로 말미암은 교만을 꺾고 너희의 하늘을 철과 같게 하며 너희 땅을 놋과 같게 하리니
18절에 일곱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쉐바”와 호세아서 7장 12절에 “그 회중에게 들려준”에서 ‘들려 준’이란 단어가 히브리어 “쉐마”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쉐마, 들려준이 아니라 쉐바 일곱배로 쓰였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되었든 의미는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13-16절
13절에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선포됩니다. 이 말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울려퍼지는 탄식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그 끝은 죽음과 패망이죠. 13절부터 하나님의 행동과 이스라엘의 행동이 절묘하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건지시려고 했으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슬러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대조하십니다. 13절에 개역개정에 ‘건져주려’로 표현되었는데 구속하다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구속이란 대가를 지불하고 간져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구속입니다. 때로 훈계하시고 징계도 주시지만 그것의 목적은 구속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 구속 사역을 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거짓말은 어떤 거짓말일까요? 그 거짓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많은 제사를 드리지만 실제로는 열방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입니다. 마음은 전혀 다른 곳에 있다는 걸 확실히 보여주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이방 나라들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14절에 그 자세한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새변역 성경이 좀더 이해하기 쉽게 싸졌는데 제가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4절: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나, 거기에 진실이 없다. 오히려 침상에 엎드려 통곡한다. 곡식과 포도주를 달라고 빌 때에도 몸을 찢어 상처를 내면서 빌고 있으니, 이것은 나를 거역하는 것이다.
마음이 없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정성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마음은 지각과 지혜를 말하는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기반을 두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 진실한 믿음이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그들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게 힘과 모든 것이 있는데 이들은 전혀 다른 곳에 그 힘과 권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걸 행동으로 보입니다. ‘침상에서 슬피 우는 것’ 이건 이방 풍습입니다. 그리고 함께 모이다는 ‘스스로 칼로 상처를 내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상처를 내는 것은 바알 숭배 의식입니다. 엘리야가 바알 제사장들과 한판 붙을 때 그들이 몸에 자해를 한 장면을 떠올리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열성을 내는 이유가 “곡식과 새 포도주” 때문입니다. 그 풍요을 너무나 욕망해서 그 안에 하나님이 없어졌습니다.
15절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대조가 또 나옵니다. 내가 그들의 팔을 연습시켜 힘 있게 하였으나 그들은 내게 대하여 악을 꾀하는도다. 하나님이 연습시켜 힘 있게 한 건 우리가 익히 알 고 있습니다. 애굽을 탈출 했을 때, 광야를 지나고 살 때, 가나안 땅에서 전쟁을 할 때, 또 여러 경험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강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막상 힘이 생긴 이스라엘은 이제 위에서 본 것처럼 악을 꾀합니다. 부유함이 신앙이 되었고 그것을 위해 종교적 제사와 예배에 열심을 보입니다.
16절에 그들은 돌아오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높으신 하나님께 돌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그들은 속이는 화살과 같았습니다. 활을 쏘긴 하지만 목표물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그런 활 말입니다. 돌아왔다곤 하지만 하나님께로가 아니니 그들은 속이는 자들이죠. 그러니 그들을 속이는 활로 비유한 것입니다.
또, 속이는 활을 느슨한 활로 볼 수 있습니다. 제 구실을 못하는 활이죠. 15-16절의 맥락으로 이어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연습시켜서 강하게 하셨는데 악한 짓을 하니 제 구실을 못하는 것이죠. 결국 그들은 칼에 엎드러질 것입니다. 애굽의 종이었던 그들을 하나님이 구속하여 건져내셨는데 다시 그들이 칼에 엎드러지고 죽게 되니 애굽이 얼마나 비웃겠습니까.
나가면서
호세아서의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상황은 어찌보면 남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상황은 정말 유혹이 많았습니다. 강함을 추구할 이유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치이고 치이는 삶 속에서 평안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자들을 봅니다. 강대국입니다. 그들은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부유함을 소유했다고 눈으로는 보입니다. 우리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쟁사회, 성공을 부추기는 사회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요즘 자꾸 성공이라는 단어가 부쩍 눈에 들어옵니다. 이때 말하는 성공은 무엇을까요? 부유함입니다. 돈 얼마를 가지면 성공인가 따집니다. 10억? 100억? 아니면 무언가를 소유하던가 말입니다.
저 역시 그 유혹을 강하게 느낍니다. 가난하게 살았기에 그런 유혹을 많이 느꼈습니다. 돈 얼마를 가지고 있으면 내 어려움들이 다 해결될 텐데. 거기에 누군가는 추임새를 넣습니다. 돈이면 다 해결된다고. 세상의 모든 문제가 돈이 없어서 그렇게 생기는 거라고. 돈을 가지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까요? 때론 상상을 해봅니다. 돈 10억 가지고 있는 상상을 해봅니다. 마음이 어떠십니까? 뭔가 평안해지십니까? 듬직합니까? 살아갈 맛이 느껴집니까? 바로, 이것이 우상이요, 오늘 본문에서 북이스라엘을 끊임없이 유혹했던 우상의 정체입니다. 이 우상은 오늘도 지금도 여진히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돈을 가지고 있으면 다 해결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또, 평생 많은 돈을 가질 것 같지 않아서 확실히 말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믿고 따를 뿐입니다. 모든 것을 다 해결하는 것이 돈이나 하나님이냐.
오늘 말씀은 그 믿음을 선택해라 말하는 듯 싶습니다. 개인을 넘어 교회를 생각합니다. 교회에 대한 비판이 참 많았습니다. 많아서 그런지 만성이 된 거 같습니다. 이제 비판을 받아도 그러려니 합니다. 그러던 차에 코로나 제2의 사태가 터집니다. 그 원흉이 되는 자의 말을 보니 상당히 심각합니다. 자신만이 성경의 비밀을 열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닙니까? 신천지 이만희가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 본인을 통하지 않고서는 성경의 참 진리를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자의 말에 많은 사람들이 혹합니다. 이제 일부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유명한 대형교회 목사들과 장로들이 그 자의 말을 들으러 가자고 독려합니다.
최근에 어떤 법 하나 때문에 교계가 온 난리가 났는데 지금 그것보다 몇 백배는 더 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여기에 대한 언급을 한국교회가 강하고 할 수 있을까요. 교회 비판에 만성이 되어서 이제는 아무런 감각이 없어졌을 때 이번 주 뉴스는 너무나 참혹했습니다. 오늘 말씀 1절에서처럼 몸을 갈라 봤는데 온몸 전신에 암으로 전이가 된 것처럼 우리 한국교회도 지금 그렇게 된 것을 직접 목도하는 기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호세아서 6장 6절을 읽으며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6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하나님보다 더 알고 싶고 원하고 싶은 것이 많은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 우리의 마음을 지켜달라고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그 마음을 계속해 부어달라고 구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어 보입니다.
오늘 몇 가지 기도제목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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