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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예배

[책리뷰] 테레사 베르거 - 예배, 디지털 세상을 만나다(안선희 옮김, CLC)

by 카리안zz 2020.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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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점

 코로나 이후 한국 교회는 영상으로 모든 것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영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에 대해 비관적인 입장을 지닌 사람들도 거의 영상 예배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우리 교회도 유튜브 라이브로 지금까지 교회당에서 예배와 함께 드리고 있다. 나같은 경우 제임스 스미스의 책을 읽고 나서 몸에 대한 중요함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던 터라 영상 예배를 어떻게 받아 드려야 할까 고민하게 되었다. 물론, 전쟁, 재해 등에 코로나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기에 예배를 실질적으로 못 나오는 사람들을 위한 임시적인 예배로 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임시적으로 끝날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임시적이지만 이 예배의 형태도 역시 가능하다는 걸 암묵적으로 허용하는 터라 가나안 성도들 다수는 이 방식으로 예배드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다. 과연, 이 사태에 대해서 어떻게 봐야할까? 코로나 이후에 관한 책들은 많이 나왔지만 예배에 대해서 탐구하는 책들은 거의 보지이 않는차에 이 책을 보게 되었다. 코로나가 한창 심할 때 이 책을 샀고, 다 읽은 건 이번 달(7월)에 다 읽었다. 

 과연 저자는 어떻게 말할까? 디지털 시대로 돌입한 지금 말이다. 

 

아쉬운 점

 영상예배도 몸의 참여?

 

내가 영상 예배에 부정적이었던 이유가 몸의 결여였다. 이를 저자 역시도 예상했는지 이렇게 말한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예배 생활이라는 개념은 상당한 의혹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런 의혹은 온라인 예배란 육체에서 벗어난 가상의 '실재하지 않는'(un-real) 실행이라는 추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의혹들 뒤로 숨겨진 진실은 인간의 몸이야말로 기독교 예배의 기본적인 물질성이며 가장 주된 매체라는 사실이다"(64)

 

 그런데 저자는 영상 예배도 역시나 신체를 동반한다고 한다. 

 

이런 의혹에 대응하는 첫 단계가 실제로 몸 없이는 어떤 디지철 세계에도 들어갈 수 없고 어떤 웹사이트에도 접속할 수 없으며 어떤 애플리케이션도 설치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일이다. (70)

 

 이 문장을 읽고 많이 실망했다. 이후에 기술이 진보하여 몸에서 오는 촉감처럼 디지털로 인해 촉감의 발달이 일어날 것이라고 한다(72). 그런데 몸을 움직이는 것 그 자체를 몸의 참여로 생각한다는 게 참 웃겼다. VR로 축구 게임을 했다 치자. 그것과 실제로 축구를 하는 것의 차이는 정녕 없는 것일까? VR이 최대한 실질적인 감각을 구현한다 치자. 그럼 이제 실제로 축구를 하는 것과 VR로 축구를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없는 것일까? VR이 어느 정도 구현이 가능한 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세상은 과연 언제 올까 싶다. 적어도 근래에는 오지 않을 것 같다. 

 그렇기에 나는 저자가 말한 몸의 참여가 논증이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주로 드는 예화가 가톨릭 예배 

 나야 개신교 전통이기에 저자가 자주 이야기하는 기도문에 대해서 이미지가 잘 그려지지 않았다. 책을 읽어나다가 결국 나는 p. 129에 이렇게 메모했다. "음... 카톨릭에 대해 말하고 있어 그리 생동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나마 몇 년 전 친구를 따라 가톨릭 미사를 드려봐서 미사 이야기를 할 때는 조금 그림이 그려 졌다. 물론, 이건 이 책의 잘못이 절대 아니다. 이 책의 저자는 예일대 예배학 교수이다. 이 때 예배는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를 모두 포함한다. 그렇기에 오히려 가톨릭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것이 맞다. 

 하지만 내가 관심이었던 부분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개신교 예배였기에 설교와 성례에 대해서 이야기를 원했다. 성례에 대해서는 만족했지만 설교에 대한 부분은 전혀 없었다. 이 부분이 아쉬운 것이었다. 

 

 

저자와 나의 생각 차이

 저자는 이 사례를 언급한다.

 북미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사제로부터 축성된 빵과 포도주를 받는 '성찬 전례'의 시간이 되자 시리아의 정교회 기독교인들은 끔찍한 전쟁 한 복판에서 한 무슬림 이웃의 컴퓨터 주변에 모여들어 스크린 앞에 정리해 놓은 빵과 포도주를 나누었다. (202)

 저자는 이 특수한 상황을 그저 전쟁 상황에 한정해서 말하지 말자고 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저자와 의견이 갈린다. 나는 전쟁과 재해와 같은 상황을 코로나 상황으로 본다. 그래서 이 특수한 경우로 한정하고자 한다. 

 

 

생각해볼 지점들

 신비주의 경험

 

 한 신비주의자는 자기 자신이 감실로 옮겨져 그리스도를 맛보는 경험을 하였고, 다른 신비주의자들은 미사에서 사제들만 받았던 성찬을 기적적으로 받는 경험을 하였다. 
 어떤 여성 신비주의자들은 실제로 빵과 포도주를 받는 것(상당히 제한된 경우지만) 보다 씹는 감각 및 혀로 느끼는 달콤함과 함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신비스러운 성찬 쪽을 선호하게 되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20세기 예전 갱신 운동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신학자들 모두 이런 선호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관심하는 것은 이런 신비주의적 경험들이 예배 출석과 참여에 관한 충분히 복잡한 개념들을 가리키는 신호로 읽힐 수 있는 가능성이다.
 결국, 교회는 이들 신비주의자의 경험 다수를 공인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특별한 한 가지가 이 콘텍스트에서 언급할 가치가 있는데 아시시의 클레어(Claire of Assisi)가 환상 속에서 미사를 경험한 일이다. 
 어느 성탄절 밤, 그녀는 너무 아파서 자신의 방에서 나갈 수조차 없게 되었을 때 아시시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대성당'에서 거행된 미사의 장면들을 환상으로 보게 되었다. 클레어가 본 이 환상은 너무나도 선명하여 그녀는 후에 그 미사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댈 수 있을 정도였다. 1958년 교황 비오 12세는 성 클레어를 이 환상을 본 것을 근거로 하여, 텔레비전의 수호성인으로 지정하였다. (89)

 

 신비적 체험과 디지털을 연결시킨 지점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물론, 저자도 언급했지만 칼뱅주의자들에겐 동의되지 않겠지만 흥미로웠다. 

 

 

성례

 내게 이 책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제5장 성례전의 비트와 바이트였다. 일단 이 책에서 나는 성찬을 어떻게 할까가 가장 궁금했다. 사실 기존 교회는 설교를 들으면 예배를 드렸다고 말하듯이 심하게는 설교를 예배의 전부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 책이 주목받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대부분의 교회는 그저 설교를 영상으로 전달하면 될 뿐이다. 몸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관심사였다. 그리고 우리 교회야 매달 한 번 성찬을 드리기에 몸을 사용하기에 이 책에서 성찬을 어떻게 말하는 가가 제일 관심사였다. 성찬 때 신체를 움직인다. 내 손은 빵과 포도주잔을 만지며 내 입은 빵과 포도주를 맛본다. 과연, 영상예배는 이를 대체할 수 있을까? 이게 내 주된 의문이었고 이 책을 읽은 이유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들은 일년에 한 두번 성찬을 하기에 예배와 신체를 생각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책이 주목받는 않는 건 당연한 거였다. 

 

 저자는 이 문제를 이렇게 접근하려고 한다. 

 

 그 매개가 끊임없이 변화해 온 성례전 실행들과 끈질기게 씨름해 온 2000년의 세월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 세월은 적어도 동시대의 관심사들과 씨름하기 위한 교훈적인 패턴을 제공해 준다. 
 가톨릭의 성례전 전통은 고정되고 획일화된 한 덩어리의 물질로서 동시대의 관심사들에 대해 일방적으로 전달되고, 수용되어야 하며, 그래서 유념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이 전통이란 다양한 실행들 및 해석들과 계속하여 씨름하는 가운데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살아있는 과정이어야 한다. 
 '전통'으로 지정되는 것은, 특히 이것이 과거를 승인해 주는 주장을 포함하는 경우에 항상 선택적이고 유동적이며 안정적이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재지정의 가능성도 열려 있다. (206-207)

 

 이 접근이 저자가 디지털 세상에서 예배를 보는 관점이다. 지금 우리가 드리고 있는 이 예배의 형태는 그저 고정되어 내려온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위의 인용문을 읽고 나는 가다머가 생각나긴 했지만 그건 논외로 보고 과거의 시대에도 예배는 그 시대의 상황과 고민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저 위의 문장에서 그 근거가 없다고 메모를 했다. 하지만 그 근거를 저자는 뒤에 언급을 한다. 

 

 하나의 신앙 공동체가 성찬식 식탁에 있는 집례자 주위에 모여 온전히 집중하며 참여하면서 하나의 성찬 빵과 잔을 나누는 일은, 결국 기독교 역사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실제의 삶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연약함, 결함이 있는 신학적 숙고, 그리고 나쁜 목회 실행 때문만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 예배의 역사 전체를 통해 성찬식을 거행하는 방식들이 너무나 광범위했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에서 성찬식을 거행했던 다양한 방식들 가운데는 포도주 없이 거행했던 다양한 방식들 가운데는 포도주 없이 거행했던 기독교 성찬식 실행도 있었고 금욕적인 여성들이 '대성당 금욕'을 실행하면서 자신들의 식탁에서 빵을 가지고 스스로 성찬식을 실행했던 일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중세시대에 눈으로만 참여하는 성찬식을 지속적으로 인정했던 일과, 환상을 통해 성체를 배령했던 다양한 방식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237-238)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제3장에서 보았듯이 가톨릭 성찬식은 예배를 위해 한 장소에 직접 모여든 사람들만의 것인 적은 없었으며 오히려 전 지구에 퍼져 있는 전 교회가 시간과 영원을 가로질러 거행하는 예식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디지털로 매개되는 성찬식 실행들에 관한 신학적 성찰을 왜 지난 100년 동안의 신학적 강조점들 안으로만 좁혀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여기서 과거의 생각들을 오늘날의 디지털 실재들에 단순하게 적용하면 된다고 제안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성찬식 실행에 관한 미세한 차이를 고려하는 대단히 사려 깊은 그리고 2000년을 가로지르는 성찰들이 이미 있었다는 점이고, 이는 성체배령의 양식들에 관한 숙고라는 점이다. 교회는 이와 유사한 사려 깊음과 미세한 차이를 고려하는 태도로 오늘날의 문제들을 다룸에 있어서 바로 그 역사에 빚지고 있다. (240)

 

 그러니깐 저자는 지금의 예배의 형태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시대의 상황과 맞추어서 고민하였던 흔적들이 있었고 그 흔적들이 예배로 모습이 나왔다는 것이다. 오늘날 디지털 역시도 그 상황에 맞춰서 예배의 형태를 고민해보자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나는 저자의 이 주장에 동의한다. 

 

 

하나님은 어느 곳이든 임재하신다. 

 그렇게 주장하면 저자가 말하는 강조점이 이어서 나온다. 그건 하나님이 어디서든 임재하신다는 것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디지털 가상 공간에서도 역시 임재한다. 

 

은혜를 매개하는 하나님의 권능은 한계가 없다는 확신을 따른다. 감리교 목회자인 그레고리 닐은 이 입장을 다소 상세히 설명하였다. ....

설교에 있어서의 은혜의 수단은 인터넷으로 전달될 수 있는데 거룩한 성찬식의 은혜의 수단은 그렇지 못하다는 진짜 이유가 있는가? (228)

 설교도 된다면 성찬이 왜 안 되겠는가? 저자는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관점에서 이 일을 보자고 한다. 그리고 주권과 은혜를 가장 중심에 두고 디지털 세계를 바라보자고 한다. 

 

... 신학적 변론의 내용은 하나님은 어떤 수단을 통해서든 은혜를 매개하실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이 주장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 적절하고 어려운 신학적 질문은 어떤 특정한 은혜의 수단에 '하나님이 자신을(God self) 묵어 두시느냐 하는 것이고 이 질문에 대한 답들은 서로 다른 기독교 전통에 따라 상당히 달라질 것이다. (230)

 

 저자는 제5장을 마무리 할 때쯤 이렇게 말한다. 

 

 천문학자이며, 예수회 수사이며, 바티칸 천문대의 소장인 가이 콘솔마그노는 교회가 외계인을 만나면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것인지의 질문을 게속하여 받고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 자체가 우리에게 대단히 새로우면서도 동시에 절대적으로 기초적인 일련의 도전들에 직면케 한다는 것이다. 
...
 가장 기본이 되는 신학적 확신은 하나님의 권능은 우주를 가로질러 자유롭게 움직이며, 또한 모든 피조물 사이를 그들과 함께 그 안에서 실제로 오가실 수 있다고 확언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가정하건대, 하나님은 사이버 공간을 통해, 그리고 화상 사이를 이동하심에 있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신학적으로 너무 광범위하여, 디지털로 매개되는 성례전 실행들을 둘러싼 복잡한 신학적 씨름들에 잘 복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본적인 신앙을 주장하는 것으로서는 분명 유익하다. (250)

 

 이 책을 유익하게 읽었다는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다. 고든 미코스키의 말처럼 우리가 해야할 질문은 "성찬식에서 주님은 어떤 방식으로 임재하시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성찬식에서 어떤 방식으로 참석할 것인가?"이다. 나는 이 책 전부를 읽으라고 말하고 싶진 않지만 5장 만큼은 꼭 다들 읽어봤으면 좋겠다. 이 책 빌려서, 5장 만큼은 꼭꼭 읽어보자. 예배와 성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목회자들은 필수겠지?

 

성찬의 형태

 이 책에선 증강현실을 말한다. 포켓몬스터도 언급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증강현실로 성찬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233). 

 나는 증강현실까지는 너무 긴 기술과 퀄리티를 요하지만 영상매체를 통해서 성찬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이 점을 자세히 살펴보려면 종교개혁 때 성찬논쟁을 살펴보면 유익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지금 디지털 세계의 성찬 방식을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지 다각도로 배울 수 있을 것같다. 

 어쨌든 이 책을 읽으며 몇 가지 생각을 해봤다. 우리야 신부가 직접 빵과 포도주를 주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각자가 집에서 빵과 포도주를 준비해서 유튜브 라이브 영상을 통해 성찬을 참여할 수 있지도 않을까? 건물 안에서 몸을 참여해야 한다는 내 기존의 생각이 바뀌었다. 대신 바라는 점에도 썼지만 성도의 교제 관점에서 디지털을 어떻게 봐야하는가의 문제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좀더 바라는 점

 저자의 예배가 2000년 간 그 상황에 맞춰서 등장했다는 것을 좀더 다양하게 보여주었으면 한다. 결국 그렇게 탐구하다 보면 기술과 예배라는 측면에서 2000년 역사의 기독교를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나온 책은 엄청 두꺼워 지겠지만. 

 성도의 교제라는 측면에서 과연 디지털은 어떨까? 나는 현실 목회를 하고 있는 실정에 디지털은 그렇게 큰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 얼굴과 얼굴이 만나면 훨씬 더 많은 교제를 나눈다. 줌 어플을 통해 하는 영상 통화보다 훨씬 유익하다. 이 책의 주제는 아니지만 그 점을 탐구하는 책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싶다. 

 

 

나가면서

 많이 배웠다. 디지털 시대에 예배를 근본적으로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대형교회들이야 원래 각 교육관이나 예배실에서 영상예배를 드렸지만 오늘 코로나로 인해 거의 모든 교회들이 영상 예배를 겸하여 드리고 있다. 신학적으로 한 번 쯤 돌아봐야 하고 우리 나라 현실에서 과연 영상 예배는 어떤 식으로 변해갈까? 그저 코로나 임시로 끝이날까? 아니면 계속 지속되어 가나안 성도들이 대형교회도 가지 않고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는 날이 도래할까. 이미 시작되었다. 거기에 대한 대답을 이 책에서 조금이라도 찾길 바란다. 나에게 유익한 책이었다. 

 


메모

 

 만일, "종교"가 제도화되고 조직되고 권위가 부여된 오프라인의 종교만을 가리킨다고 전제한다면, 동계 수치가 이 말을 증명해 줄 것이다. 이런 경향을 보여 주는 한 수치를 인용해 보자면 미국의 청년 가톨릭 신자의 72%가 SNS를 사용하고 있다. 반면, 매주 미사를 출석하는 청년의 비율은 15%에 불과하다. (37)

- 과연, 온라인 예배를 임시가 아닌 예배의 형태로 시작한다면 그 당위는 둘째치고 무조건 인터넷으로 참석할까? 오히려 과도한 경쟁(끌어모으려는)이 일어나지 않을까? 그리고 유튜브 라이브만해도 실시간 라이브일 때 밑으로 유명한 교회들의 라이브가 목록으로 나와있다. 여기서 드리나 대형교회의 라이브를 들으나 별 차이는 없지 않겠는가? 

 

 

 

더욱이 인간의 진보에 대한 가능성은 폭발적으로 커지려는 시점에 있는데 유전자 편집, 뇌에 칩 이식하기, 그리고 인공 혈액 등이 곧 가능해질 것 같다. 이런 기술의 진보 중 그 어떤 것도 교회 문 앞에서 멈춰 서지는 않을 것이다. (75)

- 영상 예배도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봐야 할까? 

 

 

 

내가 내 손으로 직접 성호를 긋는 행위만큼이나 실제였고 의미가 깊었다. (78)

- 과연 그럴까? 내가 키브드로 치는 행위와 손으로 성호를 긋는 행위가 같을 수 있을까?

 

 

 

또한, 그는 일부 남성들이 "입을 딱 벌리고 아름다운 여성들을 바라보기 위해" 교회에 나오고, 또 어떤 사람들은 "소년들의 젊음이 피어나는 모습이 궁금하여" 교회에 나온다고 비난하고 있다. (91)

- 으흠?!(이렇게 신앙을 시작한 사람들일 적지 않을 텐데...ㅋㅋ)

 

 

 

기술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함께 기도할 수 있고 함께 찬송할 수 있으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자비로운 사랑을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어떤 국경도 이 사랑의 나눔을 막을 수 없습니다. (100)

- 개신교에서는 사제가 아니니 이렇게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아니 원래 이렇게 해왔다고 하는게 더 정확하다.) 

 

 

 

만일, 직접 함께 참석하는 일이 더 이상 예배를 위해 모이는 일을 위한 기반이 되지 못하는 현실이라면 예배신학의 기본 좌표들은 이제 새로운 여행을 위하여 닻을 올린 듯 하다. (113)

- 코로나로 강제 현실이 됨...

 

 

 

교회의 교제는 하나님에 의해 유지된다는 본질과 이 점이 온라인 예배 실행에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제6장에서 계속 살펴볼 것이다. (133)

- 하나님이 디지털로도 임재하신다. 

 

 

 

그리고 위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지리적 거리를 극복할 수 있을 텐데 굳이 지리적 거리에 대한 응답으로서 디지털 매개를 도입할 필요가 있겠는가? (243)

- 성찬, 세례, 설교 등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책 맛보기

 

예배하는 사람들이 성찬을 받는 사이보그들도 아니지만, 많은 사람이 완전하게 '자연 그대로의' 진보되지  않은 몸으로 오프라인 예배에 출석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상 한쪽의 '자연적인 것'과 다른 한쪽의 '인공, 기술, 혹은 인간이 만든 것' 사이의 명박한 구분은 그 해석력을 상실하였다. (75)


디지털로 매개되는 기도 및 예배 실행들을 탐구하는 일은 따라서 우리가 그것이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매개되지 않는 "순수한", "영적인" 몸으로의 현존이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강요한다. (76)


더욱이 이 몸들은 몸을 진보시키는 기술들과 디지털로 가득한 실행들에 점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다. 나는 이 글을 안경이 없이는 읽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글이 컴퓨터에 자동으로 저장된다는 것이 그 예일 것이다. (76)


교회는 인간들이 한 장소에 직접 함께 출석하는 일로 만들어지는 것 또한 아니다. 교회를 '만드는' 이는 궁극적으로 성령의 힘 안에서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이다. 따라서 바로 그 하나님이 예배를 구성하는 일차적 동력이다. 물론, 신학적으로 새로운 소식이 아니라 교회론적 기초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확신들과 오늘날의 현실이 대화할 수 있도록 허락만 해 준다면, 이러한 근본적 확신들은 디지털 시대에도 놀랍게 잘 들어맞을 것이다. (121)


 나는 디지털로 매개되는 성찬식 실행들에 관한 나의 성찰에 마지막 논점을 더하려고 하는데 이는 서로 다른 미디어 플랫폼들과 교회 전통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성찬식 실행들을 일반화하려는 것에 대한 경고다. 
 디지털로 매개되는 성찬식 실행들에 대한 그 어떤 숙고도 이에 관련된 다양한 미디어 플랫폼들과 그러한 실행들의 서로 다른 교회적 문화적 위치들을 심각하게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시리아의 기독교인들이 극악한 내전 속에서 이웃 이슬람교도의 컴퓨터 스크린 앞에서 거행한 성찬식은 트위터를 통한 감리교의 성찬식과 다르며, 또한 이 감리교의 성찬식은 아바타가 디지털 빵과 포도주를 받아 '세컨드 라이프'와 같은 가상 세계에서의 성공회 성찬식과는 또 다르다. (236)


특정 지역과 상관없는 거룩한 장소들의 출현과 오프라인 성소로부터 예배의 떠남은 직접 함께 참석하는 것 보다 예배의 동시성이 우위를 점한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디지털로 매개되는 예배에서는 "물리적으로 같은 장소에 있는 것"보다, "함께 참석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 결정적인 특징이 되어가고 있다.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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